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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史 : 네이버 知識百科

  • 生沒年 未詳. 高句麗時代의 王族. [內容] 미천왕의 아들이며, 故國原王의 아우이다. 搖動(遼東)地方을 直接 掌握하게 된 慕容皝(慕容?)은 中國 內地로 進出하기에 앞서, 먼저 高句麗와 우문氏(宇文氏)를 次例로 멸망시키려 하였다. 342年(고국원왕 12) 慕容皝은 4萬의 軍隊를 直接 이끌고 高句麗를 侵攻하였다. 高句麗는 慕容皝의 侵入路를 險하고 좁은 南道(南道)가 아닌 平滑한 북도(北道)로 豫想하였으므로, 그는 淨甁 5萬을 이끌고 北道를 防備하였다. 反面 고국원왕은 險하고 비좁은 南道를 少數의 弱卒로 防備하였다. 그러나 豫想과는 달리 慕容皝이 이끄는 主力部隊 4萬은 남도로 나갔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寓) 等이 軍士 1萬5000名을 이끌고 北道로 쳐들어 왔다. 이에 南道를 防備하던 高句麗軍은 木저性(木底城 : 遼寧省 瀋陽과 撫順 사이)에서 慕容皝의 大軍에 크게 敗하고 말았다. 그러나 北道에서는 왕우의 軍隊를 맞이하여 모두 敗沒시켰다. 이 消息을 들은 慕容皝은 焦燥하게 되어...

  • 新羅의 第27代(在位: 632年~647年) 王. [要約] 善德女王은 三國時代 新羅의 第27代 王이다. 在位 其間은 632~647年이며, 眞平王의 長女로 眞平王이 아들 없이 죽자 和白會議에서 王으로 推戴했다. 在位 期間 동안 高句麗와 백제의 侵略이 頻繁해지자 黨과 聯合하여 國家를 保存하려 했고, 백제의 侵略으로 洛東江 方面의 據點인 대야성이 陷落되자 黨에 使臣을 보내 救援을 要請하기도 했다. 黨에 留學 中이던 磁場을 歸國시켜 佛敎思想을 王權强化策으로 積極 活用했고, 護國 中心 寺刹인 皇龍寺에 王權의 象徵物로 區層木塔을 建立했다. 毘曇 等 眞骨 貴族들의 叛亂 渦中에 在位 16年 만에 죽었다. [開設] 性은 金氏(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의 長女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眞平王이 아들이 없이 죽자 和白會議(和白會議)에서 그를 王位에 推戴하고, ‘聲調皇考(聖祖皇姑)’란 號를 올렸다고 한다. 卽, 선덕여왕(善德女王)이 卽位할 수 있었던 것은 ‘聖骨...

  • 中國 遼寧省 해성視 영성자둔 영성자村에 있는 三國時代 高句麗가 遼河流域에 設置한 防禦性 中 하나인 城郭. 酸性. [開設] 『三國史記(三國史記)』地理誌(地理志)에 依하면 安市城(安市城)의 원이름을 ‘안村홀(安寸忽)’이라고 하였다. 所在地에 對해서는 從來 意見이 紛紛하였다.『금사(金史)』지리지에 따라 滿洲 개평(蓋平) 東北의 탕지步(湯池堡)에 非情하기도 한다. 또한 『이계집(耳溪集)』이나 『我邦疆域考(我邦疆域考)』에서는 滿洲의 봉황성(鳳凰城)에 非情하기도 한다. 봉황성을 安市城으로 본 것은 17世紀 以後 燕行士(燕行使)들에 依해 始作되었다. 當時 高句麗와 黨의 戰爭에 關한 民間傳承을 다룬 文學作品들이 明나라에 流行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冊들이 壬辰倭亂(壬辰倭亂) 때 朝鮮에 流入되었다. 이 作品들에 薛仁貴(薛仁貴) 英雄譚의 舞臺인 鳳凰山과 歷史聯의(歷史演義)의 舞臺인 安市城 및 安市城主로서 楊萬春(楊萬春)의 活躍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17世紀 燕行路上에...

  • 新羅 初期에 쓰이던 王號. [內容] 『三國史記』 新羅本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條에 다음과 같은 說話가 傳한다. 처음에 南解王(南解王)李 世上을 떠나자 有利(儒理)가 當然히 王이 되어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脫解)가 平素 德望을 지니고 있어서 그에게 王位를 讓步하고자 하였다. 탈해는 말하기를 ‘제가 듣기로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누가 이빨이 많은지를 알아봅시다.’라고 하였다. 琉璃의 치리(齒理: 잇金)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자 左右 臣下들과 더불어 王으로 받들고, 尼斯今(尼師今)이라고 불렀다. 金大問(金大問)은 이르기를 ‘尼斯今은 方言으로서 치리(齒理: 잇金)를 일컫는 말이다. 이빨이 많은 것으로써 서로 王位를 이어갔으므로, 尼斯今이라고 稱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說話는 以上과 같으나, 尼斯今의 語源에 關해서는 아직 論難의 餘地가 있다. 近來에 와서 尼斯今이란 ‘니슨金’ · ‘닛금’ · ‘니은金’이 賃金으로 變한 것으로...

  • 古朝鮮時代의 法律. [開設] ‘팔조금法’·‘禁法八條’라고도 한다. 『三國志』 魏書(魏書) 동이전과 『後漢書』 동이전에는 記者(箕子)가 朝鮮에 와서 8條의 敎法(敎法)을 만들어 人民을 敎化시켰다고 記錄되어 있다. 그러나 이른바 樂浪朝鮮(樂浪朝鮮)의 犯禁8兆(犯禁八條)라는 것은 朝鮮 本來의 法金이었다는 說이 있다. 다만 이것은 8條의 校(敎)가 아니라 그 自體가 法琴·禁約(禁約)의 性格을 띠고 있다. [內容] 8兆法琴의 全文은 傳하지 않고 3個 條만이 『漢書』 地理誌에 傳한다. 卽, ① 사람을 죽인 者는 死刑에 處한다. ② 남에게 傷害를 입힌 者는 穀物로써 賠償한다. ③ 남의 物件을 훔친 者는 데려다 奴婢로 삼으며, 贖罪하고자 하는 者는 1人當 50萬 前(錢)을 내야 한다는 것 等이다. ①은 生命에 關한 것, ②는 身體에 關한 것, ③은 財産에 關한 것이다. 그런데 竊盜罪의 法禁에서 贖罪하고자 하는 者는 50萬 錢을 내야 한다는 ③의 項目은 지나치게 苛酷해 8兆 本來의 項目으로는...

  • 南北國時代 統一新羅 순정公의 否認. [要約] 수로부인은 南北國時代 統一新羅 순정公(純貞公)의 夫人이다. 新羅의 鄕歌인 「獻花歌(獻花歌)」와 「해가(海歌)」의 主人公이다. 수로부인은 순정公이 江陵太守로 赴任할 때 同行하였는데, 바닷가를 지나고 있을 때 한 老人이 높이가 千 길이나 되는 바위 위에 핀 철쭉꽃을 꺾어 와 「獻花歌」를 지어 부르며 바쳤다. 以後 바다의 용이 婦人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니, 百姓들이 모여 「해가」를 지어 불러 수로부인을 救하였다고 한다. [人的 事項] 수로부인은 성덕왕(聖德王, 在位 702~737) 臺 순정公의 夫人이다. 수로부인의 男便인 순정公은 商才(上宰)를 歷任한 김순정(金順貞)으로 보이는데, 武烈王系의 直系였기 때문에 地域的 重要性을 띄던 江陵의 太守가 되었다. 순정公과 수로부인은 聖德王의 側近이자 當代 有力한 人物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경덕왕(景德王, 在位 742~765)의 王妃 삼모부인(三毛夫人)은 김순정과 수로부인의 消失日...

  • 6世紀~10世紀頃 滿洲 東北部 地域에 居住하였던 住民 集團. [要約] 靺鞨은 6世紀~10世紀頃 滿洲 東北部 地域에 居住하였던 住民 集團이다. 北齊(北齊) 茂盛第(武成帝) 下請(河淸) 2年(563年)에 朝貢한 것으로 처음 登場하여 요(遼) 太宗(太宗) 會同(會同) 元年(938年)까지 記錄이 보인다. 居住 地域과 風俗의 類似性 等을 根據로 肅愼-挹婁-물길의 後裔이자 餘震의 先祖로 言及되기도 한다. [系統과 名稱] 靺鞨의 系統에 對해서는 肅愼 · 挹婁 · 물길 · 말갈 · 餘震으로 이어지는 퉁구스系 種族이라는 一元的 系統論과 靺鞨로 通稱되는 集團 속에 藝脈界(濊貊系)와 肅愼界(肅愼系)가 섞여 있다는 多元的 系統論으로 大別할 수 있다. 一元的 系統論은 血緣的 同質性에, 多元的 系統論은 文化的 同質性에 焦點을 두며, 수 · 黨 時期 中國人이 東北아시아 二種族을 낮추어 불렀던 卑稱(卑稱)이란 見解와 高句麗의 一部 被支配 住民을 가리키는 種族名이었다는 說이 있다. 靺鞨의 意味로는 原音(原音)...

  • 南北國時代 渤海의 第2代 王. [要約] 武王은 南北國時代 渤海의 第2代 王으로 在位 期間은 719~737年이다. 本名은 대무예(大武藝)이다. 726年 黑手말갈 討伐과 동생 대문예의 黨 亡命 等으로 黨과 緊張이 高調되는 가운데, 732年 요서 地域의 거란을 支援하기 위해 黨의 등주를 攻擊하고 突厥 및 거란과 聯合하여 馬島産戰鬪를 벌였다. 武王臺의 活潑한 領域 擴張 政策으로 門王代의 황제국 體制를 確立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家計 및 人的 事項] 渤海를 建國한 古往(高王) 大祚榮(大祚榮)의 赤字(嫡子)로, 古往 在位 時期 繫累君王(桂婁郡王)의 職位를 받았다. 719年 古往이 죽고 渤海의 第2代 王으로 卽位하였으며, 黨으로부터 渤海郡王(渤海郡王)을 받았다. 兄弟로는 대문예(大門藝), 대槍髮瘕(大昌勃價), 大湖아(大胡雅), 大林(大琳), 大我랑(大郞雅) 等이 있다. 아들은 대도리행(大都利行), 大欽茂(大欽茂), 臺욱津(大?進), 대번(大蕃) 等이다. 丈人은 林我相(任雅相 또는 任雅)이며, 從兄...

  • 南北國時代 渤海의 第3代 文王 大欽茂의 둘째 딸인 公主. [開設] 第3代 文王 大欽茂(大欽茂)의 둘째 딸이다. 生沒年에 對하여 書籍에는 全혀 찾아볼 수 없었으나, 1949年부터 中國學者들에 依하여 推進된 옛 渤海王國의 遺跡 發掘에서 渤海가 建國 初의 本據地로 삼았던 吉林省 돈化現(吉林省敦化縣)의 육정산古墳群(六頂山古墳群) 가운데 정혜公主의 古墳에서 出土된 墓碑文에서 알 수 있게 되었다. 卽, 정혜공주碑文에 따르면 文王의 둘째 딸로서 出家하였으나 그 男便은 公主가 죽기 前에 죽었으며, 정혜公主는 ‘補力(寶曆) 4年 여름 4月 14日 乙未’에 죽었다. 나이 40歲였고, 정혜공주라는 諡號를 받았으며, 補力 7年 겨울 11月 24日 甲申에 秦陵(珍陵) 서원(西原)에 配臟(陪葬)되었다는 事實만이 鼻紋 잔결(殘缺)로써 겨우 알 수 있을 뿐이다. 公主가 죽었던 補力 4年은 서기 777年인바, 40歲였으니 서기 737年에 出生한 것이 된다.

  • 慶尙北道 경주시에 있는 三國時代 新羅 時期의 돌무지덧널무덤. 積石木槨墳. 私的. [開設] 光復 直後인 1946年 韓國人에 依해 最初로 考古學的으로 發掘된 遺跡이다. 三國時代 新羅의 首都 慶州에 分布하는 典型的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副葬品으로 高句麗廣開土大王을 記念하는 名文이 새겨진 靑銅 豪雨(壺?)가 出土되어 新羅古墳 硏究에서 重要한 位置를 차지하게 되었다. 本來 壺杅塚은 慶州노서리古墳群의 一員으로서 1963年 1月 21日 史跡으로 指定된 바 있으나 2011年 7月 28日에 慶州노서리古墳群을 비롯한 5個 古墳群이 慶州 大陵院 一員으로 統合되면서 史跡으로 재지정되었다. [內容] 慶州 노서동 第140胡粉으로 1946年 國立博物館이 銀鈴總(銀鈴塚)과 함께 發掘하여 두 古墳을 封土가 連接된 瓢形(瓢形) 雙墳(雙墳)으로 推定하였다. 發掘에서 두 古墳의 封土 周圍로 두른 호석(護石)李 一部씩 드러나 이를 情(正) 原形으로 復元할 境遇 封土 一部가 겹친다고 본...

  • 南北國時代 統一新羅 第38代 王. [要約] 元聖王은 南北國時代 統一新羅 第38代 王이다. 在位는 785∼798年이다. 奈勿王(奈勿王)의 12歲손으로, 이름은 김경신(金敬信 或은 金敬愼)이다. 혜공왕(惠恭王) 臺 金良相(金良相, 後날 선덕왕)과 함께 金志貞(金志貞)李 일으킨 叛亂을 平定하고 선덕왕(宣德王)의 卽位에 寄與하며 上大等(上大等)李 되었다. 宣德王이 죽자 김주원과의 王位繼承 다툼이 있었으나 王으로 卽位하였다. 讀書三品科(讀書三品科)를 實施하고, 渤海와의 外交를 펼쳤으며 봉은사(奉恩寺)를 完成하는 等 夏代 王室 成立의 基盤을 마련하였다. [家計 및 人的 事項] 원성왕(元聖王)은 統一新羅 第38代(在位: 785~798) 王이다. 奈勿王(奈勿王, 在位: 356~402)의 12歲손으로, 이름은 김경신(金敬信 或은 金敬愼)이다. 아버지는 김효양(金孝讓)으로 後에 明德大王(明德大王)으로 追封되었고, 어머니는 朴氏 계오부인(繼烏夫人 或은 知烏夫人)으로 所聞王后(昭文王后)로 追封되었다. 王妃...

  • 新羅 下代 張保皐가 只今의 全羅南道 莞島에 設置한 海軍·貿易 基地. [內容] 828年(興德王 3)에 設置되었다가 851年(문성왕 13)에 撤廢되었다. 莞島는 當時 新羅와 唐나라·日本을 잇는 海上交通路의 要旨였다. 當時 韓半島를 中心으로 한 海上交通路로는, 첫째 中國산둥 半島[山東半島]에서 黃海岸을 건너 랴오둥 半島[遼東半島] 沿岸을 돌아서 鴨綠江 河口나 그 南쪽의 沿岸地域으로 이르는 航路, 둘째 산둥 半島에서 黃海를 가로질러 江華島나 덕물度에 이르러 沿岸 各 河口로 통했던 航路가 있었다. 셋째로는, 中國의 양쯔江[揚子江] 河口와 周邊地域의 名酒(明州)·洋酒(楊州) 等地의 東北에서 黃海를 건너오거나, 또는 산둥 省 燈住(登州)에서 東南으로 順航하여 黑山島 近海에 이르러 다시 韓半島 沿岸의 各 浦口로 航行하거나, 더 나아가 大韓海峽을 거쳐 日本 西部地域에 到達하는 航路가 있었다. 이 中 첫째는 主로 唐나라와 渤海 間의 交通路였고, 둘째·셋째가 新羅人들이 많이...

  • 三國時代 백제의 佐平으로서 第31代 義慈王에게 國運이 위태로워짐을 諫言하다 投獄된 管理. 忠臣. [內容] 一名 ‘怔忡(淨忠)’이라고도 한다. 656年 佐平(佐平)으로 있을 때 王이 新羅와의 싸움에서 連勝하여 自慢과 酒色에 빠지자 國運이 위태로워짐을 極諫하다가 投獄되었다. 獄中에서 斷食을 하다가 죽음에 臨迫하여 王에게 글을 올리기를 “忠臣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法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臣이 恒常 時勢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않아 반드시 戰爭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때 軍隊를 使用함에 있어서는 그 地理的 條件을 잘 利用하여야 하는데, 江 上流에서 敵兵을 맞이하면 나라를 保全할 수 있습니다. 萬一, 敵軍이 쳐들어오면 陸路로는 炭峴(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水軍은 기벌포(伎伐浦)에 못 들어오게 한 뒤, 險한 地形에 依支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結局 660年 新羅軍은 彈絃을 넘어 首都 私費(泗?)로 쳐들어오고...

  • 古代國家 新羅 領域에서 生産하여 消費한 一切의 土器. [開設] 新羅土器는 新羅의 成立 時期부터 滅亡할 때까지 新羅領域에서 生産·消費된 土器를 指稱하지만, 實際 新羅의 成立 時期를 正確하게 設定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時期를 안다고 해도 土器에 新羅의 成立 時期가 바로 反映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慶州를 中心으로 蔚山·浦項 等의 物質資料의 樣相이 같게 되는 3世紀 後半 以後부터 生産·消費된 土器를 新羅土器의 範疇에 包含시킬 수 있다. 3世紀 後半부터 10世紀 初까지 新羅領域에서 生産·消費된 新羅土器는 新羅의 領域 擴張에 隨伴하여 分布範圍가 擴大되었고, 時期에 따라 토기의 種類와 質·裝飾·機種과 畸形 等의 變化가 있었다. 3世紀 後半에서 4世紀 後半의 新羅土器는 胎土와 小成溫度가 다른 와質土器·軟質土器·陶質土器 3者가 竝存하였는데, 嶺南의 다른 地域, 特히 釜山과 金海 等 金官伽倻 地域의 土器에 比해 와質土器의 數量과 種類가 다양하여 와質土器의 傳統이...

  • 高句麗 第1位의 官等으로서 國政을 總括하는 任務를 지닌 高句麗의 首相職. [內容] 代代로(大對盧)는 一名 ‘吐捽(吐?)’이라고도 한다. 部族長적 身分層에 屬하는 대로(對盧)가 分化해 高句麗 中期에 생겨난 것인데, 늦어도 6世紀 後半頃에는 대로 官等은 消滅되고 代代로만이 7世紀까지 나타나고 있다. 大對盧의 分化는 4世紀 以後 태王權(太王權)의 確立과 關聯이 있으며, 대로의 消滅 時期는 6世紀 中盤 貴族聯立政權(貴族聯立政權)의 成立과 聯關이 된다. 任期는 3年으로서 貴族會議에서 選擧로 選出되었는데 이것은 지난날 不足聯盟의 段階에서 聯盟長을 選擧에 依해 뽑던 傳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世紀 後半 高句麗의 王權이 弱化되면서 政治的 實權이 大幅 强化되었다. 이 時期 代代로 選任 過程의 가장 큰 特徵은 貴族들의 相爭이다.『한원(翰苑)』고려기(高麗記)에 依하면 貴族 中에서 서로 싸워 가장 剛한 者가 스스로 大對盧가 되었다. 이 때 王은 貴族 間의 紛糾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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