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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史 : 네이버 知識百科

  • 忠淸南道 공주시 宋山里 古墳群 內에 있는 三國時代 百濟 第25代 武寧王과 王妃의 陵. 私的. [開設] 武寧王陵은 忠淸南道 공주시 금성동 산5-1번지에 位置하며 1963年 1月 21日 史跡으로 指定된 송산리古墳群에 包含되어 있다. 송산리古墳群은 百濟의 돌房무덤[橫穴式石室墳]李 主宗을 이루는데, 이 古墳群에는 當時 中國 量(梁)나라 支配階層 무덤의 形式을 그대로 模倣하여 築造한 甓돌무덤[塼築墳]으로서 武寧王陵과 함께 第6號 甓돌무덤이 있다. 武寧王陵은 發掘調査 結果, 무덤 안에서 무덤의 主人公을 알려주는 墓誌石(墓誌石)이 發見됨으로써 百濟 第25代 武寧王(在位 501∼523)의 무덤이라는 事實이 밝혀졌다. [內容] 武寧王陵은 송산리 第6號 甓돌무덤 北쪽의 나지막한 丘陵地帶에 位置한다. 日帝强占期인 1930年代에 송산리古墳群이 調査되면서 武寧王陵이 第6號 甓돌무덤의 現武陵(玄武陵)으로 認識되어 처음에는 王陵으로 注目되지 않았다. 따라서 王陵으로 發見된 것도 매우...

  • 慶尙北道 경주시 황남동 一帶에 있는 三國時代 新羅 王族의 것으로 推定되는 陵. 돌무지덧널무덤·雙무덤. [開設] 황남동古墳軍은 1963年 1月 21日에 史跡으로 指定되었으며 面積은 42萬 2,908㎡이다. 이 古墳群 內에 있는 皇南大塚의 一連番號는 ‘皇南洞 98號墳’이다. 皇南大塚은 1973年 7月과 1975年 10月에 文化財管理局 調査團이 發掘調査하고, 1980年 文化財委員會 會議에서 붙여진 別稱으로 황남동에 所在한 新羅 最大의 古墳이라는 意味다. [內容] 現在 外形이 復元되어 있는 皇南大塚은 2個의 圓墳(圓墳)李 南北으로 連接된 瓢形墳(瓢形墳)으로 東西 지름 80m, 南北 지름 120m, 濫分 높이 22m, 북분 높이 23m에 이르는 新羅 最大의 封土墳(封土墳)이다. 皇南大塚 남분의 被葬者는 男子, 북분의 被葬者는 女子이며 新羅王族의 무덤으로 推定된다. 封土와 封土의 基底部(基底部) 周圍에 쌓은 바깥 둘레돌[護石]의 南·북분 連接狀態로 볼 때, 먼저 남분이 築造되었고 뒤에 北분이...

  • 新羅 및 高麗 初期에 官僚들에게 일정한 地域의 經濟的 收取를 許容해 준 특정한 地域. [開設] 祿邑은 官職(官職) 服務의 代價인 綠(祿)을 支給함에 있어 일정한 地域, 卽 邑(邑)을 내리는 制度이다. 官僚들에 對한 經濟的 處遇方式으로서 祿邑制(祿邑制)가 存續한 時期는 三國時代의 新羅時代로부터 統一新羅를 거쳐 高麗 初期의 統一 前까지 걸친다. [內容] 祿邑制는 新羅가 周邊地域을 服屬시키고 貴族層으로 編入된 各 勢力들을 官僚로 編制하는 過程에서, 그들을 貴族官僚로서 保守·待遇하려는 制度에서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施行 時期에 對해서는 具體的으로 알 수 없다. 다만 官僚制度가 整備되는 三國時期의 어느 時點, 或은 官等制나 官僚制의 整備와 關聯 있는 律令(律令)의 頒布에 注目해 6世紀 前半부터 支給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한便 新羅 中央支配體制가 整備되어 가는 過程의 6世紀 무렵의 어느 時點으로 보기도 한다. 新羅의 祿邑은 689年(신문왕 9)에 廢止된...

  • 우리 民族을 指稱하는 用語. [開設] 配達이라는 用語는 配達族·배달民族·배달겨레·배달얼·配達族歷史 等等, 우리民族과 關聯한 여러 單語와 合成되어 近代 以後 只今까지 使用되는 말이다. 配達의 淵源은 檀君(檀君)의 段을 박달 或은 配達로 부르는데 祈願하고 있다. [淵源 및 變遷] 配達이란 말이 우리 民族을 指稱하는 말이지만 그 淵源은 確實하지 않다. 『閨怨士禍(揆園史話)』에서 單(檀)을 박달, 백달로 읽다가 以後 配達로 읽어 오늘에 이르렀다. [內容] 우리 民族을 指稱하는 ‘配達’과 關聯하여 注目되는 冊이 朝鮮 肅宗 때 쓰인 『閨怨士禍』이다. 이 冊은 著者의 이름이 傳해지지 않고 北愛(北崖)라는 號(或은 筆名)만이 傳할 뿐이다. 『閨怨士禍』는 傳來 新敎(神敎)의 思想的 價値를 담아, 國家와 民族을 사랑하는 歷史認識이 잘 드러난 冊이기도 하지만 胃서(僞書) 論難도 따르고 있다. 『閨怨士禍』에 보면 ‘配達’이라는 말을 類推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句節이 실려 있다. "'檀君'이라...

  • 西紀前 57年(혁거세거서간 1)부터 935年(敬順王 9)까지 56代 992年間 存續했던 古代 王朝. [要約] 新羅는 西紀前 57年(혁거세거서간 1)부터 935年(敬順王 9)까지 56代 992年間 存續했던 古代 王朝이다. 慶州平野에 자리하던 여섯 氏族이 聯合한 城邑國家로 建國했다. 伽倻를 合倂하고 中國과의 交通路인 漢江 流域을 占領하여 强盛해졌다. 7世紀 中葉 唐을 끌어들여 백제와 高句麗를 平定하고 渤海와 함께 南北國時代를 열었다. 下代에 들어 王位繼承을 둘러싼 內紛이 反復되고 豪族勢力이 擡頭하면서 王權이 弱해져 中央集權的 國家로서 存立하기 어려워졌다. 結局 後三國으로 나뉘었다가 敬順王이 高麗의 王建에게 스스로 降伏함으로써 新羅王朝는 滅亡했다. [開設] 新羅는 古代 三國의 하나로서, 7世紀 中葉에 百濟 · 高句麗를 平定하였으며, 698年 渤海의 建國과 더불어 韓國 歷史上 이른바 南北國時代를 열었다. 新羅의 歷史는 크게 三國統一 以前과 以後로 나눌 수 있으나, 『三國史記』...

  • 1145年頃에 金富軾 等이 高麗 仁宗의 命을 받아 編纂한 三國時代의 歷史서. [內容] 紀傳體의 歷史書로서 本紀 28卷(高句麗 10卷, 百濟 6卷, 新羅 · 統一新羅 12卷), 지(志) 9卷, 表 3卷, 列傳 10卷으로 이루어져 있다. 1174年(明宗 4) 高麗 使臣이 『三國史記』를 宋나라에 보냈다는 記錄이 『玉海(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初刊本이 이미 12世紀 中葉(1149∼1174)에 刊行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版本은 現存하지 않는다. 2次 板刻은 13世紀 後記로 推定되며, 性암本(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冊은 殘存本(殘存本)이기는 하나 現存하는 『三國史記』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日本 宮內廳(宮內廳)에도 所藏되어 있다. 3次 板刻은 1394年(太祖 3)에 있었다. 이는 金거두(金居斗)가 쓴 跋文에 依한 것으로 逸失되었다. 4次 板刻은 1512年(中宗 7)에 있었는데, 이는 이계복(李繼福)의 跋文으로 確認된다. 이 冊은 흔히 中宗妊娠本(中宗壬申本), 정덕임神本(正德壬申本) 또는...

  • 三國의 하나로서 韓半島 中西部에 位置했으며 660年에 滅亡한 古代國家. [要約] 백제는 三國의 하나로서 韓半島 中西部에 位置했으며 660年에 滅亡한 古代國家이다. 西紀前 18年에 夫餘族 系統인 온조 集團에 依해 現在의 서울 地域을 中心으로 建國되었다. 韓人·曳引 等의 土着民을 夫餘族이 支配하는 形式이었다. 建國 後 高句麗·新羅와 同盟과 攻防을 되풀이하면서 領域을 榮山江·蟾津江 流域까지 擴張하여 强力한 國家로 成長했다. 地政學的인 利點을 最大限 利用해 中國의 새로운 文物을 받아들여 百濟化하고, 다시 倭나 伽倻에 傳授해 古代 東아시아 文化圈을 形成하는 데 中心的인 役割을 하였으나 新羅와 軍事同盟을 맺은 黨에 依해 滅亡했다. [開設] 百濟(百濟)는 西紀前 18年에 夫餘族(扶餘族) 系統인 온조(溫祚)集團에 依해 現在의 서울 地域을 中心으로 建國되었다. 4世紀 中盤에는 北으로 黃海道에서부터 競技도 · 忠淸道 · 全羅道 一帶를 領域으로 하여 全盛期를 누렸다. 그러나...

  • 三國時代 高句麗 임有關戰鬪에 參戰한 將帥. [生涯 및 活動事項] 晋州姜氏(晉州姜氏)의 族譜에 그 始祖로 알려진 人物이지만 『三國史記』와 『舊唐書(舊唐書)』等 國內外 情事(正史)에서는 發見되지 않는다. 597年(嬰陽王 8) 數(隋)나라가 中國 大陸을 統一하고 高句麗를 迅速시키고자 無禮한 國書(國書)를 보내오자 강이식은 “이러한 傲慢無禮한 國書는 붓으로 答할 것이 아니라 칼로 對答해야 한다”면서 主戰論을 提唱하였다. 以後 高句麗 調整 輿論이 主戰論 쪽으로 가닥을 잡자 수 問題가 高句麗를 本格的으로 侵攻함에 따라 女 · 수戰爭(麗隋戰爭)李 勃發하였다. 이때 강이식은 高句麗의 最高 司令官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淨甁 5萬을 이끌고 이 戰鬪에 參加하였다. 이듬해(598) 大兵力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나아가 夭逝摠管(遼西總管) 胃蟲(韋沖)과 接戰하다가 林有關(臨硝關)으로 거짓 後退하였다. 이에 隋나라의 問題(文帝)는 30萬 大軍을 들어 漢王(漢王) 量量(楊諒)을 行軍대총관...

  • 統一新羅가 分裂되어 新羅, 後百濟, 후고구려를 이은 高麗 等 3國이 定立하였던 900~936年 時期. [要約] 後三國時代는 統一新羅가 分裂되어 新羅, 後百濟, 후고구려를 이은 高麗 等 3國이 定立하였던 900~936年 時期이다. 新羅 末 豪族의 擡頭와 農民 蜂起로 인한 混亂 속에 900年 甄萱이 後百濟를 建國하였다. 901年 弓裔가 후고구려를 建國하고 904年 마진, 911年 泰封으로 國號를 바꾸었다. 918年 弓裔를 몰아낸 王建은 國號를 考慮라고 하였다. 935年 甄萱이 高麗에 亡命하였고, 新羅의 경순왕度 王建에게 歸附하였다. 936年 王建은 後百濟를 征伐함으로써 統一을 이루었다. 後三國 統一은 韓國 民族의 形成에 寄與하였다. [內容] 後三國은 新羅에서 高麗로 轉換하는 過渡期에 存在했던 세 나라를 가리킨다. 따라서 後三國時代라는 것은 王朝史的 時代 區分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現在로서는 그 時代的 特性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하기 어렵다. 또한, 南北國時代論의 立場에서...

  • 南北國時代 때, 後百濟를 建國한 時調. [要約] 甄萱은 南北國時代 後百濟를 建國한 始祖이다. 在位 期間은 892年~935年이며, 新羅 西南海岸의 邊方祕藏으로 公的인 活動을 始作했다. 眞聖女王 때 各 地域의 豪族들이 地方을 占據하여 獨立的인 勢力을 이루는 事態에 이르자, 892年 武珍州를 占領하고 스스로 王位에 올랐다. 後三國 紛爭에서 뛰어난 戰鬪力으로 名聲을 날렸으나, 王位繼承 다툼이 일어나 아들 神劍에 依해 금산사에 유폐당했다가 도망쳐 王建에게 依託하다가 936年에 死亡했다. 특정한 地域基盤이 없었고 混亂期를 解消할 분명한 비전을 提示하지 못해 短命으로 끝났다는 評價를 받는다. [開設] 在位 892∼935. 本來 性은 李氏였으나, 뒤에 犬氏라 하였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尙州 가은현(加恩縣 : 只今의 聞慶)의 農民 出身으로 뒤에 將軍이 되었다. 『吏批가기(李碑家記)』에서는 眞興王의 後孫인 원線(元善)李 아자개라 하였는데 確認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姓氏는...

  • 西紀前 1世紀에서부터 668年까지 存續한 古代 王國. [要約] 高句麗는 西紀前 1世紀부터 668年까지 存續한 古代 王國이다. 鴨綠江 中流 地域에서 初期 城邑國家로 出發하여 周邊의 예·맥족은 勿論 沃沮·東濊·扶餘·造船 等 여러 種族들을 融合하여 보다 擴大된 高句麗人을 形成하면서 强大한 國家로 發展했다. 中國 漢나라의 侵入을 받아 恨의 郡縣이 設置되는 等 萎縮된 時期도 있었으나 이들을 몰아내는 過程에서 國力이 더욱 剛해졌고 中國의 統一 王朝인 數와 黨의 侵略도 물리치며 東아시아의 强大國으로 存在했다. 그러나 後期에 成立한 貴族聯立政權의 內部分裂로 國力이 弱化되어, 唐나라와 聯合한 新羅의 攻擊으로 滅亡했다. [開設] [高句麗의 어원] 國號 ‘高句麗’의 語源은 ‘구려(句麗)’에서 비롯하였다. 몽골高原 오르魂 江 기슭에 서있는 突厥(突闕) 第2帝國의 빌게可汗과 그의 동생 퀼테킨을 麒麟 2個의 高突厥非(古突闕碑)에서 高句麗를 倍크리(Bokli)라 記述하였다....

  • 554年에 管山城에서 백제와 新羅가 싸워 百濟가 大敗한 戰鬪. [開設] 管山城은 只今의 忠淸北道 沃川地方으로, 『日本書紀(日本書紀)』에는 函山城(函山城)으로 表記되어 있다. [歷史的 背景] 5世紀 中葉 백제는 高句麗의 南下로 首都 漢城(漢城)이 陷落되고, 개로왕(蓋鹵王, 455∼475)李 被殺되는 等 莫大한 被害를 입고 熊進(熊津: 只今의 忠淸南道 公主)으로 遷都하였다. 웅진時代 初期 백제의 情勢는 貴族들의 叛亂까지 겹쳐 不安한 狀態였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 479∼501)과 武寧王(武寧王, 501∼523)代를 거치면서 漸次 安定되어갔고, 聖王(聖王, 523∼554)代에 이르러서는 國家制度의 整備와 王權强化가 이루어지면서 私費(泗?: 只今의 忠淸南道 扶餘)로의 遷都(遷都)가 斷行되었다. 私費天道를 전후해 聖王은 內外의 諸般 統治制度와 佛敎敎團을 整備하는 等 體制整備를 圖謀함으로써 웅진時代의 混亂을 克服하고 中興을 이룩하게 되었다. 私費天道를 通해 中興을 이루자 聖王은...

  • 927年(高麗 太祖 10) 只今의 大邱廣域市 東區 八公山 一帶에서 後百濟甄萱과 太祖 王建 사이에 벌어졌던 큰 戰鬪. [內容] 當時 여러 豪族들 中에서 兩大勢力으로 成長한 後百濟의 甄萱과 太祖는 外交上 和親을 맺고 있었으나 兩者의 對決은 必然的인 것이었다. 그런데 甄萱은 그즈음 新羅를 强力하게 攻擊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927年 9月근암性(近?城 또는 近巖城: 只今의 慶尙北道 聞慶郡)을 빼앗고, 이어 고울부(高鬱府: 只今의 慶尙北道 永川)를 攻取한 뒤 慶州로 軍士를 밀고 갔다. 이에 新羅의 景哀王이 高麗太祖에게 救援을 請하자, 太祖는 곧 몸소 軍事를 이끌고 出戰하였다. 그러나 太祖의 援軍이 이르기도 前에 後百濟軍은 競走를 陷落하였다. 後百濟軍은 永川에서 神靈-火山-戶當-道童-賃舖-아화-건천-冒良을 거쳐 慶州로 進入하였다. 慶州에 들어간 甄萱은 軍士를 풀어 크게 掠奪하고, 景哀王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뒤 王族 김부(金傅: 경순왕)를 세워 王位에 올리니 이가 곧 경순왕이다....

  • 中國 吉林省 화룡縣 龍首鄕 龍해村 西쪽의 용두산에 있는 渤海정효公主의 무덤. [開設] 정효公主(貞孝公主)는 第3代 文王(文王)의 넷째 딸로서, 757年에 태어나 792年 6月에 36歲를 一期로 死亡하였다. 이 무덤은 1980年과 1981年 두 次例 發掘되었다. 무덤 方向은 남北向이고, 南北 길이 約 15m, 東西 너비 約 7m이다. 甓돌과 板石으로 쌓았으며, 墓도(墓道)·묘문(墓門)·널길〔羨道〕·널방〔墓室〕·탑〔塔〕의 다섯 部分으로 構成되어 있다. [內容] 墓道는 南쪽에 階段式으로 두 番에 걸쳐 만들었다. 妙文은 甓돌로 쌓아 막았고, 그 뒤에 널길이 있다. 中間에는 板石과 나무로 만든 二重의 門이, 門 뒤에는 墓碑가 세워져 있었다. 널房 바닥은 地表에서 約 3.4m 되는 깊이에 있었다. 이는 南北 3.1m, 東西 2.1m이고, 4壁의 높이는 1.4∼1.66m 사이로 일정하지 않다. 널房 가운데에는 南北 2.4m, 東西 1.45m, 높이 約 0.4m의 甓돌로 쌓은 寬大(棺臺)가 있었다. 棺臺의 南쪽 側面에서 獅子머리...

  • 642年(善德女王 11) 대야성(大耶城: 只今의 慶尙南道 陜川郡)을 둘러싸고 新羅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戰鬪. [歷史的 背景] 640年代 접어들면서 백제는 新羅에 對해 積極的인 攻勢를 取하였다. 642年(義慈王 2) 7月 백제 義慈王(義慈王)은 親히 軍士를 거느리고 新羅 西쪽의 40餘 城을 陷落시켰으며, 8月에는 高句麗 軍士와 聯合해 新羅의 對中國交通 據點인 당항성(黨項城: 只今의 京畿道 화성시 남양동)을 攻擊하였다. 대야성戰鬪는 이러한 백제의 攻勢가 絶頂에 達한 事件이었다. [經過] 642年 8月義慈王은 將軍 輪蟲(允忠)에게 軍士 1萬人을 주어 新羅의 대야성을 攻擊하게 하였다. 대야성 都督(都督)은 金春秋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김품석은 才地勢力인 사지(舍知) 黔日(黔日)의 아내를 빼앗음으로써 대야성 地方의 相當한 才地勢力들이 離脫하였다. 檢일은 이 일을 怨望하다가 백제군과 內通해 倉庫에 불을 질렀다. 백제 軍士가 대야성을 攻擊해 왔을 때 才地勢力인 죽죽(竹竹)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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