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 하나號 沈沒 事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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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 하나號 沈沒 事故 는 1990年 3月 1日, 束草 船積의 100t級 채끌이 漁船 人 602 하나號가 濟州道 南西쪽 海上에서 風浪으로 인해 沈沒한 思考이다. 乘船한 22名 中 21名이 救助되었는데, 船員들을 살리려 배에 남았다가 犧牲된 船長이 話題가 되었다. [1]

事故 經緯 [ 編輯 ]

602 하나號 船長

船長인 유정충(劉禎忠)은 1946年 咸鏡南道 北靑 出身으로 韓國 戰爭 中 父母를 따라 越南하여 釜山에서 學校를 卒業, 船員이 되었고, 35살에 船長이 되었다. 하나號 船長이 된 것은 1988年부터였다. ‘타고난 뱃사람’으로서 船員들의 尊敬을 받아왔으며, 後輩들에게는 技術 敎育을 시켰다. 아들도 海洋大學 에 입학시켰다. [2]

沈沒

오징어잡이 漁船인 602 하나號는 1990年 2月 26日 機張郡 代辯港을 出發하였다. 3月 1日 13時 51分 警, 4m가 넘는 風浪으로 인해 汽罐室이 沈水되어 배가 沈沒할 危機에 處하자 船長인 유정충(劉禎忠)은 나머지 船員들에게 救命胴衣를 입히고 退膳을 指示했다. [2]

柳 船長은 船員들이 救命艇에 탄 後에도 操舵室에 남아 2時間假量 救助信號를 보내다가 배와 함께 沈沒했다. [3] 船員들은 約 12時間 後 遭難 信號를 受信하고 온 다른 船舶들에 依해 救助되었다. 事故 海域은 陸地에서 멀리 떨어진 茫茫大海였기 때문에 萬一 柳 船長도 같이 退膳했다면 漂流하다가 많은 死亡者가 나올 수도 있었던 狀況이었다.

事故 收拾 및 搜索 [ 編輯 ]

濟州島 摹瑟浦無線局으로 救助信號가 打電되어 構造船團이 編成되었고, 波濤 속에서 3月 2日 2時頃 事故 現場에 到着, 沈沒하는 하나號를 發見하였고, 2時 20分頃에는 漂流하던 船員 21名이 救助되었고, 船長은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船員들이 歸港을 미루고 事故 海域을 搜索하였으나 屍身은 收拾하지 못하였다. [2] [4]

社會的 反響 [ 編輯 ]

言論은 그의 죽음을 의로운 犧牲으로 評價하였다. [5]

思考로부터 8日 뒤인 3月 9日에 大韓民國 最初의 全國漁民莊으로 葬禮式이 치러졌으며 國民勳章 목련장 이 追敍되었다.

1991年 1月 9日에는 柳 船長의 銅像이 線敵地인 束草 에 建立되었다.

各州 [ 編輯 ]

  1. “<旅客船沈沒> 漁船 하나號 유정충 船長 새롭게 照明” . 聯合뉴스. 2014年 4月 17日.  
  2. 漆黑바다에 燈臺가된 船長, 《경향신문》, 1990.3.2
  3. 義俠心强한 타고난船長, 《東亞日報》, 1990.3.3
  4. 船員21名 脫出뒤 홀로"SOS"배와 함께 最後맞은 어느船長, 《東亞日報》, 1990.3.2
  5. 어떤 船長의 거룩한 죽음 , 《경향신문》, 199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