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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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黑齒常之
다른 이름 者(字) 抗原(恒元)
出生日 630年
出生地 百濟 西部
死亡日 689年 (59歲)
死亡地 唐나라 監獄
國籍 百濟→唐나라
官職 官等: 百濟 - 西部達率
唐나라 - 扶養群開國公(浮陽郡開國公) 食邑(食邑) 2千 號(戶), 연국공(燕國公) 食邑 3千 號
職責: 百濟 - 風달君長(風達郡將)
唐나라 - 熊津城절충도위(熊津城折衝都尉), 忠武將軍(忠武將軍), 行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 四肢節(使持節) 사반主題軍事(沙泮州諸軍事) 사반주自社(沙泮州刺史) 上柱國(上柱國), 兆하도경略府使(?河道經略副使), 左領軍將軍(左領軍將軍) 兼 熊津都督府私馬(熊津都督府司馬), 좌무위將軍(左武衛將軍), 禹武威偉大將軍(右武威衛大將軍) 신무도經略大使(神武道經略大使), 會員群經略大使(懷遠軍經略大使), 좌무위偉大將軍(左武威衛大將軍), 檢校左右림軍(檢校左羽林軍), 增 左獄檢偉大將軍(贈左玉鈐衛大將軍)
父母 黑雉私茶(黑齒沙次)
子女 흑치준 , 딸(男便: 물부순 )
墓所 北邙山

흑치상지 (黑齒常之, 630年 ~ 689年 )는 百濟 의 將軍으로, 백제 滅亡 後 百濟 復興運動 을 이끌었다. 백제流民 勢力의 核心人物이다. 義慈王의 아들 王子 부여융과 함께 唐나라人들을 몰아내었으나 敵이였던 黑齒常之를 唐나라는 懷柔하여 唐나라에 歸化하였다. [1] 舊唐書와 新唐書 흑치상지 列傳에는 키가 7隻 [2] 이라고 記錄되어 있다.

生涯 [ 編輯 ]

백제 將軍 [ 編輯 ]

1929年 中國 洛陽 에서 아들 준(俊)과 함께 出土된 그의 墓誌銘에 따르면, 黑齒常之는 元來 부여氏(夫餘氏)로부터 나왔는데, 黑雉에 봉해졌기 때문에 子孫들이 이를 씨로 삼았다. 曾祖父는 門大(文大), 祖父는 덕현(德顯), 아버지는 私茶(沙次)이며, 黑齒常之의 者는 抗原(恒元)이다. 義慈王 때 벼슬은 達率 로서 風달군(風達郡) 軍裝을 겸하고 있었다. [3]

660年 蘇定方 新羅 의 名匠 김유신 이 指揮하는 18萬 聯合軍이 百濟를 征服하자, 任存城 에서 3萬의 流民과 함께 鬪爭하였다. 黑齒常之는 地形을 利用해 150餘 城을 攻擊하기도 했다. 黑齒常之는 의자왕 과 함께 降伏 하였다.

또다른 復興軍의 首長이었던 福信 全羅道 에서 道琛 을 殺害하고 權力을 掌握했다가 부여풍 에게 殺害當하고, 663年 白江 戰鬪 에서 羅唐聯合軍이 君을 殲滅했다. 結局 黑齒常之는 唐나라軍을 물리치며 復興 運動을 하였으나 唐나라의 懷柔에 依해 別部長 沙陀喪輿와 함께 唐나라에 投降했다.

唐나라 歸化 [ 編輯 ]

黨에 投降한 黑齒常之는 唐나라의 左領軍院外將軍(左領軍員外將軍)ㆍ洋酒自社(佯州刺史)에 任命되어, 劉仁軌 와 함께 백제 復興軍의 根據地였던 任存城 攻擊에 앞장서는 等 唐나라의 將軍으로 活躍했다.

以後 黨 高宗 蟻封(儀鳳) 2年( 677年 )에 티베트가 黨을 攻擊했을 때, 黨 調整은 劉仁軌에게 弔賀(?河)로 出陣하게 하여 여러 次例 티베트와 戰鬪를 치렀는데, 當時 全羅道에 머무르던 黑齒常之도 唐나라 高宗의 命令을 받고 劉仁軌의 部長으로서 兆하도경略府使(?河道經略副使)로 나아가 티베트 戰線에 投入된다.

蟻封 3年( 678年 ), 唐 高宗이 中書令(中書令) 이경현(李敬玄)을 하원도經略大使(河源道經略大使)로 삼고 君의 대총관으로 삼아, 티베트의 名匠 가르친링 )과 칭하이湖 (靑海湖) 一帶에서 맞서게 되었다. 7月, 兩側은 請해 地域에서 戰鬪를 벌였고, 黨側의 敵水軍大使(赤水軍大使) 유심례(劉審禮)가 티베트軍을 쫓아 깊숙히 들어갔다가 包圍되어 그만 9月에 全君이 敗北하고 몰살당했다. 이경현의 軍은 勝風鈴(承風嶺, 只今의 칭하이省 시닝 附近)까지 물러났으나 自身도 티베트軍에 包圍되는데, 黑齒常之가 決死隊 500人을 모아 티베트 軍營에 夜襲을 敢行하였고, 티베트의 樹齡 발持說(跋地設)은 敗하여 달아나고 이경현은 艱辛히 包圍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黑齒常之는 좌무위將軍(左武威將軍)으로 昇進하였으며, 나아가 下院軍簿司(河源軍副使)가 되었다.

兆로 (調露) 2年( 680年 ) 7月, 黑齒常之는 軍을 거느리고 量卑賤(良非川)에서 다시 가르첸바를 敗走시켰으며, 이경현을 代身해 하원군經略大使가 되어 下院 地域 防禦 責任者가 되었다. 黑齒常之는 現地에 屯田(屯田)하여 軍의 費用으로 充當했는데 그 크기가 5千餘 頃에 達했으며 해마다 百萬餘 石의 穀食을 거두었다고 한다. 또한 烽燧臺 70餘 곳을 만들어 下院 地域의 防禦力을 높였다. 槪要(開耀) 元年( 681年 ) 5月 21日에 黑齒常之가 이끄는 淨甁(精兵) 1萬 基(騎)가 請해 屯田을 攻擊해 온 티베트의 갈이(?爾)·贊派(贊婆) 等을 敗走시키고 2千 級을 베었으며, 티베트軍의 軍糧을 불사르는 戰功을 세웠다. 黑齒常之가 淸解에 머무른 7年 동안 티베트는 黨의 領土를 넘볼 수 없었다고 한다. 四星(嗣聖) 元年( 684年 ), 黑齒常之는 다시 左舞偉大將軍(左武衛大將軍)李 되고 거듭 檢校左右림軍(檢校左羽林軍)이 되었다.

文明(文明) 元年( 684年 ), 서경업 (徐敬業)李 洋酒(揚州)에서 則天武后 打倒를 외치며 擧兵하였을 때, 則天武后는 11月 4日에 흑치상지에게 軍을 거느리고 막게 했고, 11月 18日에 서경업의 君을 鎭壓한다. 水攻(垂拱) 元年( 685年 ), 黑齒常之는 처음으로 全國의 邊方 業務를 主管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水攻 2年( 686年 ), 突厥 (突厥)의 카간人 쿠틀룩 (qutlugh, 骨?祿) 或은 日테리쉬 카간 (Ilterish Qaghan, 힐질리시가한?跌利施可汗)이 하동도(河東道)를 攻擊하자 黑齒常之는 座鷹揚衛大將軍(左鷹揚衛大將軍) 戀戀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總管)李 되어 楊汀(兩井)에서 突厥君을 相對로 戰鬪를 거두고 많은 家畜을 鹵獲한다. 이 공으로 黑齒常之는 연국공(燕國公) 食邑 2千 湖의 作에 封해졌다.

水攻 3年( 687年 )에 突厥은 다시 黨의 朔州(朔州)를 侵攻했는데, 黑齒常之는 이때 禹武威偉大將軍(右武威衛大將軍)으로서 신무도經略大使(神武道經略大使)로 채워져 이다조 (李多祚), 王求言(王九言) 等을 部長으로 거느리고 突厥과 戰鬪를 벌여, 황화퇴(黃花堆)에서 突厥을 크게 쳐부수고 다시 40餘 里를 뒤쫓아 突厥을 沙漠 쪽으로 몰아낸다. 當時 禹監門衛中郞將(右監門衛中郞將) 찬보壁 (?寶璧)李 調整에 票를 올려 突厥 殘黨을 마저 칠 것을 請했고, 則天武后는 흑치상지에게 다시 會員群經略大使(懷遠軍經略大使)職을 주어 찬보壁과 함께 郡을 합쳐 함께 突厥을 쫓게 했다. 그런데 贊보벽은 功을 탐내어 흑치상지와의 事前 會議도 없이 홀로 進擊하여 1萬 3千 名에 達하는 全君이 潰滅당하는 被害를 입었다. 이에 步壁이 獄吏에 내려 죽이고 黑齒常之도 공이 없음을 問罪당하였는데, 酒興 (周興) 等이 黑齒常之가 鷹揚將軍 조희절과 더불어 反逆했다고 謀陷하였다. 이에 逮捕되어 獄에 갇혔다가 689年 죽었다. 新唐書 三國史記 에는 絞首刑을 當했다고 나오나, 黑齒常之에 對한 가장 仔細한 記錄이 있는 舊唐書 에 따르면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고 한다.

흑치氏의 由來 [ 編輯 ]

黑齒常之 墓誌銘에는 흑치氏의 祖上을 백제 王族으로 記錄하고 있으며, 黑雉를 姓으로 삼게 된 理由를 黑雉(黑齒)에 冊封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中國 史料에 登場하는 黑治國의 位置인 필리핀으로 非情하는 說이 있으며 [4] , 이를 검게 물들이는 文化가 있다. [5]

黑齒常之가 登場한 作品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各州 [ 編輯 ]

  1. KBS 歷史追跡 ? 悲運의 武裝 흑치상지, 그는 背信者인가
  2. 約 172cm로 推算. 當時 隻을 24.5cm 程度로 본다.
  3. 《新唐書》 列傳
  4. 이도학, 《백제장군 흑치상지 評傳 - 한 武裝의 悲壯한 生涯에 對한 辨明》, 走流性, 1996, 51~52쪽
  5. 이를 검게 물들이는 文化는 日本 , 베트남 , 라오스 , 타이 , 中國의 雲南省 의 少數民族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