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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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언필 (洪彦弼, 1476年 ~ 1549年 )은 朝鮮 前期의 文臣으로 字는 자미(子美), 號는 묵재(默齋), 諡號는 문희(文僖), 本貫은 南陽 이다. 宗廟 人種 卯正에 配享됨으로써 宗廟配享功臣 이 되었다. 中宗 과는 사위, 妻家, 孫女딸을 통해 三重 겹査頓이 된다.

1504年 甲子士禍 (甲子士禍)에 휘말려 珍島 로 유배당했다가 1506年 中宗反正 으로 釋放되어 過去에 及第, 三社의 要職을 거쳐 1519年 에는 조광조 의 黨與로 몰렸으나 정광필 의 辯護로 풀려났다. 以後 參判, 大司憲, 吏曹와 刑曹, 兵曹, 戶曹의 判書를 거쳐 京畿道觀察使와 右贊成, 右議政, 左議政을 거쳐 1544年 領議政에 이르렀고, 익성府院君이 되었다. 1548年 다시 左議政과 領議政을 지내 두番 左議政과 두番 領議政을 지내게 된다.

生涯 [ 編輯 ]

沙彌時에 合格하였으나 1504年 甲子士禍 (甲子士禍)에 휘말려 全羅道 珍島 로 유배당했다가 1506年 中宗反正 으로 풀려나와 1507年 중광文科에 乙科로 及第했다. 前景, 咀嚼, 雪景, 死境, 副修撰, 正言, 檢討官, 敎理, 侍讀官과 地平, 全部, 獻納, 侍講官, 應敎, 掌令, 副應敎, 社間을 지내다가 以後 弘文館 直提學 , 同副承旨, 右副承旨, 兵曹參知를 지내고 1519年 賜暇讀書 後 右承旨가 되었으나 己卯士禍 (己卯士禍)에 휘말려 조광조 (趙光祖)의 一派로 몰려 投獄되었으나 領議政 정광필 의 辯護로 풀려났다. 以後 黃海道觀察使와 병조참의, 都承旨 , 大司憲 , 大司諫 , 同知成均館事 等을 지낸다.

以後 刑曹參判 , 大司憲 , 共助參判 , 冬至使 , 禮曹參判 을 두루 거친다.

1526年 刑曹參判 으로 聖節使가 되어 明나라 에 다녀왔고 大司憲을 6番이나 歷任하고 各 組의 判書를 거쳐 1535年 右贊成이 되었다가 김안로 (金安老)의 謀陷으로 파직당했다. 當時 그는 大司憲 , 吏曹判書 , 刑曹判書 , 漢城府判尹 , 戶曹判書 , 兵曹判書 , 左參贊 , 京畿道觀察使를 거쳐 右贊成 이 되었던 것이다.

1537年 김안로 가 失脚하자 戶曹判書 로 復官되고 右議政 에 올라 左議政 을 거쳐 1544年 領議政 에 이르렀다. 人種 이 卽位하자 有關 等과 함께 院相이 되었다가 中樞副領事로 前任하고 1545年 乙巳士禍 (乙巳士禍)를 일으키는 데 앞장서 衛社功臣 2等에 책록되고 익성府院君에 封해졌다.

1548年 左議政 領議政 에 在任되고 几杖을 下賜받았으며 詩書畫에도 모두 能하고 文集으로는 《묵재집》이 있다. 平素 몸가짐이 儉素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멀리하였고 집안의 法度가 嚴格하여 周邊의 稱頌이 높았다고 傳한다.

事後 [ 編輯 ]

京畿道 華城郡 서신면 홍법리 산 30番地에 墓가 있으며, 周邊에는 홍한의 墓와 洪兄, 홍담, 홍진도의 墓所 11期 및 墓碑 4期, 神道碑 5期가 있어서 나중에 京畿道 記念物 第168號로 指定되었다.

著書 [ 編輯 ]

  • 《묵재집》

家族 關係 [ 編輯 ]

그는 中宗 과 二重으로 査頓關係를 形成한다.

기타 [ 編輯 ]

그는 中宗 과 겹査頓이 되는데, 사위 윤진이 中宗 과 內外從四寸이 된다. 윤진은 中宗 의 어머니 정현왕후 의 오빠 윤탕로의 아들이다. 自身의 妻조카宅인 정순옹株 中宗 宿願 李氏 蘇生 庶女 정순옹株 이다. 아들 洪暹 의 딸인 孫女딸 남양군否認 中宗 의 庶子 덕흥大院君 이초의 長男 하원군 이정과 結婚한다.

中宗 은 그의 사위 尹軫의 姑從四寸型이면서, 妻조카宅 정순옹株의 親庭아버지이고, 孫女딸 南陽郡夫人의 媤할아버지가 된다.

宣祖 는 그의 사위 尹軫의 내종질이면서 妻조카宅 정순옹株의 조카이고, 孫女딸 南陽郡夫人의 媤叔이 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父親 송질, 男便 홍언필, 아들 洪섬이 모두 領議政을 지냈다. 朝鮮時代 唯一無二한 事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