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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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칠
洪淳七
出生地 日帝强占期 慶尙北道 鬱陵郡
死亡地 大韓民國 서울中央報勳病院
本館 南陽 (南陽)
子女 膝下 1男 3女
服務 大韓民國 陸軍
服務期間 1947年 9月 ~ 1952年 7月
勤務 陸軍 連帶
最終階級 大韓民國 陸軍 上司
指揮 分隊長 , 特務上士
主要 參戰 韓國 戰爭
기타 履歷 慶尙北道 鬱陵郡 獨島義勇守備隊 大將
徐薰 1966年 5等 勤務功勞勳章
1996年 保國勳章 三日葬 追敍

홍순칠 (洪淳七, 1929年 1月 23日 ~ 1986年 2月 7日 )은 大韓民國 韓國 戰爭 參戰 經歷이 있는 軍人 出身으로 1954年 獨島義勇守備隊 를 組織하여 獨島 를 지키는 活躍을 하였다. [1]

生涯 [ 編輯 ]

獨島義勇守備隊 活動 全 [ 編輯 ]

國防警備隊 에 入隊하여 軍人이 된 後, 韓國 戰爭 에 參戰해 咸鏡南道 元山 近處에서 負傷을 입고 1952年 7月 特務上士로 全域하였다.

獨島義勇守備隊 活動 [ 編輯 ]

그는 1952年 가을부터 釜山에서 武器 等의 裝備를 購入한 뒤, 1953年 4月 20日 輕機關銃 2梃, M2 3梃, M1小銃 10梃, 拳銃 2梃, 手榴彈 50發, 0.5t 보트 1隻 等의 裝備를 私費로 마련하고, 韓國 戰爭 參戰 經歷이 있는 軍 出身을 모아 15名으로 構成된 戰鬪隊 2兆, 鬱陵島 普及 連絡遙遠 3名, 豫備隊 5名, 補給線 船員 5名 等 모두 43名으로 構成된 獨島義勇守備隊 를 組織하였다고 自身의 手記에서 主張하였다. 그러나, 1966年 獨島義勇守備隊 원 11名이 勳章을 받을 때 作成된 公的調書에는 創設時期가 1954年 으로 記錄되어 있으며, 守備隊 一部 隊員의 兵籍記錄에 따르면 1953年 에 軍에서 轉役夏至 않은 것으로 나온다. 朝鮮日報 는 1954年 5月 3日 " 鬱陵島 1萬5千 道民(島民)은 獨島自衛隊를 結成해서 韓國의 領土인 獨島를 結社 防衛하기로 4月 25日 決意하였다"고 報道하면서, 獨島自衛隊 結成을 主導했던 民議員 候補 이정윤이 그해 5月 20日 第3代 民議員 選擧 를 앞두고 빠지면서 홍순칠이 獨島自衛隊의 大將이 됐다고 傳했다. 또, 1954年 5月 6日 朝鮮日報 에서는 " 5月 3日 백두진 總理가 백한성 內務部 長官에게 鬱陵島 島民의 獨島自衛隊를 積極 後援하라고 指示하였다."라고 報道하였다. 홍순칠은 守備隊 創設 前부터 釜山 國際市場에서 武器를 購入했다고 主張했지만, 當時 백두진 總理의 指示에 따라 鬱陵警察署 가 獨島自衛隊에 銃器와 彈藥을 支給하고 鬱陵郡은 救恤米로 食糧을 支援했다. 이 같은 內容은 當時 獨島義勇守備隊 에게 彈藥과 補給品을 傳達했던 鬱陵警察署 警察官 多數가 證言하고 있었다. [1]

홍순칠은 手記에서 1953年 6月 獨島로 接近하는 日本 水産高等學校 實習船을 歸鄕 措置하는 한便 7月 23日 獨島 海上에 나타난 日本 海上保安廳 巡視船 PS9艦을 發見하고 처음으로 銃擊戰을 벌여 擊退시켰다고 主張하였다. 그러나, 1955年 大韓民國 內務部 가 發行한 '獨島問題槪論'에 따르면 해쿠라號를 擊退시킨 것은 鬱陵警察署 所屬의 獨島巡邏半이었다. 獨島問題槪論은 "1953年 7月 11日 午前 11時 鬱陵警察署 勤務 巡察主任 經緯 김진성, 警査 최헌식, 巡警 최용득 3名으로 構成된 京畿 2門으로 裝備된 純라반"李 해쿠라號를 擊退시켰다고 밝히고 있고, 이러한 事實은 寫眞과 함께 日本 雜誌에도 실렸다. [1]

홍순칠은 또 1953年 8月 5日 동도(東島) 바위 壁에 獨島가 大韓民國 領土임을 밝히는 '韓國領(韓國領)' 석 字를 새겨 넣었다고 手記에 記錄 하였다. 또한, 獨島 領土 標石 建立은 1953年 9月 24日 大韓民國 外務部 가 建立을 要請하고 內務部 長官이 慶尙北道知事 에게 測量標 設置를 指示한 公文에 따라 1954年 8月 28日 警備焦思와 領土表石을 建立하고 除幕 記念式을 開催하였다. [1]

末年 [ 編輯 ]

1966年 獨島 守護에 功績을 認定받아 5等 勤務功勞勳章을 授與하였다. 1985年 肺癌을 治療하기 위해 서울로 移徙한 뒤에도 잡지 "學父母"에 獨島에 對한 連載를 해오다 1986年 2月 7日에 死亡했다. 認容 誤謬: <ref> 태그를 닫는 </ref> 태그가 없습니다

被害 [ 編輯 ]

獨島義勇守備隊將 홍순칠은 中央情報部 에 끌려갔다. [2] 1974年 12月의 일이었다. 洪 大將의 未亡人 朴英熙氏는 1974年 12月 男便이 中央情報部에 끌려가 사흘 間 붙잡혀 있으면서 '앞으로 獨島에 對해 言及하지 마라'고 강요받기도 했다."고 밝혔다. [3] [4]

2005年 열린우리당 전병헌 議員 等이 特別法을 制定하여 國家有功者 로 指定해주었다. 또한 홍순칠을 비롯한 獨島義勇守備隊의 다른 有功者들은 國立墓地 에 묻힐 수도 있고 支援金도 타게 되었다. [5] [6]

論難 [ 編輯 ]

홍순칠의 手記에 對해서는 課長과 虛僞로 있다는 點이 言論에 浮刻 되었으나, 2005年 發議된 獨島義勇守備隊 支援에 關한 特別法에 依하여 獨島義勇守備隊의 正確한 活動 內譯 및 賞勳의 範圍를 決定하여 勳章 等이 授與 되었으며, 獨島義勇守備隊 記念事業會가 設立되어 現在까지 運營되고 있다. [1] 2007年 大韓民國 監査院 은 1950年代에 活動한 獨島義勇守備隊 生存隊員 11名의 證言을 綜合해 본 結果, 實際 獨島에 가서 活動한 隊員은 33名 가운데 17名뿐이고, 나머지 16名은 獨島에 가지 않았던 것으로 調査됐다고 밝혔다. [7] [8]

賞勳 [ 編輯 ]

  • 1966年 5等 勤務功勞勳章 受賞
  • 1996年 保國勳章 三日葬 受賞
  • 1996年 자랑스러운 韓國印象 受賞

홍순칠을 演技한 俳優 [ 編輯 ]

映畫 [ 編輯 ]

各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