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景來의 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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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景來의 亂
날짜 1812年 1月 31日 ( 1811年 陰曆 12月 18日 ) ~ 1812年 5月 29日 ( 陰曆 4月 19日 )
場所
結果 朝鮮軍의 勝利
交戰國
朝鮮 洪景來 叛亂軍
指揮官

朝鮮
順調
兵曹判書 심상규
都巡無事 이요헌
兵馬使 박기풍
김익순
유효원
유정양
이영식
  定試

허항  

洪景來 叛亂軍
홍경래
  우군칙
이희저
  홍총각
김창시
  이除草
  채수영

김사용  

洪景來의 亂 (洪景來ㅡ亂)은 1811年 ( 順調 11年) 陰曆 12月 18日 (陽曆 1812年 1月 31日 )부터 1812年 (純祖 12年) 5月 29日 ( 陰曆 4月 19日 )까지 홍경래 · 우군칙 等을 中心으로 平安道 에서 일어난 넓은 意味에서의 農民 叛亂 이다.

背景 [ 編輯 ]

朝鮮 後期 社會·經濟的인 力量이 成長함에 따라 여러 社會矛盾에 對한 抵抗의 雰圍氣가 擴散되어 갔다. 敎育 機會가 늘어남에 따라 知識人 이 量産되고, 經濟力을 바탕으로 無事로서 立身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政府에서는 文武 過去 의 及第者를 크게 늘렸지만, 從來의 官職 體制와 人材 登用 方式으로는 더 以上 그들을 包攝할 수 없어 不滿 勢力은 漸漸 늘어났다. 特히 平安道 는 活潑한 商業 活動을 바탕으로 빠른 經濟 發展과 力動的인 社會相을 보이고 있었으나, 中央 政治權力으로부터 疏外 되었고 地域民에 對한 差別待遇가 있었다.

原因 [ 編輯 ]

表面上 理由로는 朝鮮 時代에 西北人을 一般的으로 文武 高官에 登用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檄文에서 洪景來는 “ 壬辰倭亂 때 才操(再造)의 功이 있었고, 丁卯의 邊에는 양무공(襄武公, 정봉수 의 시호)과 같은 忠臣이 있었다. 돈암(遯庵, 선우협(鮮于浹: 1588~1653)의 號)·월포(月浦, 홍경우의 號)와 같은 才士가 나도 朝廷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甚至於는 權門勢家의 奴婢까지 西北人을 '平安道 놈' [1] 이라고 蔑視하니 憤慨하지 않을 수 없다. 國家 緩急(緩急)의 境遇에는 西北人의 힘을 빌리면서도 400年 동안 朝廷에서 입은 것이 무엇이냐?” [2] 라고 하였다.

朝鮮에서 事實上 西北人을 重要한 자리에 任用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政策的인 것은 아닌 듯하다. 宣祖 때 李珥 가 西北人의 秀才(守宰, 地方官)가 되는 者가 적으므로 地方 人材의 登用을 上策(上策)韓 것은 이를 證明한다. 다만 中央 政界에 進出하지 못하는 西北人의 不平不滿을 利用하여 擧事의 첫 條件으로 내세워 民心을 얻기로 꾀하였던 것이라고 하겠다.

다른 記錄에 보면 司馬試에 失敗한 뒤 그 及第한 者를 보니 모두 貴族의 子弟들이었다. 當時 過去 制度도 크게 腐敗하여 權門勢家의 子弟는 舞鶴鈍才(無學鈍才)라도 及第의 榮譽를 차지하고 그렇지 못한 者는 쉽게 成功할 수 없으며, 特히 平安道의 사람들을 除外하고 있으니, 이것이 홍경래로 하여금 개조범상(改造犯上)의 뜻을 굳게 하였다고 하였다.

計劃 [ 編輯 ]

洪景來가 뜻을 決定한 時期는 알 수 없으나, 當時의 國政에 脾胃가 거슬린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各地의 富豪·名士들을 籠絡하면서 機會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加算 (嘉山)에 있는 才略이 豐富하고 風水復座를 業으로 하는 우군칙 , 家神의 驛屬(驛屬)이며 猝地의 符號로 武科에 及第한 이희저 (李禧著), 文才(文才)가 뛰어난 곽산 의 眞사 김창시 (金昌始) 等을 心腹으로 하여 擧事에 參與시켰으며, 泰川 김사용 (金士用), 곽산의 홍총각 , 개川 이除草 (李濟初) 等으로 指揮部를 構成하고 그 밑에 平壤의 양시위 (楊時緯), 寧邊의 김운룡 (金雲龍) 等을 비롯한 壯士들을 모두 先鋒將 兼 軍事 指導者로 하였다. 이 壯士들은 主로 洪景來의 組織活動에 依해 蜂起의 隣近 地域뿐 아니라 멀리 平安道 南部 및 黃海道 로부터 모여든 人物들이었으며, 蜂起 當時 30∼40名 假量이 積極的으로 抗爭하였다.

博川 김혜철 (金惠哲), 按酒의 나대곤 (羅大坤) 等 商人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參與하였다. 商人들은 特히 蜂起 準備 段階에서 資金을 調達하고 軍卒을 모으는 데 絶對的인 成果를 올렸다. 主導 勢力은 또한 鐵山 정경행 (鄭敬行), 先天의 柳問題 (劉文濟) 等 淸川江 以北 各處의 權力을 쥐고 있는 名望家들과 行政 實務者들을 包攝하여 內應勢力으로 삼았다. 그들은 蜂起軍을 맞아들이고 自己 地域의 行政을 擔當하였다. 家産의 大寧江(大寧江) 隣近 다복동(多福洞)에 祕密 軍事 基地를 세워 內應勢力을 包攝하고, 擧沙하기 前부터 이곳에 옮겨와 金鑛 採掘을 口實로 遺民을 꾀어 章程 일꾼을 모아들였다.

이리하여 準備를 하면서 機會를 보다가 1811年 (純祖 11年)에 從來에 없었던 큰 凶年이 들게 되어 民心이 洶洶한 틈을 타서 窮民(窮民)을 끌어들여 스스로 평서大元帥라 稱하고, 우군칙을 參謀로 한 本隊는 가산·박천을 陷落시킨 後 漢陽 으로 南進케 하고, 1代는 金士用을 副元帥, 김창시를 參謀, 박성간 (朴聖幹)을 兵站腸(兵站長)으로 하여 곽산· 井州 를 占領하고, 先天 의 以西의 여러 고을을 陷落시키고, 按酒 를 攻掠할 方策으로 擧兵하였다. 그런데 거病이 막히지 않고 잘 이어갔다.

結果 [ 編輯 ]

1811年 陰曆 12月 18日 (陽曆 1812年 1月 31日 ) 三更에 이희저의 一帶가 가산군 官衙를 襲擊하여 占領하고 亂을 일으켰다. 郡守 定試(鄭蓍)와 그의 아버지 靜弩(鄭魯)를 죽이고, 한때 定住性을 中心으로 淸川江 以北 地域을 거의 掌握하였으나 5個月 만에 平定되었다.

洪景來가 평서大元帥로서 本隊를 指揮하여 安州郡 方面으로 進擊하고, 金士用은 副元帥로서 義州 方面을 攻掠하고, 김창시와 우군칙이 模寫, 이除草는 北進軍 先鋒將, 洪總角은 남進軍 先鋒將, 이희저는 都總(都摠)을 맡았다. 結約을 맺어 署名한 人員에서 自意가 아니었던 者들을 除外하면 蜂起 當時 軍事 指揮者와 主要 內應者는 約 60名이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一般 軍卒은 商人들이 雲散의 金鑛에서 일할 鑛夫들을 求한다는 口實로 賃金을 주어 끌어들인 人物들로서, 大槪 加算·博川 地域의 땅없는 農民이나 賃金勞動者 들로 構成되었다. 蜂起軍 本隊는 가산군 博川 · 泰川 을 별다른 抵抗 없이 卽時 占領하였고, 北進軍度 곽산·定住를 占領한 後 어려움 없이 先天·鐵山을 거쳐 이듬해 2月 15日 ( 陰曆 1月 3日 )에는 용천을 占領함으로써 義州를 威脅하였다. 占領한 邑에는 該當 地域의 土豪 ·관속을 留陣將(留陣將)으로 임명하여 守令을 代身하게 하였고 旣存의 行政 體系와 관속을 利用하여 軍卒을 徵發하고 軍糧·軍備를 調達하였다.

蜂起軍은 淸川江 以北의 여러 邑에서 氣勢를 올렸으나 要害處인 寧邊 에서 內應勢力이 發覺되어 處刑되고 警戒態勢가 整備됨으로써 兵營이 있는 按酒에 兵力을 集中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時間을 遲滯하게 되었다.

洪景來軍은 南下하는 第1關門인 按酒를 攻掠하기 위하여 博川의 송림리(松林里)로 集結하였다. 그러나 按酒에는 平安道 兵馬節度使 이해우(李海愚)와 牧師 조종영 (趙鍾永)李 必死의 覺悟로 千餘 名의 兵士를 모아 2臺로 나누어 2月 11日 ( 陰曆 12月 29日 )에 송림리의 洪景來軍을 攻擊하였으며, 곽산 郡守 이영식(李永植) 麾下 援軍의 도움으로 洪景來軍은 大敗하여, 정주성 으로 들어가 籠城하게 되었다.

無慈悲한 官軍의 掠奪과 殺戮이 行해지는 가운데 蜂起軍 指揮部가 함께 行動하자고 力說하였기 때문에 定住性에는 博川·家産의 一般 農民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北進軍 亦是 義州의 金見神 (金見信)· 허항 (許沆)李 이끄는 義州 民兵隊의 反擊을 받은 데다 松林 戰鬪에서 勝利한 氣勢를 몰아 進擊하는 官軍에게 곽산 沙松坪(四松坪)에서 敗戰함으로써 軍士를 解散하고 主要 人物들은 정주성에 들어갔다.

한便 이 變報가 1812年 2月 2日(1811年 陰曆 12月 20日 ) 平壤에 傳해지자 平安監司 李萬洙 (李晩秀)는 1812年 2月 4日(1811年 陰曆 12月 22日) 巡按 의 兵士를 按酒로 向하게 하고, 다시 列邑(列邑)의 兵士를 繼續 動員하게 하고, 道內의 곳곳 要塞를 굳게 지키게 하며, 萬一을 위하여 創意(倡義)의 幼生·文士를 募集하여 平壤 을 防備하게 하고 一部는 出征시켜 按酒의 官軍에 附屬시켰으나 송림리 戰鬪에서 敵을 追擊·殲滅치 않았다는 理由로 李萬洙 는 罷免되었다.

政府에서는 兵曹參判 정만석 (鄭晩錫)으로 良書慰撫使 兼 監賑史(監賑史)에 임명하여 叛亂地를 慰撫케 하고, 亂君에게 歸順을 勸告하였다. 1812年 2月 6日(1811年 陰曆 12月 24日)에는 巡撫營을 設置하고, 이요헌 (李堯憲)으로 양서순武士에 任命하고, 박기풍 (朴基豊)을 中軍으로 삼아 書籍(西賊) 討伐에 關한 群舞를 보게 하고, 1812年 2月 9日(1811年 陰曆 12月 27日) 先鋒隊로 漢陽을 出發했다. 그리고 1812年 2月 13日 ( 陰曆 1月 3日 ) 정주성 아래에 到着하였다. 이는 송림리 戰鬪 後 5日 만이다.

이와 전후하여 곽산에서도 官軍이 이겨 博川·家産을 回復하였으며, 8邑 中 定住를 除外하고는 모두 回復하였다. 따라서 정주성은 完全히 孤立되었으며, 官軍은 四方의 義兵과 더불어 유리하였다. 洪景來軍은 城을 굳게 지키고 여러 番 城 밖으로 突擊하여 나왔으나 成果를 보지 못하고 籠城을 繼續하였다.

이에 政府軍은 땅窟을 파들어가 火藥으로 城의 아래를 폭발시키고 城內로 突入하여 陷落시키니 5月 29日 ( 陰曆 4月 19日 )로 籠城한 지 100餘 日, 擧兵한 지 5個月 만이었다. 이때 洪景來는 銃에 맞아 죽고 우군칙·洪總角 等 多數는 捕虜가 되어 漢陽으로 押送된 後 陰曆 5月에 斬刑되었다. 이때 2,983名이 逮捕되어 女子(842名)와 열살 以下의 男子 少年 (224名)을 除外한 1,917名이 全員 處刑되었다.

失敗한 理由 [ 編輯 ]

洪景來의 亂은 많은 準備와 勢力을 등에 업은 大規模 叛亂이었으나, 進行 中 몇 戰鬪에서 敗하여 氣勢가 수그러들자 빠르게 鎭壓되어갔다. 이는 홍경래 勢力이 같은 目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各自 다른 理解를 가지고 모여든 勢力이었던 것이 理由이다. 처음에 成功을 거두어 氣勢가 强했을 때는 電力 離脫이 없었으나, 몇 番 失敗를 하면서 可能性이 낮아지자 발을 빼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叛亂軍 內部에서 紛亂도 있었고 途中에 洪景來가 暗殺 氣道를 겪기도 했다.

洪景來의 計劃이 一部 어그러진 것 또한 失敗를 가져온 原因 中 하나다. 박종일 (朴鍾一)로 하여금 漢陽에서 亂을 일으켜 中央의 混亂을 꾀하였으나 誅殺되고, 昌城(昌成)·江界(江界)·醋蒜(楚山)·委員(渭原) 等地의 砲手(砲手)들의 來援을 期待하였으나, 모두 逮捕되었으며, 占領한 8邑이 陷落되어 定住性이 孤立되고, 붙들린 砲手들이 定住性 攻擊을 도왔으며, 戶兵(胡兵, 淸나라 軍隊)을 請하려 하였으나 部下의 飜意로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參考 文獻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農民의 叛亂〉"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各州 [ 編輯 ]

  1. 原文은 '平漢'이다. 漢은 '사나이, 놈'이라는 새김이 있다(예: 常漢, 無賴漢, 癡漢 等).
  2. 《稗林》 卷10, 順調記事, 辛未(1811年) 12月 21日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