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구치 구마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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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구치 구마이치

호리구치 구마이치 ( 日本語 : 堀口九萬一 , 1865年 2月 23日 ~ 1945年 10月 30日 )은 日本 의 外交官, 言論人, 漢詩人 (漢詩人), 隨筆家이다. 號는 曹操( 日本語 : 長城 )이다. 是認 호리구치 다이가쿠 ( 日本語 : 堀口大學 )의 아버지이다.

生涯 [ 編輯 ]

에치高 나가오카 番 (只今의 니가타縣 나가오카視 )의 아시가루 의 아들로 태어났다. 3歲 때 補身 戰爭 이 일어나 아버지가 戰死했고, 나가오카 番移 逆賊 無理( 日本語 : 賊軍 )로 몰리게 되었다. 그 後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歲의 젊은 나이에 나가오카의 한 學校 校長職을 맡게 되었고, 도쿄로 올라간 以後에는 도쿄 帝國 大學 法學部를 首席으로 入學했다. 在學 中 結婚하였으며 1892年 子息 다이가쿠를 낳았다.

1894年 日本에서 첫 番째로 施行된 外交官 및 領事館 試驗에서 合格했다. 外務省 領事館普魯西 仁川 에 赴任하던 中 1895年 乙未事變 에 關與한 嫌疑로 正直 處分을 받았다. 1896年 復職한 뒤 臨時代理公社로서 멕시코 에 赴任하다가, 1913年 멕시코에서 軍士 쿠데타가 發生하여 프란시스코 마데로 大統領 이 살해당하자 未亡人과 兒童들을 保護했다.

네덜란드 , 벨기에 , 스웨덴 , 스페인 , 브라질 , 루마니아 等地에서 일했으며, 1895年 첫 夫人과 死別한 以後 벨기에 女性과 再婚했다. 次男은 스웨덴에서 일하던 中 태어나, 勤務地의 스웨던의 音域者를 따 이름을 호리拘置 요시노리 ( 日本語 : 堀口瑞典 )이라 지었다. 호리구치 즈이텐은 도메이 通信社 記者로서 世界 大戰 中 취리히 에서 特派員으로 일했다. 戰爭 以後 산케이 新聞 에 在職했다.

1925年 루마니아를 끝으로 外交官 活動에서 물러난 뒤, 講演을 하거나 글을 썼다. 1927年 네덜란드의 作家 엘런 포레스트 가 쓴, 日本을 舞臺로 한 小說 《유키 씨》 ( 日本語 : 雪さん )를 《조세이》(女性)誌에 連載했다. 한便, 호리구치의 隨筆集은 親舊였던 하세가와 미노스케 가 세운 다이理致 쇼보에서 發行했다.

太平洋 戰爭 中에는 《앵글로색슨의 殘忍性》, 《이番에 美國은 振子》 等 日本軍의 戰意를 高揚하려는 內容의 글을 썼다. 敗戰 以後 1945年 10月 숨졌다.

乙未事變 關聯 [ 編輯 ]

乙未事變 때 朝鮮公使館에서 領事官報로 있었다.

著書 [ 編輯 ]

  • 《유심錄》, 다이理致 쇼보, 1930年
  • 《南美 및 스페인》 ( 日本語 : 南米及び西班牙 ), 헤이本샤 , 1933年
  • 《外交와 文藝》, 다이理致 쇼보, 1934年
  • 《世界와 外交》, 다이理致 쇼보, 1936年
  • 《世界와 世界人》, 다이理致 쇼보, 1936年
  • 《世界의 記憶》 ( 日本語 : 世界の思ひ出 ), 다이理致 쇼보, 1942年
  • 《將星詩抄 호리구치 다이가쿠 飜譯本》, 다이몬 出版, 1975年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