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제명
(玄濟明,
1902年
12月 8日
~
1960年
10月 16日
[1]
)은
日帝强占期
,
大韓民國
의
피아노 演奏家
,
바이올린 演奏家
,
테너
聲樂家
,
歌曲
作詞家
,
歌曲
作曲家
,
編曲家
이다.
本貫은
連奏
(延州)이고 雅號(雅號)는 현석(玄石)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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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年
大邱
中區
出身으로
改新敎
家庭에서 出生하여 어릴 때부터 西洋音樂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大邱
계성高等普通學校
를 거쳐
平壤
의
崇實高等普通學校
를 卒業한 後 1923年
全州신흥學校
의 英語와 音樂 敎師로 赴任하였다. 1926年
美國
시카고
무디聖經學校(Moody Bible School)에 入學했다가, 件音樂學校(The Gunn School of Music)
[2]
로 옮겨 音樂 工夫를 하고 碩士學位를 取得했다.
[3]
歸國한 뒤에는
연희전문학교
敎授를 지내면서 韓國의 西洋音樂界에 많은 影響을 끼쳤다. 1930年
朝鮮音樂家協會
를 結成하고 初代 理事長에 就任하기도 했다.
日帝强占期
末期에
朝鮮總督府
의 支援으로 結成된
朝鮮文藝會
에 參與하여 親日 活動을 始作한 後
帶同民友會
,
時局對應典膳司上輔國聯盟
,
朝鮮音樂協會
,
京城厚生室內樂團
等 親日 團體에 연이어 參加했다. 朝鮮音樂協會의 音樂會에서 親日的인 內容의 聲樂曲 〈후지산을 바라보며〉를 發表하고
對話숙
主催 ‘國民音樂의 밤’과 같은 親日 行事에 參加해 獨唱을 하거나
國民總力朝鮮聯盟
의 全國 巡廻 歌唱地圖臺에 參加하는 等, 그의 親日 行跡은 音樂家들 가운데서 매우 뚜렷한 便이다.
光復 後
한국민주당
所屬의
右翼
音樂人으로 活動하면서
서울大學校
에 音樂大學을 設置해 藝術學部 招待 學部長을 맡았다.
高麗交響樂團
을 創設하고 指揮者로 活動했으며, 創作
오페라
를 舞臺에 올려 오페라 演出者로도 足跡을 남겼다.
대한민국예술원
의 終身會員을 지냈다.
1960年 10月 16日 서울 中區 신당동 自宅에서 享年 57歲를 一期로
肝硬變症
으로 世上을 떠났다.
所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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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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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譽 博士 學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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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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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에 包含되었고, 2008年 公開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 2009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4人 名單
에도 選定되었다. 2005年 서울大學校 校內 團體가 發表한 ‘서울대학교 出身 親日人物 1次 12人 名單’에도 들어 있다.
[4]
2008年 8月 學術誌 ‘韓國史 市民講座’ 下半期號(43號)에서
大韓民國
建國 60周年 特輯 ‘大韓民國을 세운 사람들’ 을 選拔, 建國의 基礎를 다진 32名을 選定할 때 文化, 宗敎, 言論 部門의 한사람으로 選定되었다.
[5]
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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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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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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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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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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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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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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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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