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문
(玄錫文,
1797年
~
1846年
9月 19日
)은
朝鮮
의
天主敎
迫害
때에
殉敎
한
韓國 天主敎
의
103位 成人
中에 한 사람이다.
洗禮名
은
가롤로
(Carolus)이다.
그는
金大建 안드레아
新婦
가
殉敎
하고 사흘 뒤에 殉敎하였다. 玄錫文은
앵베르
主敎
를
朝鮮
에 데려오고
샤스탕
神父를 도와 여러 곳을 다니며
宣敎
活動을 함께 한 사람들 中에 하나이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門
[
編輯
]
玄錫文은
1797年
에
漢陽
에서
中인
身分
의 篤實한
天主敎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5살 되던
1801年
에
辛酉迫害
로
殉敎
하였고, 그의 아내와 子息들은
1839年
에
己亥迫害
로 獄死하였다. 그의 누나
現痙攣
또한 己亥迫害로 殉敎하였다.
篤實한 信仰生活
[
編輯
]
玄錫文은 온 生涯를
宣敎師
들과 敎友들을 돕는 데 바쳤다.
敎皇廳
文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기린다.:
“
|
그는 커다란 貢獻을 하였다. 그는 高德과 溫和하고 親切하며 淳朴한 性品을 지녔다.
|
”
|
玄錫文은 殉敎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生活 속에서도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篤實한 信仰生活을 이어나갔다. 그는
憲宗
2年(
1836年
)에
義州
로 가서
앵베르
舟橋를
朝鮮
으로 맞아들였다.
1837年
에
샤스탕
新婦
가 入國하자, 玄錫文은 그의
輻射
가 되어 新婦와 함께
宣敎
旅行에 同參하는 한便, 敎人들의 信仰指導에 힘썼다.
1839年
에
己亥迫害
가 始作될 때에, 玄錫文은
官衙
에
自首
하기를 願했지만,
宣敎師
들이 그를 말렸고 살아남아서 敎友들을 돌보라고 말했다.
앵베르
主敎
와
宣敎師
들이 逮捕될 때, 玄錫文은
漢陽
의 會長으로 任命되었다. 主敎는
殉敎
前에
朝鮮
의
敎會
를 맡겼다. 이 事實은 主敎와 敎友들이 그를 얼마나 크게 尊敬했는지를 보여준다. 玄錫文은 逮捕를 避하기 위해 이재영이라는
假名
을 使用하였다. 그는 새로 入校한 敎友들을 激勵했고 여러
宣敎
誌들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寄附金을 모아서 그들의 信仰生活을 뒷바라지 하였다.
己亥日記의 編纂
[
編輯
]
그는 아내와 누이가 殉敎한 後에 《
朝鮮
天主敎
殉敎者
列傳》을 執筆하기 始作했는데,
己亥迫害
가 끝나자, 그것의 編纂을 畢生의 事業으로 생각하고
상하이
까지 被害다니기도 하면서 살아남은
최희원
과
模倣
新婦
의
輻射
崔兄 베드로
,
이승훈 베드로
의 孫子
이재의 토마스
等의 協助를 받아
殉敎
資料를 모아서 確認 및 補充 整理하여 3年 만에 短篇의 《
己亥日記
》를 完成하였고 敎友들에게 配布하였다.
상하이 往來
[
編輯
]
그는 頻繁히
베이징
으로 傳令을 보내
宣敎師
들과 連絡하였다.
1845年
그는
副題
김대건
과 함께 작은 나무배를 타고
상하이
로 가는 험란한 航海에 同參하였고,
朝鮮敎區
의 第3代
敎區長
페레올
主敎
를 맞아들였다. 玄錫文은
漢陽
으로 돌아온 뒤, 危險을 무릅쓰고 김대건
新婦
의 집을 自身의 名義로
登記
하였다.
1846年
에는
丙午迫害
가 일어났다. 玄錫文은 金大建 神父의
逮捕
消息을 듣고 새로운 집을 購入하여 敎會의 모든 財産을 그곳으로 옮겼으며, 金 神父의 處所에 남아 있던 女性 敎友들을 새 집으로 避身시켰다.
逮捕 및 投獄
[
編輯
]
며칠 後에 그의 새 집에서 捕卒들이 손쉽게 그를 逮捕하였는데, 移徙짐을 나르던 人夫들이 告發하였기 때문이었다.
7月 11日
捕卒들이 그 집을 急襲할 때,
김임이 테레사
와
이간난 阿伽陀
,
정철염 카타리나
그리고
右述임 수산나
等 몇 名의 女性 信徒도 있었으므로, 그들도 모두 함께
逮捕
되었다.
監獄
에서 玄錫文은 交友 收監者들을 激勵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玄錫文이 極甚한
拷問
을 받았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顧問을 免除 받았다고 하였다. 어쨌든 그는
死刑
을 宣告받았다. 官撰 記錄(《
憲宗實錄
》)에 따르면, 玄錫文은
1846年
9月 19日
(
陰曆 7月 29日
)에
斬首刑
을 宣告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官撰 記錄(《
承政院日記
》)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는
軍門梟首刑
도 宣告받았다고 傳한다.
殉敎
[
編輯
]
玄錫文은
1846年
9月 19日
에
漢陽
의
새남터
에서
斬首刑
을 받았고
軍門梟首
되었다.
金 카타리나
의 證言에 따르면, 그는 平穩하고 勇敢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가
殉敎
하던 때의 나이는 52歲였다.
諡福 · 詩聖
[
編輯
]
현석문 가롤로는
1925年
7月 5日
에
로마
聖 베드로 廣場
에서
敎皇
비오 11歲
가 집전한 79位
[2]
諡福式
을 통해
福者
품에 올랐고,
[3]
1984年
5月 6日
에
서울特別市
汝矣島
에서
韓國 天主敎
創立 200周年을 記念하여 訪韓한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가 집전한
미사
中에 이뤄진 103位
諡聖式
을 통해
成人
품에 올랐다.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