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윤
(玄相允,
1893年
6月 14日
~
1950年
9月 15日
[1]
)은
日帝强占期
와
韓國
의 敎育인, 哲學者이다.
高麗大學校
初代 總長을 歷任했다.
1950年
韓國 戰爭
中 拉北되어 가던 中 被爆 死亡으로 推定되나 仔細한 死因은 不明이다. 號는 小星(小星), 基當(幾堂)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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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 强占期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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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北道
定州郡
出生이다.
안창호
가 設立한
平壤
의
大成學校
에서 受學하고
寶城中學校
와
日本
의
와세다 大學
을 卒業했다.
1919年
3·1 運動
이 일어났을 때는
1918年
와세다 大學을 卒業하고 歸國하여
中央高等普通學校
敎師로 在職 中이었다. 3·1 運動에 중앙고보 校長이었던
송진우
와 함께
民族代表 48人
中 한 名으로 參加하였으나 腹心에서 無罪 判決을 받았다.
日帝强占期
末期에는 太平洋 戰爭 支援을 위한 親日 글을 多數 남겨
2008年
에 發表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敎育/學術 部門에 選定되었다. 그러나
1940年
의
創氏改名
勸告에는 拒絶하였다.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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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安南道 平壤 大聲高等普通學校
- 京城 寶城高等普通學校
- 日本 와세다 大學校 英語英文學科
- 日本 와세다 大學校 大學院 哲學과 哲學碩士
- 大韓民國 고려대학교 大學院 人文學과 文學博士 學位 追敍
光復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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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 後, 政治에 參與하지 않고 敎育에 投身하였다.
高麗大學校
의 前身인 보성專門學校 校長(1946年)을 맡았다가 이 學校가 大學校로 昇格되면서 高麗大學校 初代 總長(1947年)에 就任하였다.
그러나
1948年
3月
美 軍政
靑 軍政長官 딘 所長으로부터
5·10 總選거
를 管理하려는 中央選擧委員會 委員에 任命되었다.
高麗大
總長 在任 中이던
1950年
韓國 戰爭
이 勃發하면서 拉北되었지만, 以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의 公式 活動 記錄은 없고 1950年 9月
黃海道
에서 美軍 爆擊으로 死亡한 것으로 傳해진다.
[2]
行方을 알 수 없던
1953年
3月 25日
고려대학교에서 《조선유학사》라는 生前 學術 關聯 論文으로 文學博士 學位 授與를 追敍하였다.
현재현
동양그룹
會長이 玄相允의 孫子이다.
[3]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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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現在 玄相允의 遺骸는 평양시 龍城區域에 있는 '在北人士의 墓'에 安葬되어 있다.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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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
- 韓國思想史
- 基當현상윤全集
- 『玄相允의 朝鮮思想史』, 校註 이형성, 心山, 2010年 8月 15日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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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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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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