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헌정왕후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헌정왕후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헌정왕후
獻貞王后
高麗 景宗의 王妃
         高麗 안종의 王妃 (推尊)
이름
시호 憲政(獻貞)
尊號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
효숙仁惠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
효숙인혜순成大왕태후
(孝肅仁惠順聖大王太后)
명간선용인혜효숙왕태후
(明簡宣容仁惠孝肅王太后)
身上情報
出生日 未詳 (964年 以後) [1]
死亡日 992年 7月 1日 (陰曆)  高麗史 
993年 3月 19日 (陰曆)  玄化寺費 
死亡地 高麗 開京 王輪寺 南쪽 安宗 私邸  高麗史 
高麗 開京 步화궁  玄化寺費 
家門 黃州 皇甫氏
父親 大宗
母親 선의왕후 劉氏
配偶者 警鐘
子女 顯宗
陵墓 원릉 (元陵)

헌정왕후 皇甫氏 (獻貞王后 皇甫氏, 964年 以後 [1] ~ 992年 8月 1日 ( 陰曆 7月 1日 [2] ) 또는 993年 4月 13日 ( 陰曆 3月 19日 [3] ) )는 高麗 第 5代 國王 警鐘 의 4비이다.

姓은 皇甫氏 (皇甫氏)이며, 祖母인 신정왕태후 의 姓氏를 使用하였다. 太祖 의 子女들인 大宗 善意太後 의 둘째 딸로, 遷推太后 의 동생이자 穆宗 의 姨母이다. 景宗 事後 史家에 나가 살다가 이福 叔父인 安종 과 私通하여 아들 왕순( 顯宗 )을 出産하였다. 事後 玄宗에 依해 효숙왕태후 (孝肅王太后)로 追尊되었다.

生涯 [ 編輯 ]

結婚과 王后 生活 [ 編輯 ]

太祖 신정왕태후 의 아들 大宗 의 딸로, 成宗의 누이同生이며 헌애왕후 (遷推太后)의 동생이다. 어려서 父母를 일찍 여의어 할머니 신정왕후에 依해 養育되었다. 以後 동생과 함께 景宗의 王妃로 冊封되면서 祖母의 姓을 따서 皇甫氏(皇甫氏)라 稱하였다.

景宗의 王妃가 되었으나, 景宗이 일찍 死亡하여 寡婦가 되었다. 이에 따라 王輪寺(王輪寺) 南쪽에 있는 私邸로 나가 살았다.

姦通과 最後 [ 編輯 ]

高麗史 》, 《 高麗史節要 》에 記錄된 바에 依하면, 그女가 꿈에 곡령(鵠嶺)에 올라 小便을 하니 나라 안에 흘러넘쳐 모두 은 바다가 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헌정王后가 巫俗人을 찾아가 꿈解夢을 하자 巫俗人은 아들을 낳으면 一國의 王이 될 것이라고 占하였다. 그러나 헌정王后는 "내가 이미 寡婦인데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다.

그女와 이웃해 살던 叔父 安宗(왕욱)과 情을 통하여 妊娠한 事實이 成宗에게 發覺되자, 成宗은 安宗을 사수현(現在 泗川市 )으로 流配보냈다. 한便 그女는 안종의 流配길을 배웅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算筒을 느껴 自己 집 앞의 배나무 밑에서 아들인 大量援軍 을 낳고는 産苦로 죽었다. 그러나 다른 說에 依하면 受胎 中 왕욱의 私邸에 있다가 發覺되어, 부끄러워 울며 도망가다가 집으로 돌아와 門 앞에 있는 버드나무가지를 부여잡고 아들인 왕순을 出産하고 죽었다고 한다. 한便 헌정왕후와 왕순은 모두 太祖의 孫女, 孫子이니, 그들은 모자지간이면서 四寸男妹間이 되는 셈이다.

高麗史 后妃 列傳과 高麗史節要 에 依하면 出産 直前 그女는 이웃에 살던 왕욱 의 私邸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高麗史 의 編纂時期人 朝鮮時代 의 支配觀念이었던 儒敎 의 影響으로 그女의 行實에 否定的이었던 高麗史 編纂 史觀들이 그女의 行動을 批判하여 더욱 나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꾸며낸 事實로 推定된다. [ 出處 必要 ]

 

成宗 11年(992年) 7月, 王后가 安종 의 집에서 머물자 그 집안사람들이 長斫을 뜰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막 솟아오르자 百官이 불을 끄러 달려오고 成宗도 또한 急히 와 安否를 물으니,
집안사람들이 結局 事實대로 알렸으며 이에 安宗을 流配 보냈다.
王后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목을 놓아 울부짖다가 그 집으로 돌아갔는데
겨우 大門에 닿자마자 胎動이 있어 大門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成宗 이 命하여 乳母를 골라 그 아이를 기르게 하니 그가 바로 顯宗 이다.
? 《 高麗史 》 卷88, 列傳1, 后妃1, 警鐘 后妃

한便 《玄化寺費(玄化寺碑)》에 依하면, 《高麗史》의 記錄과는 달리 헌정王后는 顯宗을 出産한 이듬해인 993年 陰曆 3月 19日 宮闕 內 寶貨宮에서 死亡한 것으로 記錄되어 있다 [4] .

 

皇妃(皇?, 皇帝의 돌아가신 어머니 )이신 효숙仁惠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께서는
大宗大王 (戴宗大王)의 따님이고 成宗代王 의 둘째 누님이셨습니다.
(中略)
醇化 4年(993年) 늦봄에 갑자기 病이 들자 成宗代王께서 親히 行次하시어 病을 물으시고
아침저녁으로 더욱 關心을 가지셨습니다.
名義를 보내어 거듭 治療하게 하고, 좋은 藥草를 보내어 달여 마시게 하였으며,
또한 王室의 寶物을 査察에 喜捨하고 낫기를 빌었습니다.
하지만 壽命이 길지 못하여 祈禱의 效驗도 없이
그해 3月 19日에 對內(大內)의 步화궁(寶華宮)에서 붕어(崩于)하셨습니다.
成宗代王 께서는 지친(至親)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마음을 크게 애통해 하시며
'이미 주어진 壽命을 다하여 便安히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누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 고 하셨습니다.
? 玄化寺費


事後 [ 編輯 ]

헌정王后가 낳은 아이는 成宗에 依해 養育되었고, 成宗이 命하여 保姆를 擇하여 아이를 돌보게 하였다.

穆宗이 卽位하면서 攝政을 하게 된 헌애왕후는 조카 왕순의 목숨을 隨時로 威脅하였다. 그러나 1009年 强調의 난 으로 穆宗이 廢位되고 헌애왕후度 쫓겨나면서, 强調 의 推戴로 아들인 왕순이 王位에 오르자 헌정王后는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로 봉해지고 원릉(元陵)의 陵號를 받았다. 1017年 5月 에 혜순(惠順)이라는 諡號를 追加하고, 1021年 6月에 혜순(惠順)을 고쳐 仁惠(仁惠)라 하였으며, 1027年 4月에 善用(宣容)을, 高宗 40年 10月에 銘肝(明簡)을 追加하였다.

家族 關係 [ 編輯 ]

高麗 王室 家計도 【太祖 ~ 顯宗】
莊和王后 申命淳性王后 第1代 太祖 신정왕후 정덕왕후 신성왕後
第2代 惠宗 第3代 定宗 第4代 光宗 대목왕후 推尊 大宗 선의왕후 推尊 安종
第5代 警鐘 문덕왕후 第6代 成宗 헌애왕후 헌정왕후
第7代 穆宗 第8代 顯宗

헌정王后가 登場하는 作品 [ 編輯 ]

各州 [ 編輯 ]

  1. 玄化寺費
    皇妃(皇?)이신 효숙仁惠왕태후께서는 大宗大王 의 따님이고 成宗代王 (960年生)의 둘째 누이同生이셨습니다.
  2. 高麗史 記錄
  3. 獻花私費 記錄
  4. 韓國金石文 綜合映像情報시스템 《玄化寺費》 項目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