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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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曄 (許曄, 1517年 12月 29日 ~ 1580年 2月 4日 )은 朝鮮 중기의 文身 , 性理學者 로, 字는 태휘(太輝), 號는 秒當(草堂), 本貫은 陽川 (陽川)이다. 羅湜(羅湜), 이여(李?), 徐坰德 李滉 의 門下에서 受學하고, 이언적 을 私宿하였으며 進士試에 合格한 뒤 1546年(明宗 1) 式年 文科에 甲科로 及第하여 明宗 때 官職에 올랐으며 東西 分黨 때는 同人 에 加擔하였다.

文科及第 後 1551年 副校理를 거쳐 1553年 賜暇讀書 한 뒤 掌令(掌令) 때 財物을 탐하였다가 罷免되었다. 1559年 弼善(弼善), 1560年 大司成, 1562年 知製敎(知製敎)를 거쳐 同副承旨 兼 經筵參贊官이 되었다.

1562年 經筵官 在職 中 윤근수 · 구수담 (具壽聃)· 許磁 等의 無罪를 主張하다가 다시 파직당했고 1563年 初 復職되고 곧이어 三陟府使로 赴任하였으나, 過激한 發言 때문에 問題가 되어 다시 罷職되었다. 그 뒤 復職하여 1568年(宣祖 1) 鎭下府使(進賀副使)로 明나라에 다녀온 뒤 大司諫에 올라 鄕約(鄕約)의 施行을 建議하였다. 1575年 乙亥黨論으로 同人과 西人의 黨爭이 始作될 때 同人에 加擔했다. 以後 副提學(副提學)을 거쳐 慶尙道 觀察使가 되었으나 病으로 辭退하고 同知中樞府事로 轉任되었다. 淸廉潔白하여 淸白吏에 녹선되었으나 財物 問題로 彈劾을 當하기도 했다.

江陵 초당의 맑은 물로 豆腐를 만들어 초당豆腐 의 起源이 되었다. 許筠 許篈 , 許筬 , 許蘭雪軒 의 아버지이며 義城 許浚 에게는 10寸 兄이 된다. 諡號는 門間(文簡).

略歷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少年期 [ 編輯 ]

成均館 全的(成均館典籍) 增 承政院 都承旨(承政院都承旨) 許昌(許菖)의 曾孫으로, 할아버지는 금화사 別除(禁火司別提) 增 吏曹 參判(吏曹參判) 虛談(許聃)이고, 아버지는 軍資監副奉事를 지내고 增 吏曹參判에 追贈된 虛한(許澣)이며, 어머니 星氏는 돈녕부판관 性戱(成喜)의 딸이다.

許筠 許筬 , 許篈 , 許蘭雪軒 의 아버지이며 우성전 의 丈人이기도 하다. 일찍부터 怜悧하고 早熟하였으며 노수신 에 依하면 7, 8歲에 孝友(孝友)가 남달랐고 스승에게 나아가서는 번거로이 勸督(勸督)하지 않아도 越等히 進取하였다 한다.

數學 [ 編輯 ]

어려서 羅湜(羅湜)에게 小學, 近思錄 等을 배웠고, 뒤이어 晦齋(晦齋) 이언적 (李彦迪)을 찾으려 하였으나 失敗하고 代身 李彦迪이 人種 에게 권강(勸講)韓 《心境부주》(心經附註)를 求해 읽었다. 이어 鎭川(鎭川) 이여(李?)가 數學에 精通하고 《 主役 》에 造詣가 깊었는데 이여를 찾아가 그에게 數學科 周易을 배웠다. 뒤에 松島 를 찾아가 花潭 徐坰德 에게 師事하였는데, 徐敬德은 그를 特別히 寵愛하여 晩年에 病이 危重할 적에 '원리기 (原理氣)' 等의 여섯 篇을 口頭로 그에게 읊어 주었다. 그는 徐敬德의 口述을 一一이 받아 記錄했다 한다. 1540年 (中宗 35年) 徐敬德의 門下에 있을 때 進士試 에 合格하였고 1546年 에는 文科에 及第하였다. 그 뒤 徐坰德 事後 安東 倒産의 退溪 李滉 을 찾아가 그의 門下에서도 暫時 修學하였다.

官僚 生活 [ 編輯 ]

科擧 及第와 官僚 生活 初盤 [ 編輯 ]

許曄의 글씨

明宗 卽位 後 1546年(明宗 1) 式年 文科에 甲科로 及第하여 李朝 正郞(吏曹正郞)을 거쳐 掌令에 이르렀다. 塵外六寸兄(할머니의 親庭 從孫子)이면서 윤원형 의 조카인 윤춘년 (尹春年)은 윤원형 文定王后 의 堂조카로 權力者였으나 그를 멀리하였다.

그 뒤 長興庫 職場(長興庫直長), 禮曹 佐郞 , 共助 佐郞, 兵曹 佐郞을 거쳐 1550年 通善郞(通善郞)으로 昇進 行 吏曹 佐郞 知製敎(通善郞行吏曹佐郞知製敎)로 春秋館 記注官이 되었고, 1551年 弘文館副校理를 거쳐, 特命으로 情3品 武官職인 折衝將軍(折衝將軍)의 品階를 받고 知製敎(知製敎)가 되었다.

1553年 (明宗 8年) 司諫院 司諫이 되었다. 이때 塵外六寸兄 윤춘년이 그에게 移監 (李戡)을 吏曹와 議政府의 要職에 請託 推薦하였으나 오히려 面駁을 주어 되돌려보냈고 이 일로 윤춘년은 그에게 感情을 품고 그를 非難할 資料를 찾아서 非難하였으나 別 成果가 없었다.

1553年 議政府 檢詳(檢詳)과 死因(舍人)을 거쳐 賜暇讀書 가 되고, 그 뒤 司憲府 掌令 (掌令)으로 在職中 집에 火災가 나면서 家産을 털어 집을 지었다. 그 해 財物을 탐하였다 하여 兩社의 彈劾을 받고 罷免되었다. 1554年 母親喪을 當하여 1557年 3年喪을 마쳤다.

1557年 3年喪을 마치고 다시 司憲府 로 復職했으나 김여부(金汝孚)와 金弘道(金弘度)가 便을 가르고 서로 싸울 때 김여부를 꾸짖었다가 김여부의 怨恨을 샀는데, 金弘道가 쫓겨날 때 그의 黨與로 몰려 外職人 配天 郡守 (白川郡守)로 轉出되었다.

1559年 司憲府 執義(司憲府執義)로 돌아왔다가 大司憲과 싸우고 파면당했다가 바로 復職했다. 그 뒤 1559年 世子侍講院 弼善(弼善)에 任命되었으며 以後 成均館 大司成 ·1560年 共助參判으로 特進했다가 다시 大司成이 되고, 1562年 兼任 知製敎(知製敎)를 거쳐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明宗의 召命을 받고 玉翠情(玉翠亭)에 들어가 律詩(律詩)로 和答하였다. 그해 承文院 板橋(承文院判校)를 거쳐 承政院 同副承旨로 拔擢됐다.

官僚 生活 [ 編輯 ]

1562年 競演場에서 明宗에게 己卯士禍 때 죽은 조광조 의 復權을 建議하였고 윤근수 · 구수담 (具壽聃)· 許磁 等의 無罪를 主張하다가 다시 파직당했다.

國家가 힘입어서 維持하는 것은 人材(人才)인데, 人材가 나오지 않는 것은 人心이 바르지 않아서이고 人心이 바르지 않음은 실로 聖人(聖人)의 道(道)가 밝지 않아서입니다. 神이 이番에 成均館을 管掌하고 있으면서도 敢히 信賴하는 者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그 由來가 있어서입니다. 中宗께서 銳利한 뜻으로 選定(善政)을 이루시자 趙光祖(趙光祖) 等이 特別히 남다른 恩惠를 입고서 感激하여 報答을 圖謀한바, 요순(堯舜) 時代의 郡民(君民)을 거의 이루게 되었으나 不幸하게도 나쁜 사람들이 猜忌하여 抑鬱하게 慘酷한 禍를 當하였으므로, 이로부터 人心이 크게 무너져서 救濟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身元(伸寃)을 하여 주시어 氣風이 當場 變하게 한다면 人心이 鎭靜되어서 國家가 便安하여질 것입니다.

競演에서 趙光祖 等의 身元을 請하자 明宗은 父王이 處決한 일을 어찌 敢히 함부로 뒤집느냐며 다음에 言及할 것을 注文하였다. 그러나 그는 反復하여 極力 開陳(開陳)하고 또 아뢰기를, '이를테면 近世에 허자(許磁)는 人選(人選)을 主管하면서 請託을 받지 않았다가 誹謗이 쌓여서 먼 곳으로 貶黜(貶黜)되었고, 구수담(具壽聃)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忠誠을 다하였음에도 四史(賜死)되었습니다. 大抵 死刑을 判定할 적에 반드시 福州(覆奏)를 하는 法이 唯獨 代身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니, 神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며 윤두수, 구수담의 無罪를 請하는 한便 '어떤 사람의 奴婢가 한 番 內需司(內需司)에 들어가기만 하면 하늘을 우러러 歎息만 할 뿐 辨明할 길이 없으니, 이것 亦是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王은 論할 수 없다고 했으나 繼續 같은 主張을 反復하다가 明宗의 눈밖에 나면서, 司憲府와 司諫院의 彈劾을 當하고 罷職된다.

1563年 初 復職되고 곧이어 그해 6月 三陟府使 (三陟府使)로 赴任하였으나, 過激한 發言 때문에 問題가 되어 다시 罷職되었다. 그 뒤 復職되었으나 8月 이량 , 移監 과의 葛藤으로 8月 13日에 다시 罷職된다. 한便 移監은 許曄이 李朝 佐郞 이 되었을 때에 自己를 薦擧해 주지 않은 것에 對해서 怨望을 품었다. 그때 마침 許曄의 宗家(宗家)가 불에 타서 다시 집을 짓게 되었는데, 移監은 疑心스러운 痕跡을 찾아내 許曄을 몰아붙였다. 大司憲 윤춘년이 그 말을 믿고 許曄을 彈劾하려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윤춘년에게 ‘許曄이 짓는 것은 宗家이다. 疑心스러운 痕跡을 가지고 論駁한다면, 한지원(韓智源)과 心田(沈銓)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니, 윤춘년은 ‘한지원과 心田은 참으로 罪가 있다 하겠거니와, 許曄은 士林의 名望을 받고 있으니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또 ‘그렇다면 名望이 있는 者만을 다스리고,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할 者들은 그대로 내버려 둔단 말인가?’라고 하니, 윤춘년은 對答을 못하고 말았고, 許曄은 處罰을 謀免하였다.

1563年 10月 이량, 移監 等의 彈劾을 받을 뻔하였으나 심의겸 의 使嗾를 받은 弘文館副提學 기대항 이 이들을 彈劾하여 危機를 넘겼다. 바로 이량 等이 流配되면서 復職했지만 尹元衡 等은 前에 그가 經筵官 在職 中 野大에서의 發言態度를 問題삼아 請要職 任用을 反對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1567年(明宗 22年) 承政院 都承旨로 拔擢되었다. 이어 尹元衡, 이기 等의 處罰과 時務策을 建議한다. '윤원형(尹元衡)ㆍ이기(李?) 等이 先王과 先後(先后)를 속여서 이름 있는 선비들을 다 모아 反逆의 罪名을 씌운바, 더러 풀려난 이도 있지만 한 구덩이로 몰아넣어 놓았습니다. 只今 萬若 그들의 罪를 바로잡아 다스리고 抑鬱한 사람들을 身元(伸寃)하여 준다면 火氣(和氣)를 이룰 수 있어서 災殃도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연이어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이 지은 글을 收縮 完美(收畜玩味)하면 이 亦是 스승이 될 것이며, 只今 李滉(李滉)李 病으로 辭職하고 집에 있으나 恭敬과 禮儀를 다한다면 반드시 敢히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明宗 때 불렀던 이항(李恒)과 曺植(曺植)은 나이는 많으나 誠意를 가지고 부른다면 亦是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옛날 精子(程子)와 주자(朱子)가 났어도 송(宋)나라에 쓰이지 못한 것은 이것이 千古의 遺憾입니다. 또 異種(理宗)은 그 道(道)를 崇尙할 줄 알면서도 眞僞는 알지 못하였으니,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하니 그의 發言을 듣고 李滉을 두 番 불러서 朝廷에 오게 하였다.

이어 庶孼과 學識있는 者들을 採用할 것을 建議하였다.

'宣祖(先朝)에 庶孼(庶孼) 이중호(李仲虎)ㆍ張潤(張崙)이라는 사람이 있어 學行(學行)으로 이름이 나서 追從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只今 朴兄(朴泂)은 ≪小學(小學)≫을 가르치고 있어 그 무리가 늘 數百 名에 이르는데, 推薦으로 童蒙 訓導(童蒙訓導)가 되었으나 考試(考試)에 나오지 않았다는 理由로 成績이 最下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心力을 다하여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니, 이중호와 장윤의 前例에 따라 錄用하소서.'

1568年(宣祖 1) 鎭下府使(進賀副使)로 明나라에 다녀와 大司諫에 올라 鄕約(鄕約)의 施行을 建議하였다. 鎭下府使로 年庚 에 갔을 때 明나라 商人으로부터 ≪독서록(讀書錄)≫를 購入하여 와서 宣祖 에게 올렸으며, 宣祖의 特命으로 이를 印刷하여 頒布하였다. 1569年 弘文館 副提學, 司諫院 大司諫을 지냈다.

그는 妻家인 江原道 江陵 에서 나는 特異한 맛의 샘물로 豆腐를 담가서 먹었는데, 그 맛이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許曄은 그 豆腐를 商品化하였고 이는 초당豆腐 의 起源이 되었다. 그러나 선비로서 장사를 한다는 消息이 朝廷에 알려지자 그는 攻擊의 對象이 되었다.

宣祖 卽位 初 新進 士類의 한사람인 栗谷 李珥 의 거침없는 發言과 批判에 厭症을 느낀 사람 中에는 許曄度 있었다. 元老大臣들 中 許曄과 이준경 等은 栗谷 李珥를 禮節과 根本도 모르는 人間이라고 憤을 터뜨렸다. [1] 栗谷 李珥가 徐敬德은 道에 치우쳤다는 批判을 하고, 李滉의 理氣二元論을 正面 否定하여 理氣一元論을 主張하자 그는 栗谷 李珥를 極度로 嫌惡하게 되었다.

同人 入黨과 慶尙監司 在職 [ 編輯 ]

1573年(宣祖 6年) 다시 成均館 大司成이 되었을 때 宣祖가 宗親들을 만난 일을 承政院에 알리지 않은 事實을 問題삼아 指摘하였다. 周邊에서 놀랐으나 그는 繼續 王이 承政院에 알리지 않은 것을 繼續 追窮한다.

1575年 (宣祖 7年) 다시 司諫院 大司諫이 되었다. 그해 上典을 죽인 奴婢를 下獄(下獄)시켜 鞠問하던 中 그가 위館(委官)의 審問 方式을 問題삼아 彈劾하여 論難이 되자 바로 遞職되었다.

1575年 同人과 西人 사이에 黨爭이 일어났을 때 김효원 , 理髮 等과 함께 同人의 指導者로서 活躍하였다. 그는 한때 李滉의 門下에서 受學한 緣故가 있었고 徐敬德의 다른 文人들도 大部分 同人 이 되었으므로 그 亦是 同人에 加擔하여 西人 攻擊의 先鋒將으로 活躍하였다. 朴淳 과는 同門이었으나 黨派가 서로 달라지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이어 副提學 (副提學), 慶州 府尹(慶州府尹)을 거쳐 1579年 5月 慶尙道 觀察使 兼 病魔水軍節度使(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謙 任命되었으나 病으로 辭退하였다. 慶尙道觀察使로 在職 中 김정국 이 撰修한 《警民編(警民編)》을 補充便수, 中間하는데 參與하였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 編纂에도 參與하였다.

또한 《警民編(警民編)》에 빠진 ‘群像(君上)’ 한 條項을 補充하여 넣어서 數千 本을 印刷하여 各 郡縣과 閭巷(閭巷)에 配布하고 또 큰 고을들로 하여금 ≪三綱行實圖(三綱行實圖)≫와 ≪二倫行實圖(二倫行實圖)≫를 自體 印刷, 펴내게 하였으며, 道內 各 郡縣들을 巡視하며 文廟 를 謁見(謁見)하고 諸生(諸生)들에게 廩料(?料)를 주며 반드시 學問하는 方向을 써서 보였다. 또한 沙松(詞訟)을 嚴格하게 判決하고 犯罪의 巢窟을 剔抉하였다. 이어 나쁜 舊習을 함께 除去하였으며, 이때 流言蜚語가 크게 일어났으나 介意하지 않았다.

隱退와 最後 [ 編輯 ]

1579年 9月 風疾患으로 辭退 上疏를 올렸으나 返戾되었다. 1580年 初에 다시 辭職上疏를 올려 慶尙道觀察使에서 免職되고 同知中樞府事로 轉任되었다. 그 뒤 旅行을 다녀오던 中 1580年 (宣祖 12年) 2月 4日 慶尙北道 尙州 (尙州)의 한 客觀(客館)에서 客死하였다. 享年 63歲였다.

著書로는 《초당집 (草堂集)》 《전언왕행록 (前言往行錄)》 等이 있다.

事後 [ 編輯 ]

京畿道 시흥군 에 安葬되었다. 墓碑文은 노수신 이 지었고, 글씨는 韓石峯 이 썼다. 神道碑 門은 남응운(南應雲)李 썼다. 許曄은 生前 글을 잘 지어 長男 許筬 (許筬)과 次男 許篈(許?), 三南 許筠 (許筠), 딸 난설헌(蘭雪軒) 허초희 와 함께 明나라와 日本 에도 잘 알려지게 된다.

도산書院의 建立을 支援하였고 鄕約(鄕約)의 實施를 建議하는 等 朱子學의 普及에 힘쓰기도 했다. 일찍이 김정국 이 엮은 《警民編》을 補充하기도 하였으며 《三綱五倫行實》의 編纂에도 參與하였다. 淸白吏에 登錄되었고, 開城 화곡서원(花谷書院)에 祭享되었다.

1968年 墓所가 始興 에서 龍仁郡 원삼면 맹리의 家族墓所로 移葬되었다.

年譜 [ 編輯 ]

  • 1517年 12月 29日 出生
  • 1546年 式年文科에 甲科로 及第
  • 1553年 賜暇讀書(賜暇讀書)
  • 1553年 司憲府掌令으로 在職 中 財物을 貪한 罪로 罷職
  • 1559年 世子侍講院弼善(世子侍講院弼善)
  • 1560年 大司成
  • 1562年 同副承旨(同副承旨)로 參贊官(參贊官)이 되었다가 허자, 구수담의 無罪를 論한 事件으로 罷職
  • 1563年 三陟府使로 敍用되었다가 過激한 發言을 했다가 問題되어 罷職
  • 1563年 다시 復職되었으나, 이량 , 移監 等의 權臣들과 갈등하다가 罷職, 곧 復職되다
  • 1568年 鎭下使節로 明나라에 다녀와서 鄕約 의 設置와 施行을 建議
  • 1575年 乙亥黨論 詩 同人에 加擔
  • 1575年 副提學, 慶州 府尹
  • 1575年 5月 慶尙道觀察使
  • 1579年 9月 辭職上疏를 올렸으나 返戾됨
  • 1580年 初 慶尙道觀察使를 辭職, 同知中樞府事로 前任
  • 1580年 2月 4日 尙州 客觀에서 客舍

家族 關係 [ 編輯 ]

  • 高祖父 : 虛秋
  • 曾祖父 : 許昌
  • 曾祖母: 洋酒 조氏 (楊州趙氏), 한援軍(漢原君) 朝鮮(趙璿)의 딸
  • 祖父: 虛談(許聃), 금화사 別除 增 吏曹參判(禁火司別提 贈 吏曹參判)
  • 조某: 坡平 尹氏 (坡平尹氏), 윤계겸(尹繼謙)의 딸
  • 아버지: 虛한(許澣, ? - 1532年 軍資監 副奉事 增 吏曹參判)
  • 어머니: 昌寧 姓氏 (昌寧成氏, ? - 1554年 ), 돈녕부 判官 性戱(成熹)의 딸, 定宗 의 9男 석보군 의 外高孫女 [2]
    • 政府인 : 한李霆 (韓二貞, 1515 ~ ?) - 서평군(西平君) 한숙창 (韓叔昌)의 딸 [3]
      • 長女 : 허묵席(許墨石, 1544 ~ ?)
      • 사위 : 박순원(朴舜元) - 典艦司 別除(典艦司別提) 歷任
      • 次女 : 허대정(許大貞, 1546 ~ ?)
      • 사위 우성전 (禹性傳)
      • 長男 : 許筬 (許筬)
      • 며느리 : 全州 李氏 (全州李氏) - 이국헌(李國憲)의 딸, 子女 없음
      • 며느리 : 宜寧 南氏 (宜寧南氏) - 남언순(南彦純)의 딸, 2男 3女
    • 再娶夫人 政府인 江陵 金氏 (江陵金氏) - 禮曹判書 김광철(金光轍)의 딸, 新羅 明援軍王(溟源郡王) 김주원(金周元)의 後孫
    • 許曄의 高祖父 虛錘의 兄弟 虛費(許扉)의 6代孫이 미수 許穆 이다.

著書 [ 編輯 ]

  • 《초당집 (草堂集)》
  • 《전언왕행록 (前言往行錄)》

評價 [ 編輯 ]

글재주와 文章力이 뛰어나 아들 許筬, 許篈, 許筠, 딸 許蘭雪軒과 함께 許氏 5文章家 로 名聲을 날렸다. 30年間 官職 生活을 하였으나, 淸廉潔白하여 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러나 異見도 存在한다. 1559年 司憲府 掌令 在職 中 財物을 탐했다는 彈劾을 當하였다. 또한 선비로서 商業에 從事했다는 理由로 非難을 받기도 했다.

對人關係가 좋지 않아 惡評도 存在한다. 許曄에 對해 이이는 自身의 著書 《栗谷집》(栗谷集)에서는 理論이 矛盾된 點이 많고 問議(文義)에 어두웠다고 하였으며 [4] , 그의 스승 中 한사람이기도 한 李滉은 차라리 學識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되었으리라고 慨歎하였다. [4]

기타 [ 編輯 ]

노수성(盧守成)과 벗하였으며 同人 의 强勁派 人士로 活動하였다.

許浚, 허자, 허잠과의 關係 [ 編輯 ]

許浚 , 許磁 , 許穆 , 허적 等은 그의 먼 親族이었는데, 허자, 許穆, 허적 等은 許曄의 高祖父 虛秋(許樞)의 兄 虛費(許?)의 後孫들이었다.

虛費의 3男 허지(許芝)의 孫子 허륜의 庶子가 東醫寶鑑 을 지은 許浚 이다. 虛費의 次男 虛暈(許薰)의 孫子가 許磁이고, 許穆은 5代孫이다. 許磁는 許曄의 아버지 虛한(許澣)과 8寸間이고, 許磁의 曾孫이 許穆이다. 虛費의 넷째 아들 허형의 曾孫이 허잠 이다.

許磁는 9寸, 허잠은 10寸, 許浚은 10寸으로, 10寸 以內를 親族으로 看做하고 12寸, 14村에게도 緣坐制를 適用하는 朝鮮 時代에는 比較的 가까운 親戚에 屬했다.

許曄을 演技한 俳優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明宗實錄
  • 宣祖實錄
  • 국조인물지
  • 國朝人物考
  • 大東野乘
  • 冬油사우록
  • 燃藜室記述
  • 栗谷全書
  • 稽封戰서
  • 小宿執
  • 國朝榜目

各州 [ 編輯 ]

  1. 백완기, <韓國史學에 바란다 - 열린 마음으로 6 栗谷으로부터 敎訓을> 《韓國史市民講座 第37輯》 (일조각, 2005)
  2. 定宗 석보군 → 成熟(成?)의 妻 李氏 → 性猛온(成孟溫) → 性戱(成熹) → 姓氏 夫人
  3. 임영대군 의 外曾孫女
    임영대군 → 換線群 李澄 → 한숙창 의 妻 李氏 → 한李霆
  4. 人名事典編纂委員會, 《人名事典》 (민중서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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