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筬
(許筬,
1548年
~
1612年
)은 朝鮮 中期의 文身이다.
本館
은
陽川
(陽川). 字는 공언(功彦)이며, 號는 악록(岳麓) 또는 産前(山前)으로 불렸다.
[1]
1548年
朝鮮
朝鮮 明宗
3年 父親 秒當
許曄
(許曄)과 첫째 婦人인 韓氏(韓氏)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로
許蘭雪軒
(許蘭雪軒)의 큰 오빠이자
許篈
(許?),
許筠
(許筠)의 배다른 兄弟이다.
우성전
의 妻男이다. 文科에 及第하여 벼슬은
正憲大夫
李朝
板書
에 이르렀고 贈職으로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이 追敍되었다.
1604年
(宣祖 37年)
宣撫
原從功臣
1等(宣武原從功臣一等)에 錄勳되고,
1614年
(光海君 6年)
8月 27日
衛星
原從功臣
1等(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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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日本을 統一한
1590年
에는 倭의 動態를 살피기 위해 朝鮮通信使가 結成되었는데,
1589年
11月 18日
鄭琢을 謝恩使로 差出하고,
황윤길
을 情事,
김성일
을 府使로 許筬을 書狀官으로 差出하여, 이듬해
1590年
3月 6日
對馬島
로 出發하였다.
1591年
1月 28日
日本에서 歸國한 허성은 歸國하자마자 彈劾을 當하여 바로 東來府에 收監되어 義禁府로 押送된다.
[2]
[3]
한便 壬辰倭亂 때는 義兵을 일으켜 倭敵과 싸운 功勞로
1604年
(宣祖 37年) 동생
許筠
과 함께
宣撫
原從功臣
1等(宣武原從功臣一等)에 錄勳되었다.
또한
壬辰倭亂
當時
광해군
을 遂行한 功勞로
1614年
(光海君 6年)
8月 27日
衛星
原從功臣
1等(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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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성의 딸 양천군夫人 許氏는
宣祖
와
인빈 金氏
의 아들
의창군
과 婚姻하였다.
다른 한名의 딸은
홍가신
의 아들
紅纓
과 結婚하였으며 外孫子는 太白5絃인
홍우정
과 判書를 지낸
홍우원
, 淸白吏人
洪優良
이 있다.
- 아버지:
許曄
(許曄)
- 어머니:
淸州 韓氏
(淸州韓氏)
- 누이: 허묵席(許墨石)
- 누이: 허대정(許大貞)
- 繼母:
江陵 金氏
(江陵金氏)
- 異腹 동생:
許篈
(許?)
- 異腹 동생:
許蘭雪軒
(許蘭雪軒)
- 異腹 동생:
許筠
(許筠)
- 初吹 夫人:
全州 李氏
(全州李氏) - 左議政
이헌국
(李憲國)의 딸
- 後娶 夫人:
宜寧 南氏
(宜寧南氏) - 兵士 남언순(南彦純)의 딸
- 아들 : 虛實(許實)
- 아들 : 虛儀(許宜)
- 아들 : 虛報(許)
- 아들 : 許政(許?)
- 딸 : 心兪(沈愉)에게 出家
- 딸 : 紅纓(洪榮)에게 出家
- 딸 : 박홍도(朴弘道)에게 出家
- 딸 :
의창군
(義昌君)에게 出家
評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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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王朝實錄
》에는 그에 對한 좋지 못한 記錄들이 많은데, 《宣祖實錄》 修正 32卷에는 이에 對한 批判을 실어 許筬을 擁護하고 있다.
[4]
양천許氏 5文章이라 불렸으며 外家 兼 生家가 있던 江原道 江陵市 草堂洞에 是非(詩碑)가 있다.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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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書로는 《악록집》(岳麓集)이 있다.
關聯 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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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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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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