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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都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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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漢陽都城
(서울 漢陽都城)
(Hangyangdoseong Capital City Wall)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種目 私的 第10號
( 1963年 1月 21日 指定)
面積 文化財區域 : 22筆地 1,311.15m 2
文化財保護區域 : 95筆地 40,563.47m 2 [1]
時代 朝鮮 初期
住所 서울特別市 鍾路區 누상동 산1-3번지 外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서울 漢陽都城 (서울 漢陽都城, Hangyangdoseong Capital City Wall)은 朝鮮 時代 漢陽 都心部 를 둘러싼 都城 (都城)이다. 좁은 意味로는 都心部 를 둘러싼 城郭 을 指稱하나, 넓은 意味로는 城郭과 그 안의 空間 을 말한다. 朝鮮 時代에는 줄여서 漢城 (漢城)으로 불렸으며, 史跡으로서의 名稱은 指定 當時 서울城郭 (Seoul City Wall)으로 定했다가 2011年 現在의 名稱으로 바뀌었다. [2]

漢陽都城은 1396年 太祖 에 依해 一次的으로 完工되었고, 世宗 , 肅宗 , 順調 時期에 補修 工事를 거쳤다. 日帝强占期 6.25 戰爭 을 거치며 相當한 區間이 毁損되었으나, 1974年 朴正熙 政權 時期부터 復元事業이 進行돼 2013年 基準으로 總길이 18,627m 中 約 70% 區間이 남아 있다. 2012年 11月 23日,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 申請資格이 附與되는 世界遺産 暫定目錄 에 登載되었으나, 2017年 3月 登載 不可 通報를 밟으면서 霧散되었다. [3]

漢陽都城에 該當하는 行政區域 [ 編輯 ]

朝鮮時代 [ 編輯 ]

漢陽都城은 漢陽의 성내(城內) 地域 城底十里 (城底十里) 地域을 가르는 基準이었다.

朝鮮의 首都 漢陽은 計劃都市 로서 1394年 9月에 그 터를 定하고 같은 해 10月부터 宮闕과 官廳, 城郭 等을 建築하였는데, 漢陽都城은 그 中 都心部를 둘러싼 防禦施設로서의 城郭에 該當한다. [4] :96?111

이때 漢陽都城은 首都 漢陽의 境界를 區分짓는 施設이 아니었으며, 首都 漢陽의 範圍는 草創期부터 城郭 內部의 都心 과 城郭으로부터 10리까지의 外部 校外 地域을 모두 包含하는 槪念이었음에 留意할 必要가 있다. 城郭 內部 地域은 城內(城內), 성중(城中) 또는 輕重(京中) 地域으로 불렸으며, 城郭으로부터 10里 內의 外部 郊外地域은 城底十里 (城底十里)라고 불렸다. [5] :90?100

다만 城底十里 地域은 城內 地域과 같이 漢城府 가 直接 管轄하는 地域이었음에도 不拘하고, 居住 人口가 적다는 等의 事情으로 인해 種種 漢城府에 이웃한 京畿道 의 了役(?役) 徵發에 露出되기도 하였다. 城底十里 地域의 居住民들이 漢城府 管轄 地域 居住民으로서의 負擔을 질 뿐만 아니라 이웃恨 京畿道에 對해서도 負擔을 지는 二重的 負擔構造가 完全하게 解消된 것은 1788年 무렵으로, 이때부터 朝鮮은 城底十里 地域이 漢城府가 管轄하는 首都 漢陽 五部 의 一部로서 오직 漢城府에 對해서만 負擔을 진다는 것을 明確히 하였다. [5] :124?130

現況 [ 編輯 ]

漢陽都城에 該當하는 行政區域

行政洞 을 基準으로 할 境遇, 現在 漢陽 都城 內의 行政區域은 鍾路區 8個棟 및 中區 7個棟에 該當한다. 朝鮮時代부터 近代期를 거치면서 城壁을 基準으로 行政洞이 나뉘었다. 消失된 區域에 對해서는 城壁은 남아있지 않아도 地籍圖와 行政洞을 基準으로 城壁의 位置를 正確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東大門 디자인플라자,이화여고, 한양공고一圓에서 過去의 城壁을 넘어 行政區域이 設定된 區域이 손에꼽을만큼 드물게 存在한다.

鍾路區(8個棟) 靑雲孝子洞, 社稷洞, 삼청동, 가회동, 鍾路1·2·3·4街洞, 鍾路 5·6街洞, 梨花洞, 惠化洞

中區(7個棟) 소공동, 회현동, 明洞, 필동, 奬忠洞, 광희동, 乙支路桐

綠色交通地域 排出가스 5等級 車輛 運行制限 [ 編輯 ]

? 運行制限地域 : 綠色交通地域 (漢陽都城 內部) ? 運行制限 對象 : 綠色交通地域에 進入하는 排出가스 5等級 車輛(全國)

歷史 [ 編輯 ]

築城과 個數 [ 編輯 ]

時代別 築城 技法을 說明하는 標識板 (2015年)

1395年 ( 太祖 4年) 漢陽(只今의 서울)을 防衛하기 위한 都城을 쌓으려고 都城築造圖鑑(都城築造都監)을 設置하고 정도전 에게 命하여 城터의 調査 測定을 實施하였다. [6] 이듬해 陰曆 1月 9日 全國에서 徵發한 壯丁 11萬 8千 7百餘 名을 動員하여 築城을 始作하였는데, 길이가 9970報(步 : 1步는 6字)이고 높이가 40字 2치인 都城을 97區間으로 나누어 各 區間마다 千字文 에 따른 番號를 하늘 天(天) 者부터 弔喪할 兆(弔) 字까지 붙였다. [7] 前後 98日 만에 北岳山 · 駱山 · 南山 · 仁王山 을 따라 城壁의 築造를 完了하였다. [8]

1396年 (太祖 5年) 陰曆 9月 24日 城門을 모두 完成하였다. 正北(正北)쪽에는 肅淸門 (肅淸門), 東北(東北)쪽에는 弘化門 (弘化門), 貞洞(正東)쪽에는 興仁門 (興仁門), 東南(東南)쪽에는 光熙門 (光熙門), 正南(正南)쪽에는 崇禮門 (崇禮門), 小북(小北)쪽에는 昭德門 (昭德門), 情緖(正西)쪽에는 敦義門 (敦義門), 西北(西北)쪽에는 彰義門 (彰義門)을 두었으며, 水門 1沼(所)를 두었다. [週 1] [9]

1422年 ( 世宗 4年)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等 奉足(奉足)과 雜色(雜色) 32萬 2千 4百 名을 動員하여 38日 만에 大大的으로 城郭을 고쳤다. 1451年 ( 文宗 1年)에도 性을 고쳤지만 壬辰倭亂 때 一部가 부서졌다. 1616年 ( 광해군 8年)에 改修하였으나 丙子胡亂 때 다시 부서졌다. 丙子胡亂 때 淸나라와 맺은 約條 中에 城壁을 쌓지 않고 補修도 하지 않는다는 條項이 있어 부서진 채로 放置되다가, 1704年 ( 肅宗 30年) 吏曹判書 理由(李儒)의 主張으로 5軍門(五軍門)의 章程을 動員하여 1711年 (肅宗 37)까지 修築하였으며, 1743年 ( 英祖 19年)에 다시 고쳤다. 그밖에도 孝宗·玄宗·英祖·純祖 時代에 部分的인 個數를 行했으나 現在 남아 있는 서울의 城郭은 大體로 太祖·世宗·肅宗·純祖 때의 것이다. [週 2]

太祖 時期에 지어진 性은 自然石을 거칠게 갈아서 使用하였으며, 아래쪽은 큰 돌을 使用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築成하였다. 世宗 時期에 지어진 性은 좀더 直四角形의 모습을 띠고 있으나, 돌과 돌을 갈아 자연스럽게 이으려 하였다. 肅宗 또는 順調 時期에는 直四角形으로 돌을 잘라서 築成하였다.

撤去와 復元 [ 編輯 ]

1907年 ( 高宗 44年) 6月 에는 이완용 等의 主張에 依하여 都城을 撤去하기로 定하였고 [10] , 이를 위하여 같은 해 7月 30日 에 城壁處理委員會를 마련하였다. [11] 1907年 9月 부터 崇禮門의 北쪽 城壁을 撤去하고 남지를 埋立하였으며, 1908年 3月 에는 興仁之門의 左右 城壁을 헐었다. [12] 이는 戰車 線路의 敷設과 關聯되어 있었다. 또 1908年 9月에는 昭義門과 崇禮門 左右의 城壁 總 77間을 破壞하였다. [13]

日帝强占期 의 都市計劃과 韓國 戰爭 으로 城門과 城壁이 많이 破壞되었다. 西大門과 청량리 사이의 電車를 敷設하면서 西大門과 東大門의 一部를 헐어내었고, 光化門과 龍山 사이의 電車를 敷設하면서 崇禮門 附近을 亦是 헐어내었다. 日帝 强占期에는 酸性을 除外한 平地에 있던 城郭은 모두 헐리어 現在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하지만 最近 6.25戰爭 때에도 平地의 都城이 남이 있었다는 寫眞이 登場하였다. [ 出處 必要 ]

1974年 朴正熙 大統領 의 國防 遺跡 保存 및 整備 指示에 따라 구자춘 서울特別市長이 本格的으로 復元事業을 始作하였다. 1975年 光熙門 門樓 復元을 始作으로 毁損된 體性과 餘張 復元, 周邊 家屋 買入 等이 持續的으로 이루어졌다. 1975年부터 삼청地球(彰義門~肅靖門) 復元에 이어 2012年 9月까지 進行된 仁王山 頂上 區間까지 總 길이 18,627m 中 69%인 12,771m의 復元作業이 完了되었다. 2013年 5月 4日 崇禮門 復舊 記念式과 함께 崇禮門 남東側 廣場區間 城壁 復元까지 마무리되었으며, 앞으로 南山 區間, 市場公館 區間이 追加로 復元될 豫定이다. [14]

世界文化遺産 暫定目錄 登載 [ 編輯 ]

2012年 11月 23日, 서울漢陽都城이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 暫定目錄에 登載되었다. 世界現存首都 中 最長期間인 514年(1396~1910) 동안 都城 役割을 遂行하였고, 內私産의 稜線을 따라 自然親和的으로 築造된 點 等이 世界遺産的 價値로 評價받았다. 暫定目錄에 오르면 1年 뒤부터 世界遺産 登載申請 資格이 附與된다. [15]

漢陽都城은 UNESCO 登載基準의 다음 項目에 符合한다. [16]

(2) 오랜 時間 동안 또는 世界의 一定 文化地域 內에서 일어난 建築, 技術, 紀念碑的 藝術, 都市計劃 또는 造景 디자인의 發展에 있어 人間 價値의 重要한 交流를 보여주어야 한다.
(3) 文化的 傳統 또는 現存하거나 이미 사라진 文明의 獨步的이거나 적어도 特出한 證據가 되어야 한다.
(4) 人類 歷史의 重要한 段階들을 例證하는 建造物의 類型, 建築的 또는 技術的 總體, 景觀의 卓越한 事例여야 한다.
(6) 事件이나 살아있는 傳統, 思想이나 新潮, 뛰어난 普遍性이 卓越한 藝術 및 文學 作品과 直接 또는 可視的으로 聯關되어야 한다. [17]

UNESCO 登載基準에 비춘 漢陽都城의 主要 價値는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서울漢陽都城은 平壤城과 開京都城의 延長線上에서 獨創的인 韓國式 都城 形式을 갖춘다. 平地城과 酸性의 構造가 結合된 砲穀食 城郭이며, 그 內部에 宮闕, 宗廟, 辭職, 行政施設, 市場施設 및 住居地를 包含하고 있는 大規模의 都城遺産이다. (2)
둘째, 築造 當時 朝鮮時代 都城 形式의 門樓와 城郭의 原形이 잘 남아 있다. 現存하는 世界首都의 城郭遺産 中 全體 길이가 18.627km로 規模가 가장 크며, 現在 10.8km의 區間이 圓形 또는 復元된 狀態로 保存되어 있다. 各 時期別로 築造 形態와 修理技術의 歷史的 證據가 記錄과 함께 實物과 遺跡으로 남아있다. (3)
셋째, 韓半島의 地形 體系를 考慮해 立地가 決定됐다. 內私産의 稜線을 따라 石材로 築造된 城郭의 안쪽에 板築層을 造成하는 等 地形과 一體化된 築造 技術을 보여주는 特別한 城郭 類型이다. 城郭은 自然的인 地勢를 따라 地形을 잘 活用하면서 築造되었기 때문에, 內私産의 屈曲과 都城의 안팎이 함께 조망되는 뛰어난 歷史都市景觀을 보여준다. (4)
넷째, 全國 各 地域 百姓들의 共譯으로 城郭을 築造해, 區間마다 擔當 丈人의 實名이 새겨져 있다. 朝鮮王朝 五百年 동안 門樓와 城郭을 主題로 執筆한 文學作品과 都城風景을 描寫한 繪畫作品이 많이 남아 있다. (6)

探訪 區間 [ 編輯 ]

漢陽都城의 探訪 區間은 서울特別市의 分類에 따르면 아래의 6區間으로 나뉜다. [18]

區間名 主要區間 거리 所要時間
白堊區間 彰義門-彰義門 案內所-백악 돌고래 쉼터-백악 쉼터-白堊마루-1·21 事態 소나무-청운대-暗門-백악 谷城-백악 촛臺바위-肅靖門-말바위 案內所-우수조亡命소-와룡공원-暗門-서울科學高等學校-更新高等學校-彗星敎會-斗山빌라-區 서울市長公館-惠化門 4.7km 約 3時間
駱山區間 惠化門-한성대入口驛 4番出口- 階段-가톨릭대학 뒷길-長壽마을-暗門-낙산公園 놀이마당-이화마을-漢陽都城博物館(서울디자인志願센터)-東大門城郭公園-興仁之門 2.1km 約 1時間
興仁之門區間 興仁之門-오간수문 터-離間水門-東大門歷史文化公園(옛 東大門運動場 터)-東大門歷史館-光熙門-白狗 컴퓨터 크리닝-天主敎 新堂洞敎會-장충체육관 1.8km 約 1時間
南山(木覓山)區間 장충체육관-장충체육관 뒷길(都城 바깥·안쪽 길)-우수조亡命소(용산구 方向)-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國立劇場-나무階段길-南山公園 停留場-N서울타워-南山 八角亭-木覓山 烽燧臺 터-南山 케이블카 乘降場-잠두봉 捕討아일랜드-南山會賢자락 發掘現場-安重根 義士 記念館-白凡廣場 4.2km 約 3時間
崇禮門區間 白凡廣場-南大門市場-崇禮門-남지 터-對韓·서울商工會議所-昭義門 터-배재學堂同官·배재公園-정동교회-李花女子高等學校-敦義門 터 1.8km 約 1時間
仁王山區間 敦義門 터-京橋莊-月癌近隣公園-홍파동 홍난파 家屋-便宜店(舊 옥경이食品)-暗門-仁王山 谷城-仁王山 범바위-仁王山 頂上-尹東柱 詩人의 언덕-彰義門 4km 約 2時間 30分

白堊區間 [ 編輯 ]

漢陽都城 地圖

彰義門 부터 와룡공원 까지는 1968年 1.21 事態 가 일어나며 靑瓦臺 의 保安을 위하여 一般人의 出入을 統制하였는데, 1993年에는 彰義門이 開放되었다. [19] 以後 2006年 4月 1日에는 紅蓮社 에서 촛臺바위 까지가 開放되었고 [20] , 2007年 4月 5日에는 나머지 區間인 촛臺바위에서 倡義文까지가 公開되었다. [21] 彰義門에서 말바위까지 區間은 夏節期(3月~10月)에 午前 9時부터 午後 4時까지, 冬節期(11月~2月)에 午前 10時부터 午後 3時까지 立場을 制限한다. [22] 이 區間은 指定된 場所에서만 撮影이 可能하며, 身分證 原本을 持參하여야 出入할 수 있다. [週 3]

彰義門에서 肅靖門까지 2570m 區間 가운데 一部를 삼청地區로 指定하여 1975年 9月 18日부터 1976年 10月 21日까지 城郭 1994m와 餘張 1403m를 解體·復元하였고, 肅靖門 에서 惠化門 까지 1429m의 城郭을 城北地區로 指定하여 1976年 10月 4日부터 1978年 3月 20日까지 補修함과 同時에 一帶 建物을 整備하였다. [23] 경신중 · 高等學校 東쪽 담牆의 150m假量은 그 아랫部分이 城郭이다. [24] 혜화로6가길 43의 單獨住宅 담牆 아래에 城郭이 2~3段假量 남아 있는데, 一部分異 城郭의 方向과 一致하지 않아 집을 지을 때 옮겨 쌓은 것으로 보인다. [25] 혜화로6길 72의 單獨住宅 담牆 앞뒤의 階段 쪽으로도 一部 殘存한다. [25] 城郭은 本格的으로 昌慶宮로35나길 50의 '斗山빌라'부터 나타나며 [26] , 옛 서울市長 公館 담牆은 餘張이 消失된 城郭이다. [27]

駱山區間 [ 編輯 ]

2008年 末 頃에는 삼선동 一帶의 城郭 外壁을 따라 探訪路가 造成되었다. [28] 2011年 1月 11日에는 駱山 北쪽 昌慶宮로 와 連結되는 部分에 7m 高度差를 克服하는 階段을 包含하여 67m 區間이 追加로 開通되었다. [29] 한便, 낙산公園 頂上 一帶에는 軍 施設, 배드민턴場, 老人亭이 城郭과 맞대고 있다. [30]

1979年 6月 1日부터 1980年 8月 12日까지 惠化門 부터 駱山 頂上까지 城郭 1037m와 餘張 1033m를 三線地區로 定하여 復元하였다. [23] 또 駱山 頂上에서부터 興仁之門 까지 城郭·餘張 1051m를 동숭地區로 指定하여, 1980年 9月 30日부터 이듬해 8月 1日까지 543m의 城郭을 補修하였고, 1981年 9月 19日부터 이듬해 6月 16日까지 殘餘 區間인 城郭 508m와 餘張 520.5m를 復元하며 2個의 暗門을 開設하였다. [31]

興仁之門區間 [ 編輯 ]

서울 城郭과 興仁之門

오간수문은 基壇部가 發掘되었으나 復元되지 않았고, 縮小 模型이 오간수교 옆에 만들어져 있다. 2008年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를 짓기 위한 發掘 調査 中에 滅失된 것으로 推定되었던 離間水門과 一帶 城郭이 드러났다. [32] 2009年 10月에 離間水門과 雉城 1個를 包含하여 發掘된 142m를 復元하고, 滅失된 123m는 돌을 쌓아 城郭임을 드러내 公開하였다. [33] 退溪路 347의 建物 오른쪽에 城郭 一部가 남아 있다. [34] 光熙門 南쪽 城郭은 광희地區로 指定되어 1976年 11月 22日부터 이듬해 2月 28日까지 女裝을 復元하였으며 [31] , 2004年頃 補修 工事가 進行되었다. [35] 奬忠壇로8길 38-15와 奬忠壇로8길 54 사이에는 城郭 一部가 담牆으로 쓰인다. [36] 그 外 奬忠洞 一帶의 城郭은 大邸宅 마당 아래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 [37]

1752年 11月 御營廳 홍봉한 淸溪川 을 파내고 雉城 을 築造하자고 建議하였다. [38] 다음달에는 右議政 김상로 의 主張에 따라 興仁門과 光熙門 사이에 雉城 5個를 쌓기로 定하였다. [39] 이듬해 5月 24日에는 雉城 築造를 끝마쳐 洪鳳漢에게 賞을 내렸다. [40] 그런데 實際 光熙門 北쪽에 位置한 致誠은 4個였던 것으로 보인다. [41] 興仁之門 南쪽과 淸溪川 사이에 1個, 청계천과 DDP 사이에 1個, DDP 안에 1個, 한양공고 자리에 1個가 있었고, 光熙門 南쪽에도 1個가 있었다. [42] 이 가운데 청계천 北쪽에 있던 致誠은 1907年 오간수문을 헐며 같이 撤去되었다. [42]

南山(木覓山)區間 [ 編輯 ]

2011年 1月 11日에는 新羅호텔, 서울클럽(110m), 民主平和統一諮問協議處(130m)를 지나는 城郭 안쪽 探訪路 1090m가 開放되었다. [29] 또 반얀트리클럽호텔(옛 타워호텔) 內部 區間에는 城郭이 없으나, 같은 달 末 호텔에서 造成한 450m 區間 探訪路가 열렸다. [43] 타워호텔 쪽의 城郭은 김수근 이 設計한 自由센터(現 南山제이그랜하우스)를 建設할 때 建物의 築臺로 옮겨 使用하였다.

장충체육관에서 南山 東쪽까지 1053m를 장충地區로 指定하고, 南山 一帶 1639m를 南山地區로 指定하여, 1977年 10月 4日부터 1978年 12月 31日까지 城壁과 女裝을 復元하였다. [31] 2010年 7月 29日에는 兒童廣場 附近 84m의 城郭과 本來 地形이 復元되었다. [44] 2012年 6月 9日에는 白凡廣場 附近 239m의 城郭과 地形이 復元되었다. [45] 2014年 8月에는 189m의 城郭과 內字育百尺(柰字六百尺) 各自, 조선신궁 倍前의 콘크리트 基礎部가 함께 發掘되었다. [46]

崇禮門區間 [ 編輯 ]

大韓商工會議所 西쪽 담牆은 發掘된 漢陽都城 週初 바로 위에 2005年 새로 쌓은 都城이지만 [47] , 餘張이 復元되지 않아 單純한 담牆으로 보인다. [48] 復元된 城郭은 世宗大路9길 41의 빌딩 담牆으로 이어지며, 三星控除會館에도 復元되지는 않았으나 若干 남아 있다. [48] 城郭은 李花女子高等學校 露天劇場의 담牆 아래를 지나며, 實際로 이곳에서는 城郭 돌이 一部 보인다. [49] 창덕女子中學校 담牆에는 '西大門 城壁의 옛터'라는 標識石 뒤로 城郭이 一部 남아 있으며 [50] , 發掘한 結果 消失된 것으로 여겼던 基壇部가 나오기도 하였다. [51] 정동길 8의 漢城敎會 안쪽 아카시아 나무 담牆 밑으로 性돌이 보이는데, 이는 城郭의 進行 方向과 完全히 一致하지는 않아 城郭이 헐린 뒤에 옮겨 쌓은 것으로 推定된다. [52]

仁王山區間 [ 編輯 ]

서울市福祉財團 西쪽 담牆 아래에 城郭이 餘張 없이 남아 있다. [53] 月癌近隣公園 附近 140m는 復元하여 2011年 10月 2日 開放하였다. [54] 송월1길 44-24 稅源빌라부터 송월1길 44-30 洪波빌라까지의 建物 駐車場 뒤便으로는 城郭이 보이는데, 이 區間은 住宅의 築臺로 쓰인다. [55] 仁王山을 오르는 區間은 1.21 事態 以後 統制되었으나, 1993年 民間에 開放하였다.

敦義門 北쪽에서 倡義文까지의 1626m 區間을 靑雲地區로 指定하여, 1977年 12月 26日부터 이듬해 7月 15日까지 203.5m를, 1978年 4月 12日부터 이듬해 6月 30日까지 1242.5m를, 1979年 7月 1日부터 이듬해 4月 30日까지 120m를 復元하였다. [56] 1996年에는 國師堂과 치마바위 사이의 56m 區間을, 이듬해에도 같은 位置의 城郭 中 45m를 補修하였다. [56] 2007年 下半期에는 約 300m 區間이 [57] [58] , 2008年 12月에는 仁王山 頂上 署側의 283m 區間이 [59] , 2009年에는 仁王山 東側의 一部가 [59] , 2010年 12月에는 범바위 一帶 雉城 等이 [60] 次例로 復元되었다.

刻字城石 [ 編輯 ]

刻字城石(刻字城石)은 글字가 새겨진 城郭의 돌을 意味한다. 漢陽都城은 築城(築城)과 個數 當時 千字文 의 글字로 各 地域마다 區間을 나눠 工事하게 하였으며 [7] , 그러한 區間 表示를 都城의 돌에 새겨 놓은 것이다.

沿革 [ 編輯 ]

1395年(太祖 4年)에 城을 쌓은 것은 아래와 같다.

太祖 때의 築城 區間別 票 [7] [61]
始作 漢字 中間 漢字 끝 漢字 始作 區間 끝 區間 擔當 地域
地玄黃宇宙洪荒 北岳山 北西쪽 肅靖門 附近 동북면 [週 4]
盈?辰宿列張 肅靖門 附近 惠化門 附近 江原道
暑往秋收冬藏閏餘成歲律呂調
陽雲騰致雨露結爲霜金生麗水
玉出崑岡劍號巨闕珠稱夜光果
惠化門 附近 漢陽公園 [週 5] 附近 慶尙道
柰菜重芥薑海鹹河淡鱗潛羽翔 漢陽公園 附近 慶熙宮 附近 全羅道
火帝鳥官人皇始制文字乃服衣
裳推位讓國有虞陶唐
慶熙宮 附近 北岳山 北西쪽 서북면 [週 6]

1422年(世宗 4年)에 性을 補修할 때에는, 太祖 때 設定했던 千字文 區間을, 各 道別로 새로이 나누어 割當하였다. 이때 景氣·江原·忠淸道는 “利川(利川)”과 같이 郡縣의 이름만을 새겼고, 全羅道는 “同福始(冬服視)”처럼, 慶尙道는 “河陽始面(하양시면)”처럼 새겼으며, 平安·黃海道는 “龍崗下末熙川上來(龍降下말 희천상래)”와 같이 詳細히 새겼다. [62] 割當한 內譯은 아래와 같다.

世宗 때의 保守 區間別 票 [63]
始作 漢字 中間 漢字 끝 漢字 始作 區間 끝 區間 擔當 地域
地玄黃宇宙洪荒日月盈? 肅靖門 附近 鷹峯 附近 京畿道
宿 (없음) 鷹峯 附近 北關王廟 [週 7] 附近 咸吉道
北關王廟 附近 惠化門 附近 江原道
往秋收冬藏閏餘成 惠化門 附近 駱山 正常 忠淸道
呂調陽雲騰致雨露結爲霜金生 駱山 正常 光熙門 밖 火葬場 附近 全羅道
玉出崑岡劍號巨闕珠稱夜光果
珍李柰菜重芥薑
光熙門 밖 火葬場 附近 漢陽公園 附近 慶尙道
河淡鱗潛羽 漢陽公園 附近 敦義門 附近 平安道
師火帝鳥官人皇始制文字乃服
衣裳推位讓國有虞陶唐
敦義門 附近 北岳山 北西쪽 黃海道

肅宗 때와 그 以後에도 城郭의 保守가 이루어졌으며, 이때에는 城郭 保守 擔當者의 이름을 中心으로 刻字城石이 새겨졌다.

現況 [ 編輯 ]

興仁之門 앞 刻字城石 (2013年)

白堊區間에는 純祖 때의 刻字城石이 눈에 띈다. 北岳山 청운대(靑雲臺, 293m)를 지나는 城郭의 餘張에는 ‘佳境九年 [週 8] 甲子 十月日 敗將 오재민 感官 이동한 變數 龍星輝(嘉慶九年 甲子 十月日 牌將 吳再敏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라고 새겨진 各自가 있다. [64] [65]

駱山區間에는 興仁之門 앞의 刻字城石이 잘 알려져 있다. ‘訓局 策應兼毒驛長 十人 社 한필영 日敗將 折衷 盛世角 이敗將 折衷 김수선 三牌腸 謝過 유제한 席首都變數 오유선 一牌變數 量産號 二牌變數 황승선 三牌變數 金定立 康熙四十五年 [週 9] 四月일改築(訓局 策應兼督役將 十人 使 韓弼榮 一牌將 折衝 成世珏 二牌將 折衝 金守善 三牌將 司果 劉濟漢 石手都邊首 吳有善 一牌邊首 梁山昊 二牌邊首 黃承善 三牌邊首 金廷立 康熙四十五年四月日改築)’이라고 興仁之門과 마주본 面에 새겨져 있었다. [66] 이것은 漢陽都城을 復元하며 城郭 東側面으로 移動하였다가, 2015年 興仁之門 北側 城郭을 復元하며 本來의 位置로 돌아왔다.

南山區間에는 刻字城石이 잘 드러나 있다. 장충체육관부터 반얀트리클럽까지 城郭 바깥쪽에서 보이는 各自를 北쪽부터 次例로 羅列하면 해진시면(海珍始面), 咸安時면(咸安始面), 生者陸百尺(生字六百尺), 宜寧時면(宜寧始面), 慶山市面(慶山始面), 連日詩面(延日始面), 興해시면(興海始面), 순흥時면(順興始面), 하양시면(河陽始面), 機張時면(機張始面), 蔚山市面(蔚山始面), 수자陸百尺(水字六百尺), 例賤視面(醴泉始面), 곤字育百尺(崑字六百尺), 性주시면(星州始面), 善散시면(善山始面)이다. [67] 城郭 돌로 쌓인 반얀트리클럽 本館 建物 後面 築臺에는 檢字育百尺(劍字六百尺) 各自가 [68] , 自由센터 正門 안 築臺에는 强者陸百尺(崗字六百尺) 各自가 [69] , 自由센터 담牆에는 慶州市(慶州始) 各自가 있다. [70] 2014年 8月에는 南山 會賢자락에서 內字育百尺(柰字六百尺) 各自가 發掘되었다. [46] 南小門 터와 南山 頂上 사이에는 ‘盜聽感官 調停員 鴮澤 윤상후 變數 안중리 己丑 [週 10] 八月一機軸(都廳監官 趙廷元 吳澤 尹商厚 邊首 安重里 己丑八月日己丑)’, ‘金盜聽感官 이수지 오유준 石水變數 안중리 京仁 [週 11] 三月京仁(禁都廳監官 李秀枝 吳有俊 石手邊首 安重里 庚寅三月庚寅)’이라는 各自가 있었다고 하나 [66] , 現存 與否는 不確實하다.

巡省 놀이 [ 編輯 ]

朝鮮 時代에는 城郭을 따라 걸으면서 都城 안팎의 風景을 鑑賞하였는데, 이를 ‘巡省’(巡城)이라고 불렀다. 實學者 유득공 은 《 京都雜志 》에서 純性을 “都城을 한 바퀴 빙 돌아서 都城 안팎의 風景을 구경하는 멋있는 놀이”라고 言及하였고, 그의 아들 유본예(1777~1842)는 《 한경智略 》에 “봄과 여름이 되면 漢陽 사람들은 都城을 한 바퀴 돌면서 周邊의 景致를 구경했는데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時間이 걸린다.”라고 적었다. [71] 1901年 京義線 鐵路敷設을 위해 프랑스에서 招聘된 鐵道技師 에밀 부르다레 또한 그의 著書에서 “서울의 이 障壁은 하루 만에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다. 相當히 잘 걷고 山을 잘 타는 사람에게는 아주 興味로운 散策이 된다. 대단한 구경거리로서 非凡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特히 좋은 季節에 소나무와 꽃이 우거진 남山비탈을 따라갈 때, 흠잡을 데 없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구석구석을 즐길 만하다.”라고 하였다. [72]

현대의 ‘純성놀이’의 이름을 딴 行事는 서울特別市와 市民團體 서울KYC의 主催 下에 2011年 9月 24日 ‘하루에 걷는 600年 서울, 純성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始作되었다. 이 行事는 每年 9~10月 實施되고 있다. 또한, 聯合뉴스 미디어랩에서 3次元 인터랙티브 巡省놀이를 할 수 있다.

寫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主
  1. 弘化門은 俗稱 東小門(東小門), 興仁門은 俗稱 東大門(東大門), 光熙門은 俗稱 水口門(水口門), 崇禮門은 俗稱 南大門(南大門), 昭德門은 俗稱 西小門(西小門)이라 하였다. 이 外에 方位가 담긴 이름은 거의 日帝 治下가 될 즈음부터 불리게 된 것이다.
  2. 2016年 들어 交替된 漢陽都城 現場 案內文에도, 現在 남은 서울 漢陽都城은 主로 太祖, 世宗, 肅宗, 純祖 때의 것이라고 說明되어 있다. 肅宗과 純祖 때의 城郭의 特徵에 對하여서는 現在 硏究가 進行되고 있다.
  3. 住民登錄證, 與圈, 運轉免許證 原本만 認定된다. 軍事施設이므로 寫本이나 寫眞,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것도 許容되지 않는다.
  4. 동북면은 咸興 以南의 咸吉道 地域이다.
  5. 漢陽公園은 只今의 南山圖書館, 安重根義士記念館 一帶에 있었던 公園이다.
  6. 서북면은 按酒 以南의 平安道 地域이다.
  7. 北關王廟는 只今의 惠化門 北西쪽, 都城 안에 있던 關羽의 祠堂으로, 1883年 創建하여 1913年에 東關王廟로 倂合하였다.
  8. 佳境 9年은 純祖 4年(1804年)이다.
  9. 康熙 45年은 肅宗 32年(1706年)이다.
  10. 己丑年은 肅宗 35年(1709年)이다.
  11. 庚寅年은 肅宗 36年(1710年)이다.
參照週
  1. 文化財廳考試制2015-113號, 《「서울 漢陽都城」 私的 追加指定 告示》, 文化財廳長, 大韓民國 官報 第18643號, 79面, 2015-11-23
  2. 大韓民國館步 文化財廳 告示 第2011-116號, 《國家指定文化財(私的) 指定名稱 變更 및 指定·解除 告示》, 文化財廳長, 大韓民國 官報 第17560號 392面, 2011-07-28
  3. 손효림 (2017年 3月 22日). “漢陽都城, 유네스코 世界遺産 登載 아쉽게 不發” . 《東亞日報》 . 2017年 5月 6日에 確認함 .  
  4. 金, 記號; 金, 雄豪; 廉, 복규; 金, 영심; 金, 도연; 有, 繩戱; 朴, 준형 (2021年 11月 30日). 《서울都市計劃社 1 現代 以前의 都市計劃 (서울歷史叢書 12)》 . Seoul: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ISBN   9791160711301 .  
  5. 金, 警錄; 有, 繩戱; 金, 경태; 이, 현진; 政, 은주; 崔, 진아; 이, 民友; 陳, 윤정 (2019年 6月 3日). 《朝鮮時代 다스림으로 본 城底十里 (서울歷史重點硏究 5)》 . Seoul: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ISBN   9791160710670 .  
  6. 《太祖實錄》 太祖 8卷 4年 尹9月 13日, 都城 造築 圖鑑을 設置하고 그 職制를 定하다. 鄭道傳에게 性 쌓을 자리를 定하게 하다. 國史編纂委員會
  7. 《太祖實錄》 太祖 9卷 5年 1月 9日, 民政 11萬 8千 70餘 名을 徵發하여 都城을 쌓게 하다. 都城의 工事 區域 測量과 作業 區域 割當. 國史編纂委員會
  8. 《太祖實錄》 太祖 9卷 5年 2月 28日, 性 쌓는 役夫를 돌려보내다. 都城의 規模. 國史編纂委員會
  9. 《太祖實錄》 10卷 5年 9月 24日, 性 쌓는 일이 끝나자 人夫들을 돌려 보내다. 各 門의 이름. 國史編纂委員會 , 위키文獻
  10. 《고종실록》 48卷 44年 6月 22日, 李完用 等이 나머지 城壁을 헐어버릴 것을 아뢰다. 國史編纂委員會
  11. 《順從實錄》 1卷 卽位年 7月 30日, 城壁 處理 委員會에 對한 것을 公布하다. 國史編纂委員會
  12. 김도형 2010 , 223-224쪽.
  13. 김도형 2010 , 225쪽.
  14. 서울特別市(2013) 서울 漢陽都城 市民順星官 현장순性 資料集 2013.4.20
  15. 박태정 (2012年 12月 4日). ' 서울 漢陽都城' 世界遺産 暫定目錄에 올라” . 《뉴스1》 . 2016年 11月 28日에 確認함 .  
  16. 以下 內容은, 송인호(2013) ‘서울 漢陽都城의 眞情性과 完全性’ 發題文 部分을 拔萃하여 編輯한 것이다. 이는 서울特別市 漢陽都城都監에서 發刊한 ‘서울 漢陽都城의 歷史와 價値’ 모음집에 收錄되어 있다. 서울市立大學校 송인호 敎授는 서울學硏究所 所長 兼 이코모스 (ICOMOS) 코리아 事務總長을 지내고 있으며, 이코모스는 유네스코 公式諮問機構로서 유네스코 登載를 위한 審議 및 硏究를 補助한다.
  17. Operational Guidelines for the Implementation of World Heritage Convention(2008) 2-D-77
  18. 서울漢陽都城 巡省案內 全體區間
  19. 반병희 (1993年 9月 2日). “紫霞門 26年만에 一般公開” . 《東亞日報》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20. 윤중식 (2006年 3月 19日). “’서울이 품 안 가득’ 미리 가 본 北岳山 紅蓮社∼彰義門” . 《쿠키뉴스》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21. 김태식 (2007年 4月 5日). “北岳山 40年 만에 全面 開放” . 《聯合뉴스》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22. “北岳山 漢陽都城 探訪案內 開放時間” . 2015年 11月 2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23. 나각순 2004 , 283쪽 .
  24. 오진희 (2013年 5月 15日). “移徙準備하는 경신중·高 담牆밑 城郭 옛모습 찾을까” . 《아시아經濟》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25. 김도형 2010 , 17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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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최수문 (2015年 10月 25日). “[歷史의 香氣] <12> 옛 서울市長 公館” . 《서울經濟》 . 2016年 11月 28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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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임경아 (2010年 1月 13日). “서울城郭 곳곳 毁損 深刻” . 《MBC뉴스》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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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김태식 (2008年 11月 20日). “東大門運動場 離間水門 全貌 드러내” . 《聯合뉴스》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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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유영호 (2014年 11月 27日). “서울城郭과 '奬忠壇' 깔고 앉은 大邸宅, 그리고 反共·親日” . 《統一뉴스》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38. 《英祖實錄》 英祖 78卷 28年 11月 28日, 어영 大將 洪鳳漢이 都城 안의 개川을 波高 城을 築造해야 한다고 請하다
  39. 《英祖實錄》 英祖 78卷 28年 12月 3日, 大臣들과 城을 築造하는 일을 議論하다
  40. 《英祖實錄》 英祖 79卷 29年 5月 24日, 左議政 이천보 等이 親히 비를 빌겠다는 命을 停止할 것을 請하다
  41. 김도형 2010 , 243쪽.
  42. 김도형 2010 , 244쪽 .
  43. 이윤정 (2011年 1月 12日). “서울城郭 장충동 南山 探訪路 開通” . 《京鄕新聞》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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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김도형 2010 , 6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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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김태식 (2010年 10月 19日). “貞洞 창덕여중 地下서 서울城郭 基礎 確認” . 《聯合뉴스》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52. 김도형 2010 , 8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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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손대선 (2011年 10月 2日). ' 朝鮮時代 城郭變遷史를 한눈에… ' . 《뉴시스》 . 2015年 11月 8日에 確認함 .  
  55. 김도형 2010 ,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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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최진연 (2011年 1月 2日). “´가장 完璧한 雉城´ 仁王山 城壁 復元하다” . 《데일리안》 . 2016年 1月 10日에 確認함 .  
  61. 강명관 2009 , 86쪽.
  62. 강명관 2009 , 107쪽.
  63. 강명관 2009 , 102-106쪽.
  64. 강명관 2009 , 136쪽.
  65. 유홍준 ; 박상진 (2007). 《國民의 품으로 돌아온 北岳山 서울城郭》. 大田: 文化財廳. 16-17쪽. ISBN   9788985764582 .  
  66. 강명관 2009 , 133-134쪽 .
  67. 김도형 2010 , 272-273쪽.
  68. 김도형 2010 , 263-264쪽.
  69. 김도형 2010 , 270쪽.
  70. 김도형 2010 , 271쪽.
  71. 김도형 2010 ,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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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 編輯 ]

  • 강명관 (2009). 《사라진 서울》. 서울: 푸른역사. ISBN   9788994079066 .
  • 김도형 (2010). 《巡省의 즐거움》. 京畿: 효형출판. ISBN   9788958720966 .
  • 나각순 (2004). 《서울의 城郭》. 서울: 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ISBN   9791160710199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