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城條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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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城條約 (漢城條約, 日本語 : 日朝 漢城?約 )은 1885年 1月 9日 (1884年 陰曆 11月 24日 ) 朝鮮 漢城府 에서 朝鮮側 代表 議政府 左議政 김홍집 外 朝鮮側 代表團과 日本 帝國 外務部 代身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 外 日本 側 代表團이 朝鮮 日本 甲申政變 의 事後 處理 및 補償에 對해 締結한 條約 이다.

1884年 (高宗 21年) 12月 末부터 朝鮮은 日本의 甲申政變 介入을 追窮하고 김옥균 等을 내놓을 것을 要求했다가, 逆으로 日本 이 朝鮮 政府에게 日本 政府에 對한 謝過를 表明하고, 犧牲者와 各種 被害에 對한 補償金 10萬 원을 支拂하고, 漢城에 日本 公使館을 새로 建築하는 費用을 負擔할 것을 要求하였다. 1884年 12月 末부터 여러 次例의 交涉과 會談 끝에 1885年 1月 9日 에 妥結되었다,

背景 [ 編輯 ]

經緯 [ 編輯 ]

1884年(高宗 21) 12月 4日 박영효 , 김옥균 , 홍영식 , 서광범 , 서재필 等 急進 開化派 가 宮闕을 掌握하고 皇后 殺害를 目的으로 甲申政變을 일으켰다가 靑나라 軍隊가 出動하여 日本 帝國 의 陸軍을 殲滅하였다. 甲申政變이 失敗하고 開化派가 日本 帝國으로 亡命하자, 排日感情으로 興奮한 民衆이 漢城府에 있는 日本 公使館을 불태우고 公使館의 書記官들과 日本 居留民을 죽였다.

甲申政變을 淸나라 軍의 도움으로 鎭壓한 민씨政權은 1884年 11月 禮曹 參判 서상우 (徐相雨)를 特次全權大臣으로 任命, 日本에 보내 日本 側이 政變에 關與 乃至는 支援한 事實을 問責하는 한便 日本으로 亡命한 김옥균 (金玉均)의 送還을 要求했다. [1] 朝鮮 側의 問責이 繼續되자, 日本에서는 오히려 甲申政變 直後, 日本公使館이 불타고 公使館 書記官 等이 살해당한 것을 理由로 朝鮮에 逆問責을 加해 왔다. 日本 政府는 日本 領事館의 被害와 責任을 朝鮮에게 要求하였다.

交涉 過程 [ 編輯 ]

서상우 는 2個月間 머물면서 日本 에 亡命中인 김옥균 , 박영효 等의 逮捕 送還을 交涉했다. [2] 그러나 日本 政府는 政治 亡命客을 送還하는 法은 없다며 맞섰다.

朝鮮 政府의 追窮에 對해 日本은 公使館이 불타고 職員과 居留民이 犧牲된 事實에 對한 責任을 朝鮮政府에 묻는 한便, 壬午軍亂 으로 殺害된 日本人 居留民 40餘 名에 對한 謝過와 賠償까지 要求하였다. 이어 朝鮮 政府의 謝罪와 公使館 燒却에 對한 賠償金 支拂, 犧牲者에 對한 救恤金 支給을 要求하였다.

條約 締結 過程 [ 編輯 ]

12月 日本 은 甲申政變 直後 日本으로 避身했던 駐韓 日本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 를 다시 朝鮮 으로 派遣하여 會談을 하였다. 朝鮮 側 會談 代表인 全權大使 外務督辦 조병호 (趙秉鎬)와 接觸했으나 朝鮮 政府에서는 日本側의 要求를 모두 拒絶했다.

1884年 12月 末에서 이듬해 1月 初(1884年 陰曆 11月)에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 全權大臣에게 2個 大隊의 兵力을 주어 朝鮮에 派遣하여, 1885年 1月 2日 ( 1884年 陰曆 11月 17日 ) 仁川에 上陸하고 漢城府 로 進駐했다. 이노우에는 日本 陸軍을 이끌고 直接 樂善齋 로 가서 高宗을 豫防하고 日本이 입은 被害에 對한 損害賠償 을 要求하니 高宗은 議政府 左議政 김홍집 을 全權大臣으로 하여 協商에 應하게 하였다.

1885年 1月 2日 ( 1884年 陰曆 11月 17日 ) 日本 全權大使 이노우에는 當時 議政府 左議政 利子 全權大使人 김홍집 과 協商을 試圖하였다. 그러나 協商은 쉽게 이뤄지지 못하고 繼續 決裂되다가 1月 7日( 1884年 陰曆 11月 22日 )부터 兩國 代表는 議政府 안에서 協商을 開始했으나 事件의 責任 素材를 兩國이 서로 相對國에게 轉嫁하여 論難이 激化되다가 드디어는 日本 側의 武力的 威脅에 屈服하여 1885年 1月 9日 (1884年 陰曆 11月 24日 ) 條約을 締結케 되었다.

內容 [ 編輯 ]

漢城條約의 主要한 條目은 아래와 같다.

  1. 朝鮮 側은 國書를 일본국 으로 보내어 謝罪의 뜻을 알린다.
  2. 死去한 일본국의 人民의 遺族과 被害입은 負傷者에 對해 賑恤하고, 日本국 商人들의 貨物이 破損된 것에 關해 조선국이 10萬 원을 賠償金으로 支拂한다.
  3. 조선국은 日本軍의 이소바夜市(氣淋, 磯林) 大尉를 殺戮한 難度(亂徒)를 逮捕하여 嚴罰로 다스린다.
  4. 日本 公使館이 深刻하게 破壞된 바, 조선국은 應當 建物을 交付하여 日本국이 公館으로 利用케 할 것이며, 그것의 增築을 爲해서 2萬 원을 日本국에 支拂한다.
  5. 일본국 公館 護衛兵 의 兵營은 公館 敷地에서 選擇하도록 하고, 濟物浦 條約 의 第5貫에 依據하여 施行토록 한다.

影響 [ 編輯 ]

이 條約의 結果로 謝罪를 위한 使節에 情事 서상우 , 府使 묄렌도르프 가 함께 日本으로 派遣되었다.

條約이 締結되자 日本은 朝鮮에 金玉均을 내어 줄 수는 없지만 조용히 處理한다면 默認하겠다고 하였다. 日本 政府는 金玉均과 그 一行들 때문에 朝鮮 政府와의 關係가 不便해지자 그들을 귀찮아하기 始作하였다. 이때 朝鮮의 守舊黨 政府에서는 金玉均 等을 暗殺하기 위한 計劃을 세우기 始作했다. [3]

1885年 2月 高宗 은 謝罪使節로 서상우 全權大使, 묄렌도르프 部 全權大使를 日本 에 派遣하였다. 1885年 2月 26日 日本 에 到着한 묄렌도르프는 祕密裏에 도쿄 主宰 러시아 다비도프 公使와 스페에르 書架管을 만나 兆·러 關係 强化 方案에 對해 協議하였다. [4] 한便 서상우 김옥균 , 박영효 等의 送還을 要求했다.

민태원 이 지은 《甲申政變과 김옥균》에 실린 바에 따르면 漢城條約에 따라 日本 에 다시 派遣된 서상우 묄렌도르프 日本 當局者들에게 김옥균 一行을 朝鮮으로 보내줄 것을 要求했다고 한다. 日本 政府에서는 여러 가지 理由를 들어 拒絶했지만 刺客을 보내 處斷하는 것은 默認하겠다고 했다. [3] 이때 刺客으로 指目된 사람은 김옥균 好調 參議 로 在職할 當時 그 밑에 注射로 있던 池運永 (池運永)이었다. [3]

그에 따라 1886年 池運永 은 極祕 指令을 받고 日本 으로 들어갔다. 그는 도쿄 요코하마 等地에서 김옥균 박영효 의 暗殺을 노렸지만 未遂에 그치고 日本 警察에 붙잡혔다. 以後 祕密 文書와 匕首 等을 押收당한 池運永 5月 21日 朝鮮 으로 돌아갔고, 곧바로 平安道 寧邊 에 流配됐다. [3]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漢城條約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다산초당, 2011) 393페이지
  3. 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329페이지
  4. 송금영, 《러시아의 東北亞 進出과 韓半島 政策:1860-1905》(새미, 2011) 107페이지

參考 資料 [ 編輯 ]

  • 尹孝貞, 《大韓帝國아 亡해라》 (박광희 驛, 茶山草堂, 2011)
  • 박지훈, 《中國과 韓國》 (서해문집, 2005)
  • 송금영, 《러시아의 東北亞 進出과 韓半島 政策:1860-1905》(새미, 2011)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開化派의 改革運動"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