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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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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肥
韓非
出生 한나라
死亡 秦나라
性別 男性
職業 哲學者, 思想家, 作家

韓肥 (韓非, 紀元前 280年 ? ~ 紀元前 233年 )는 《 韓非子 》를 著述한 戰國 時代 中國의 政治哲學者, 思想家, 作家이다. 한비의 生涯는 不分明하다. 알려진 情報의 거의 全部가 실린 司馬遷 의 《 詐欺 》에 따르면 그는 (韓)의 孔子 가운데 한 名으로 일찍이 兄明과 法술을 익혀 中央集權的 帝國의 體制를 積極的으로 唱導한 法家 理論의 集大成者 程度로 알려져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韓非子 [1] 로도 불리나 韓非子 는 普通 그의 著書로만 불리고 있다. 荀子 의 文人이다.

生涯 [ 編輯 ]

初年期 삶 [ 編輯 ]

正確한 生年은 傳해지지 않으나 紀元前 281年 [2] 戰國 時代 한나라 (韓)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한나라 의 孔子였던 韓肥는 荀子 의 文人이던 學者에게서 受學하였으며, 荀子 性惡說 에 心醉하여 뒤에 그의 文人이 되었다. 그는 限에서 섬기던 君主인 安에게 法<술<歲를 核心으로 하는 그의 理論을 끊임없이 進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理論은 그가 그의 著作에 썼던 것처럼 君主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理論에 興味를 갖고 直接 活用하려고 한 사람은 恨의 이웃 强國이었던 辰王 情, 未來의 始皇帝 였다고 한다.

學問 活動과 最後 [ 編輯 ]

孔子 의 文人인 子宮 (子宮)의 門徒였던 스승 荀子 로부터 司書六卿 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孔子 를 私宿하였으며 정의로운 社會의 實現을 위해서는 强力한 法秩序가 必要하다 確信하였다. 또한 스승 荀子 의 影響을 받아 奴隸 制度 에 對한 廢止를 主張하였는데 이 때문에 하늘의 秩序(天理)를 어지럽히는 詭辯論者로 몰리기도 했다. 全國 列國의 王公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일찍이 山으로 들어가 書室을 열고 門下生들을 가르쳤다. 同門이기도 했던 理事 와 切親했던 韓肥는 理事 를 통해 辰王 影幀 을 紹介받게 되고, 그의 達辯에 魅了된 辰王 情 은 그를 自身의 사람으로 만들려 努力하였다.

情은 그를 얻기 위해 韓에 對한 侵攻을 開始하였고, 韓肥는 秦의 侵略을 막기 위한 使臣으로 陣에 派遣되었다. 鄭은 韓肥를 만나보고 그에게 好感을 가졌으나, 荀子 門下에서 함께 배웠던 理事 가 嫉妬 때문에 꾸민 陰謀에 휘말려들어 투옥당했고, 結局 飮毒自殺로 生涯를 마감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49歲였다.

思想과 學問 [ 編輯 ]

그는 스승인 子宮 荀子 의 見解를 繼承하여 人間은 本質的으로 邪惡한 存在이며 强力한 法과 刑罰로 社會를 統制해야 된다고 主張했다. 또한 文人과 各國의 帝王들에게 孔子 의 理想鄕을 實現하기 위해서는 强力한 制度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그의 死後 그의 弟子들은 法家를 이루어 肉苛의 하나를 이루었다.

그의 門徒들은 다른 遊學 者들과는 달리 法治主義 實用主義 를 强調하였고 後代에 宋나라 때에 가서는 性理學 者들로부터 甚한 批判을 받고 儒敎 內에서도 極少數로 轉落하게 된다.

咀嚼 [ 編輯 ]

  • 韓非子 》 1/2, 이운구 옮김 (한길사, 2002) ISBN   89-356-5403-5

기타 [ 編輯 ]

實利主義 者였던 그는 名實相符(名實相符)라는 말을 創案하여 流行시켰다고 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者(子)는 스승이라는 뜻의 尊稱의 하나이다.
  2. 또는 紀元前 283年, 紀元前 280年生 說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