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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江의 奇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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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年부터 2007年 사이 國內總生産 그래프. 半世紀만에 大韓民國은 國內總生産 1兆 달러를 記錄하였다.
漢江의 夜景

漢江의 奇跡 (漢江의 奇蹟)이란 '第2次 世界 大戰에서 敗戰한 서독이 선진국으로 빠르게 跳躍한 일'을  라인江의 奇跡 이라 부르던 것을 場面 內閣 에서 漢江 에 빗대어 전쟁을 치르고 國土가 荒廢化가 되어버린 대한민국도 獨逸처럼 되어야 한다고 力說했던 것에서 由來하였다. 현재 이 用語는 大韓民國 에서 6.25 戰爭 以後부터 아시아 金融 危機 時期까지 나타난 半世紀에 이르는 急激한 經濟 成長을 나타내는 象徵的인 用語이다. 臺灣 , 싱가포르 와 함께 發展하면서 韓國은 아시아의 네 마리 龍 中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背景 [ 編輯 ]

時代的 狀況 [ 編輯 ]

日帝强占期 로 因해 韓國의 經濟狀況은 前부터 안 좋았고 6.25 戰爭 으로 韓國은 完全히 焦土化가 되버렸다. 北韓 은 休戰協定 以後에도 끊임없이 對南挑發을 敢行하면서 赤化統一 을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狀況은 언제든 다시 戰爭이 일어날 수 있었고 北韓으로 因해 韓國은 事實上 섬나라가 되면서 物流 移動에 限界가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外國으로부터 投資를 받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韓美相互防衛條約 으로 撤收했던 駐韓美軍 이 韓國에 다시 駐屯하면서 艱辛히 安保에 숨筒이 트여 美國 日本 의 投資를 받게 되었다.

冷戰 이 全世界를 덮치고 世界는 美國 을 中心으로 하는 資本主義 陣營과 蘇聯 을 中心으로 하는 共産主義 陣營으로 나뉘었다. 韓國은 北韓 共産主義 政權의 侵略으로 資本主義를 選擇하게 되었다. 그리고 韓國은 美國의 友邦國이 되면서 美國의 援助를 받게 되었다. [1]

資源不足 [ 編輯 ]

資源은 나라에 富를 가져다 주지만 韓國은 地下資源이 적었다. 애初에 中東처럼 石油 를 팔아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 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그나마 상동鑛山 에서 生産된 텅스텐 을 美國에 輸出했다.

그런데 이 德分에 1次産業에 集中했던 다른 開發途上國 들과 달리 2次産業에 集中할 수 있었고 結局 製造業 發達에 큰 影響을 끼치게 되었다. 資源의 詛呪 에 걸린 다른 나라들도 많다.

歷史 [ 編輯 ]

1953年  7月 27日 休戰 以後, 1人當 GDP가 67달러라는 悽慘한 數値에서 만들 수도 없던 雪糖 을 만들어 내는 等 '輸入代替工業 爲主'의 成長을 하기 위해 努力하며 경제성장률에 執着하지 않고 超인플레이션 과 通貨增發 問題를 解決하는데 注力하였다. 韓國 經濟는 停戰 直後인 1954年부터 1959年까지 年平均 4.4% 成長했으며, 이것은 當時 다른 後進國들에 비해 높은 便이었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大 名譽敎授가 中央선데이 에 對한 答信에서 " 朴正熙 時期는 平均 成長率 8.5%의 高度成長 時代였으나, 經濟 成長만 놓고 보더라도 幅과 깊이가 널뛰기했던 不確實하고 아슬아슬한 時期였으며, 外換保有額이 언제든지 바닥날 수 있는 不安한 나라였다."고 指摘하였다. [2]

5.16 軍事 政變 부터 1979年 까지 韓國 은 여러 次例 外換危機와 不渡危機를 겪었고, 마이너스 成長만해도 1963年 1964年 의 2分期, 1961年 , 1962年 , 1965年 , 1966年 , 1979年 의 各各 3分期, 1970年 과 1978年 1分期, 1967年과 1968年의 4分期 等 1961~1979 朴正熙 執權 74分期 中 14分期(19%)에 이르렀으며 [3] , 每年 두자릿數 甚至於 두次例의 2次 午日쇼크 後로는 20%에 肉薄하는 物價引上을 겪어 다른 東아시아 國家와는 뚜렷한 差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大韓民國軍 베트남戰 參戰 , 韓獨勤勞者採用協定 에 依한 ' 派獨鑛夫 '와 ' 派獨 看護師 '을 통한 軍武器 現代化 및 外畫 所得 增大, 勞動集約 重工業의 中東 進出 等으로써 이를 相殺하는 한便, 5.16 軍事政變 移轉인 1960年度 74個의 開途國에서 社會,文化 複合指標로 15位를 차지 [4] 하는 等 良質의 人的資源이 높은 人口 密度 로 因해 密集되고 國土 또한 大部分이 過飽和된 狀態로 開發이 이루어진 德分에 꾸준히 內需가 發達하고 이것이 特히 50年代부터 70年代 中盤까지 韓國 經濟成長에, 60年代 後半~70年代 全般 飮食料品을 除外한 輕工業과 機械工業을 빼면, 輸出보다 많은 寄與를 하였다. [5]

그 後에 大韓民國은 開發途上國 에서 先進國 으로 跳躍할 수 있었으며, 이時期의 專門家들은 시멘트 , 肥料 , 自動車 , 家電 , 鐵鋼 等에 對한 輸入代替戰略과 綿紡織, 勞動集約 建設業 等을 中心으로 하는 輸出主導戰略의 複線型 發展이 效果를 거두었다고 評價한다.

北韓과의 經濟 隔差 [ 編輯 ]

北韓 1953年 以後 重化學工業 中心의 計劃經濟 를 推進하여 1960年 까지 年平均 20%의 經濟成長을 記錄함으로써 1957年 부터 10餘 年間 一時的으로 大韓民國 1人當 國內 總生産 을 追越하게 되나, 場面 內閣 에서 내놓은 經濟開發 5個年 計劃 朴正熙 政權에서 補完해가며 輕工業 中心으로 輸出을 늘려온 大韓民國 에게 1969年 或은 1970年代 中盤부터 다시 따라잡히고 비로소 南韓이 1980年 代 重工業을 縮小(産業合理化)함으로써 北韓을 크게 따돌리기 始作하여 오늘날 그 隔差가 數十倍에 이르게 되었다. [6]

戰後 北韓은 蘇聯 의 無償 支援 13億 루블 等, 東유럽 共産圈 國家들 및 中華人民共和國 의 莫大한 支援을 받았고, [7] 韓國은 유엔 國家들(UN), 美國 에서 數十億 달러의 莫大한 支援을 받았다. [8] 반짝 成長보다는 安定을 꾀해 緊縮을 펼쳤던 南韓에 비해 北韓이 重工業 投資를 活潑히 하였고, 또한 北韓의 人口規模가 南韓에 劣勢였을 뿐더러 1人當 援助額이 높아서 한동안 北韓이 南韓을 앞서갔다. 그 後에 1980年代 後半 共産圈 國家들이 連달아 崩壞하였고, 그 主軸인 蘇聯의 崩壞 로 北韓은 더以上 無償援助를 받을 수가 없다.

京釜高速國道의 登場 [ 編輯 ]

1950年代 中盤에 道路技術 公務員들이 美國의 道路 및 道路工事를 硏修 視察하면서 政府는 高速道路에 關心을 가지게 되었고, 1950年代 後半부터 國土綜合開發計劃의 必要性이 政府 內에서 論議되기 始作하여 1960年 國土建設本部가 設立, 場面內閣에서 國土開發事業이 實施되며, 5.16 軍事政變 以後 國土計劃基本構想(1963年 7月), 國土建設綜合計劃法(1963年 10月 14日)으로 인해 國土綜合開發을 위한 制度的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9]

한便, 第1次 經濟開發 5個年 計劃으로 因해 輸送難이 深刻해졌으나 朴正熙 政府는 鐵道 中心의 開發을 하며 高速道路에 對한 社會的 要求는 增幅되었고 그럼에도 第2次 經濟開發計劃의 鐵道豫算이 道路豫算의 3.5倍인 點, [10] 鐵道보다 高速國道가 훨씬 未來性 있다는 點 [11] 等의 批判을 거치며 1967年 , 土地計劃基本構想이 修正 補完되어 對國土建設計劃書(案)李 되었고, 이에 高速道路 10個年計劃(1970)(高速道路, 文化公報部) 等 여러 高速國道 計劃書로써 서울-仁川 間 6車線 그리고 서울-水原間 4車線 高速道路 建設計劃이 包含됨으로써 高速道路 建設이 最初로 政府 文書에 明文化되기에 이르러 京釜高速道路 를 비롯한 여러 道路가 優先順位 싸움을 거치며 세워지게 된다.

朴正熙 政府 가 主導한 重農政策 [ 編輯 ]

5.16 軍事政變 後 國家再建最高會議는 農業協同組合과 農業銀行을 統合하는 한便, 이자의 8%p를 國庫로 補助해주는 等 高利債를 蕩減해주어 돈이 圓滑히 循環하도록 하였다. 한便 政府收買, 擔保融資, 國庫補助 等을 擴大하여 農産物 輸出을 奬勵하는 한便 農業 用水源 開發事業, 酪農 投資 等에 海外借款을 들여와 重農政策을 펼쳤으나 工産品 輸出과 달리 計劃値를 達成하는데는 失敗하여 場面內閣의 路線에 力點을 둠으로써 重農政策이 一時的으로 萎縮되었다.

그럼에도 1967年 까지 農村의 人口는 全國 人口의 過半으로서 꾸준히 늘어나는 等 7代 大選까지 選擧의 核心 軸이었음에는 變함없었고, 朴正熙 政府는 많은 資源을 農村과 農業에 投資하여 農業構造를 革新하려 하였다. 비록 成果를 거두진 못했으나 農業 復興 農業構造政策審議위를 設置하고 協業農場이 運營되었었고, 中斷되기는 했으나 自立安全農家 調整事業度 試圖되었다.

特히 60年代 後半부터는 政府는 朴正熙의 主導아래 積極的인 農業育成責에 突入하여 그 一環으로 4大江 流域 綜合開發, 統一벼 普及, 複合營農火, 새마을運動 等을 實施하였고 重化學工業을 闡明하던 1973年 1月에도 "우리가 高度 成長을 繼續 持續해 나가기 위해서는 重化學 工業을 앞으로 重點的으로 育成발전시켜 나가야 하겠고, 輸出 産業을 더욱 擴充해서 輸出의 持續的인 伸張을 期해야 하겠고, 農水産 分野에 對한 投資를 擴大해서 都農間의 隔差를 解消하는 데 政府는 集中的인 努力을 기울일 것이다.

勿論, 우리가 農漁村에도 重點 開發을 해야 되겠고 딴 일도 해야 되겠지만, 結局은 農漁村을 重點 開放하자면 輸出을 해서 外貨를 많이 벌어 政府가 그 만큼 富者가 되어야만 農村에 많이 投資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80年代의 輸出 目標를 約 100億 달러까지 올려보자. 그 밖에 우리 農漁村에도 새마을 運動을 뒷받침하기 위한 中小 工場들이 많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農漁民들의 所得 增大에 크게 이바지하게 하여, 우리 農村도 都市 못지 않게 살기 좋은 農村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또한 國土를 效率的으로 活用하기 위해서 只今 推進하고 있는 4大江 流域 開發을 促進하고 其他 重要 河川도 開發해야 하겠으며, 港灣 開發, 道路網 擴張, 高速道路, 高速化 道路, 旣存 國道의 包裝, 이런 것을 빨리 서둘러야 하겠고, 全 國土의 綠化를 위해서 앞으로 10個年 計劃을 輸入해 가지고, 80年代 初에 가서는 우리나라가 完全히 푸른 江山이 되어야 되겠다." 며 그의 演說에서 農村 開發과 農業 振興을 위한 輸出增大는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새마을 運動, 農業構造改革이 失敗하고 所得 隔差가 크게 벌어지면서 1973年 演說과 달리 1977年 前後로 農業育成冊은 차츰 밀려나고 急速한 地域隔差 擴大를 隨伴한 工業化가 實施되나, 1970年代 後半 農業이 GDP의 20~30%를 차지하고 그 以前에는 大部分의 國民들이 農民이었다는 點을 考慮하면, 韓國人들에게 돌아간 惠澤으로만 봤을 때 그 意義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 [13] [14]

IMF 外換危機 [ 編輯 ]

그러나 1997年 韓國은 東아시아 外換危機라는 廣範圍한 經濟的 災殃에 直面했다. 政府의 外換保有高는 60億 달러로 深刻하게 制限되었고, 大部分은 다가오는 任期에 支出하기 위해 割當되었다. 30年 만에 最初의 民間인 出身 大統領인 金永三 은 그 當時 經濟를 保護하는 데 失敗했고, 김대중 大統領 (1998?2003)은 IMF 經濟危機 狀態에서 就任했다. 새로운 大統領은 公開的으로 財閥 과 當時의 金融 및 政府 시스템에 反對했고, 그의 當選과 市民들의 努力, 國際通貨基金의 580億 달러를 合하면서 2001年 8月 빚을 갚고 問題를 克服했다. 따라서 韓國의 外換危機는 深刻했지만 비슷한 狀況을 겪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相對的으로 짧았다.

結果 [ 編輯 ]

龜尾國家産業團地 造成, 住民登錄證 發給, 浦項製鐵所 建立, 현대조선(現在, 現代重工業 )의 推進, 江南 地域 開發, 베트남戰 派兵을 통한 韓國軍 倂記 現代化 및 外畫 所得 增大, 서울 地下鐵 1號線 建設 等 여러 開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64年 輸出 1億달러, 1970年 輸出 10億달러 達成한 지 7年만인 1977年 輸出 100億달러를 突破하였다. [15] 1980年代 中後半 3低 好況 으로 高度成長이 加速化되어 1995年 1人當 國民所得 1萬달러, 輸出 1千億달러 突破하였고 1996年 12月 12日 OECD 29番째 會員國으로 加入했다.

하지만, 1997年 11月末 IMF 外換危機가 덮치면서 漢江의 奇跡은 歷史 속으로 사라졌다.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各州 [ 編輯 ]

  1. 박근호 日本 시즈오카대 敎授 (2017年 3月 28日). ““漢江의 奇跡 만든 건…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 . 《京鄕新聞》.  
  2. 최상연 記者 (2011年 3月 20日). ““朴正熙는 끝없이 리스크 選擇하며 經濟 일군 冒險家”” . 《中央선데이》.  
  3.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301&tblId=DT_102Y055&conn_path=I2
  4. Irma Adelman and Cynthia Morris, Society, Politics and Economic Developmentm, Baltimore: The Jo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67
  5. 金光石, 홍성덕, 韓國開發硏究 1990 12卷 1號
  6. 統計廳, 統計로 본 大韓民國 50年의 經濟社會像 變化 P.304
  7. 백준기, 《韓國戰爭史의 새로운 接近》,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篇, 2001年 , p707~714
  8.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999S&tblId=DT_999S_286062&conn_path=I2
  9. http://theme.archives.go.kr/next/gyeongbu/makePlan01.do
  10. 京鄕新聞 1966年 6月 10日 2面 中央
  11. 京鄕新聞 1966年 6月 20日
  12. 이헌창, 韓國經濟統社
  13. 出處朴正熙大統領演說文集 第10輯 1월편 1月 12日, 朴正熙大統領演說文集 第14輯 1월편 1977年 年頭 記者會見.
  14. 京鄕新聞 1965年 12月 25日 4面, 每日新聞 1966年 10月 1日 1面 等
  15. “輸出 100億弗, 1977年은 「輸出 韓國」의 또 하나의 出發點” . 《中央日報》. 1977年 12月 22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