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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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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堂 (學堂)은 高麗 末期부터 設置되었던 學校 이다.

高麗의 學堂 [ 編輯 ]

地方의 鄕校 (鄕校)에 對하여 中央의 各 部에 두었다. 이 制度는 中國에도 없었던 것으로 高麗 末 遊學 振興의 現實的 要請에서 設置하여 朝鮮 時代에 發展을 보았던 機關으로 鄕校와 달리 文宣王廟 (文宣王廟)가 없는 것이 特徵이다.

學堂은 1261年 ( 高麗 元宗 2)에 東·西의 두 學堂(學堂)을 처음으로 設置하여 各各 別監(別監)을 두고 가르친 것이 그 처음이다. 그 뒤에 儒敎 佛敎 에 代身하여 思想界를 支配하게 되자 開京 의 各 部에 學堂을 設置하여 5部 學堂(五部學堂)으로 整備 强化되었다.

朝鮮의 學堂 [ 編輯 ]

朝鮮 에 들어와서도 高麗의 制度를 踏襲하여 서울을 東·西·中·男·北의 5部로 나누고 여기에 各各 學校를 하나씩 設置하여 5部 學堂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學士(學舍 : 學堂 建物)가 없어서 大部分은 寺院(寺院)을 利用하였으나, 1411年 ( 朝鮮 太宗 11)에 처음으로 南部 學堂이 이룩됨을 契機로 以後 나머지도 모두 建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北部 學堂(北部學堂)은 여러 次例 設置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設置를 보지 못하고, 1445 ~6年( 世宗 27~8)頃에 廢止되어 4部 學堂 (四部學堂)만이 存續을 보았다. 普通 이를 4學(四學)이라고도 한다. 一說에 따르면 朝鮮에 들어와서는 처음부터 5部 學堂은 設置를 보지 못하고 4部 學堂 灣이 있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任權 의 墓碣銘에 依하면 任權의 生涯 初盤에도 北部學堂이 存續했다 한다. 소세양 은 少年時節 北部學堂에서 任權 임추 兄弟를 만나 交流하다가 오랜 親舊가 되었다는 것이다. [1]

學堂의 運用 [ 編輯 ]

學堂은 才士(齋舍 : 寄宿舍) 制度를 마련하고, 그 運營은 國家에서 負擔하였다. 國家에서는 學生을 敎育하기 위하여 學田(學田)·奴婢(奴婢)·雜物(雜物) 等을 賜給(賜給)하였을 뿐만 아니라 全羅北道 沿岸에 있는 여러 섬의 漁場(漁場)을 주어 그 세(稅)로서 費用을 充當케 하였다.

처음에는 敎授 2人, 訓導(訓導) 2人을 두고 成均館 職員으로 兼職케 하였으나, 後에는 各 1人씩을 減하여 兼職을 없앴다. 그리고 授業 狀態를 監督하기 위하여 禮曹(禮曹)와 司憲府(司憲府)에서 不斷히 監督하고 있었다.

學堂의 入學 資格과 敎育 目標 [ 編輯 ]

學堂의 入學 資格은 兩班과 西人의 子弟로, 學齡(學令)은 小學(小學)으로 定하여, 入學하면 小學부터 暗誦케 했으며 5日마다 試驗을 치렀다. 禮曹에서는 달마다 試驗을 치르고, 1年의 成跡을 王에게 報告하였다. 成績이 優秀한 生徒는 成均館에 進學시키는 것이 敎育 目標였으나, 때로는 學堂에서 生員試(生員試)·육월會試(六月會試)·謁聖試(謁聖試)를 통하여 直接 生員·進士試의 會試(會試)에 갈 수도 있어서 뚜렷한 系統은 없었다. 學生 數는 百 名이었다.

壬辰倭亂 以後의 狀況 [ 編輯 ]

壬辰倭亂 때 學堂이 불타서 그 뒤 다시 建物을 세웠으나 學生 數가 激減되어 事實上 有名無實케 되어 내려왔다. 大韓帝國에서 官學이 不振하게 되자 外國人이 私學(私學)을 세웠을 때 이 이름을 따다 붙인 일이 있었으니, 배재學堂 · 梨花學堂 等을 들 수 있다. 이들은 後에 學校 로 改稱되었다. 배재學堂 과 몇몇 財團들은 아직도 財團 名에 學堂을 쓰고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任權 墓碣銘, 소세양 찬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高麗의 政治·經濟·社會構造"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