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니·퐁넛 마을 虐殺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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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퐁넛 女性과 아이들의 주검寫眞

퐁니?퐁넛 虐殺 事件 ( 베트남語 : Th?m sat Phong Nh?t va Phong Nh? , 英語 : 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 )은 베트남 戰爭 中인 1968年 2月 12日 大韓民國 海兵隊 海兵制2旅團(靑龍 部隊) 베트남 꽝男性 디엔半舷 퐁니, 퐁넛 마을에서 住民 70餘 名(69 ~ 79名 推定)을 虐殺한 事件이다. [1]

이 事件은 《 한겨레21 》이 當時 베트남 호찌민市 通信員이던 구수정의 現地 르포와 고경태, 황상철 記者의 參戰軍人 인터뷰로 世上에 알려지게 되었다. [2] [3] [4] 이듬해인 2000年 여러 市民社會團體가 모여 '베트남戰 民間人虐殺 眞實委員會'를 結成했고, [5] 2004年 6月 大韓民國의 市民團體는 誠金을 모아 關聯 犧牲者 追慕碑를 세웠다. [6] 2000年 11月 《한겨레21》은 美軍의 自體 調査 報告書를 公開하여 다시 한番 事件의 全貌를 世上에 알렸다. [1]

大韓民國越南戰參戰會는 加害者에 關한 證據가 明確히 나온 바 없다고 主張하고 있으며 [7] 李鐘燮 國防部 長官 은 2023年 國會 國防위 全體會議에서 "美軍이 調査한 것을 보면, 駐월美軍司令官도 '韓國軍에 依한 民間人 虐殺은 없었다'라고 結論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確認한 바에 따르면 民間人 虐殺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背景 [ 編輯 ]

베트남 戰爭 은 正規軍끼리의 戰鬪 以外에도 베트콩으로 알려진 非正規軍이었던 남베트남 民族解放戰線 게릴라 活動이 거세었던 戰爭이었다. 북베트남 은 非正規軍에 依한 게릴라전을 獨立을 爭取하기 위해 모든 베트남人이 參戰하는 “人民 戰爭”이라고 불렀다. [8] 한便, 美軍 을 비롯한 韓國軍 남베트남 의 同盟軍은 戰鬪員과 非戰鬪員의 區分이 模糊해지자 一定 區域에 民間人을 몰아놓고 受容하여 戰略村을 만들고, 그 以外의 地域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敵으로 看做”하는 “自由 射擊 地帶”보아 搜索 殲滅 作戰을 펼쳤다. 美軍에 依해 저질러진 미라이 虐殺 에서도 確認되듯이 作戰 中인 美軍은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베트콩”이고 “어린 아이도 諜者”이며, “놓치는 것보다 誤認해서 죽이는 게 낫다”는 態度를 보였다. [9] 조너선 닐(Jonathan Neal)은 《美國의 베트남 戰爭》에서 남베트남 側이 게릴라를 찾지 못하면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것은 傳承을 誇張하려는 속임數이기 보다는 民間人들이 共産主義者들에게 그만두라고 말하도록 壓迫하는 戰略이었고, 이 過程은 美國 政府의 壓力아래 이루어졌다고 主張하고 있다. [10]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은 美軍의 戰略에 따라 安全 마을로 分類된 곳이었고, 美國 海兵隊 켑소대와 姊妹 結緣을 한 곳이었다. [11] 이 때문에, 퐁니 퐁넛 사람들은 美軍이나 韓國軍에 對해 警戒心을 가지지 않았고, 마을에는 남베트남軍의 家族들도 살고 있었다. [12]

虐殺 [ 編輯 ]

事件 經緯 [ 編輯 ]

大韓民國 海兵隊 靑龍 旅團 은 1968年 1月 30日부터 2月 29日까지 旅團 規模로 '괴룡 1號 作戰'을 벌였다. [13] 이 作戰은 1968年 1月 30日 베트남 人民軍 과 남베트남 民族解放戰線의 舊正 大攻勢 에 맞선 것으로 '舊正攻勢 反擊作戰'으로도 불렸다. 이 作戰 中인 1968年 2月 12日 午前 11時 무렵, 퐁넛 마을을 지나던 靑龍 部隊 1中隊가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의 民間人 70餘名을 虐殺하는 事件이 일어났다. [3] 베트남 駐屯 韓國軍의 公式 記錄인 《파월 韓國戰士》는 當時의 狀況을 이렇게 記錄하고 있다. [14]

1968年 2月 12日 9陰曆 1月 14日 第1中隊長(김석현 大尉)는 08:15에 1番 道路 를 偵察하며 北進하고 퐁넛마을에 進入…… 11:05에 目標(11-이곳은 퐁니촌에 該當한다)를 攻擊하였는데 이 때 西쪽 地域으로부터 30餘發의 敵 射擊을 받아 4.2인치 迫擊砲로 發射地點을 砲擊 制壓…… 負傷者 1名 생겨 後送하였다.

? 《파월韓國戰士》

그러나, 當時 虐殺 被害者의 證言과 戰鬪 參與者의 證言, 美軍側의 調査 報告書에 依해 드러난 事實은 《파월 韓國戰士》의 記錄과 다르다. 살아남은 마을 住民은 아침밥을 먹고 난 後 쯤의 時間에 韓國軍이 堂山나무 쪽으로 밀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고 證言하고 있다. [15]

當時 作戰에 參與한 1中隊의 1小隊長 최영언 氏는 "自己 마을로부터 先頭 1小隊 兵力 쪽을 向해 射擊이 날아왔다. 瞬間的으로 모든 小隊員들이 수풀 바닥에 엎드렸다. 누군가 한名이 銃에 맞아 負傷 當한 듯했다. 中隊長 김석현 大尉에게 緊急히 無電을 쳤다. 中隊長의 應答은 마을을 攻擊하라는 것이었다. 1小隊와 2小隊가 方向을 왼쪽으로 틀고 銃을 쏘며 마을에 進入했다"고 말하였고, 마을에 到着하였을 때는 이미 베트콩은 떠나고 겁먹은 마을 사람들뿐이어서 마을 사람을 한 곳에 모아 놓았는데, 部隊 後尾의 누군가가 갑자기 사람들을 向해 銃을 쏘았다고 證言했다. [3] 2小隊長이었던 이상우 亦是 "베트콩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마을 住民들도 抵抗하거나 그런 움직임도 없었다. 애들이 怯이 나서 도망가니까 죽인 거지 참 ……."이라고 말했다. [16] 고경태에 依하면, 퐁니·퐁넛 虐殺에서 死亡한 民間人은 74名이며 그 中 4名은 虐殺 當時 1살이 되지 않은 쩐티안, 쩐半만, 응우옌딘다오, 도안테민이다. [17]

虐殺 直後의 보고 [ 編輯 ]

安全 마을이었던 퐁니·퐁넛 民間人에 對한 虐殺이 벌어지자, 남베트남 政府는 美國에 强力히 抗議하였고 美軍은 獨自的인 調査를 벌였다. 駐월 美軍 司令部 監察部는 調査結果를 駐월 美軍 司令官 및 軍部 高位 將星에게 報告하였다. 報告書에는 20餘 張의 寫眞이 添附되어 있었고, A4 用地規格 總 554章으로 構成되어 있었다. 監察部는 이 報告書에서 韓國軍이 男女老少를 不問하고 殘酷 行爲를 저지르고 사람들을 虐殺하였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이 報告書는 機密文書로 分類되어 非公開로 있다가 30年이 지난 後, 2000年 6月 1日 祕密이 解除되었다. [1] 美軍 監察部의 報告書에 添附된 寫眞은 美 海兵 聯合 行動小隊 Delta-2 所屬 본(J. Vaughn) 上兵이 撮影한 것이다. 본(J. Vaughn) 上兵은 韓國軍 撤收 以後 民間人 負傷者 治療를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報告書는 퐁니·퐁넛 虐殺의 槪要를 다음과 같이 說明하고 있다. [18]

1. 1968年 2月 12日 事件

  • 場所 : 꽝男性 디엔半 퐁니(Phong Nhi)·퐁넛(Phong Nhut) 마을
  • 作戰部隊 : 韓國 海兵 2旅團 1大隊 1中隊(一名 괴룡1號 作戰)

(a) 1968年 2月12日 퐁넛에서 射擊을 받은 直後 韓國海兵隊는 그 마을을 攻擊했다.
(b) 퐁니마을에 無差別射擊이 行해졌고 그로 인해 많은 損傷을 惹起시켰다.

  • 犧牲과 損失 : 69名의 베트남 女性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銃에 맞아 죽음. 韓國 海兵 1名 負傷

虐殺 以後 [ 編輯 ]

美國의 퀘이커 口號團體 活動家 다 이앤과 마이클 존스는 〈韓國軍이라 불린 同盟軍〉이라는 報告書를 作成하였다. 이들은 이 報告書에서 퐁니-퐁넛 虐殺의 生存者들이 “韓國軍이 偵察中에 對人 地雷에 걸렸고, 마을 사람들은 地雷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銃소리는 없었다. 그 뒤 韓國軍이 마을에 왔고 虐殺이 일어났다”고 證言한 內容을 실으면서, 이 事件이 베트남 現地는 勿論이고 《 뉴욕 타임즈 》에도 記事가 날 程度로 널리 알려졌다고 記錄하고 있다. [19] 마을 近處 작은 절에 있던 比丘尼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어요. …… 우리 작은 절 안에는 그들 모두를 위해 香을 피울 空間도 없을 程度였습니다.

監察部의 報告를 받은 베트남 駐屯 美軍 司令部 司令官이었던 웨스트 母語랜드는 1968年 4月 29日 파월司令部 司令官 채명신 將軍에게 戰爭犯罪에 對한 徹底한 調査와 處罰, 再發 防止를 要求하는 書信을 보냈다. 그러나 채명신 將軍은 6月 4日 보낸 答狀에서 “民間人 虐殺은 없었다”고 하면서 베트콩의 欺瞞戰術이라고 主張하였다. [20] 하지만, 當時 청룡부대 憲兵隊 搜査係長은 上部로부터 “청룡부대를 假裝한 게릴라의 所行”이란 指針에 따라 調査報告를 하라는 指示를 받았다고 證言하였다. [21]

퐁니·퐁넛 마을의 生存者들은 虐殺 1年 뒤인 1969年 2月 自身들이 남베트남 政府에 服務하고 있는 軍人의 家族이고, 合當한 市民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虐殺을 當하였다며 眞實 糾明과 賠償을 要求하는 歎願을 남베트남 下院 議長에게 보냈다. [12] 이 歎願에는 20餘 名이 이름을 적고 指章을 찍었으며, 遺家族들은 베트남人 67名이 韓國 軍人들에게 一介 昆蟲 取扱을 當했다고 적었다. [22] 當時 遺家族들이 남베트남 下院 議長에게 歎願한 內容은 다음과 같다.

受信: 사이공, 베트남共和國, 下院議長

主題: 1968年 2月 12日 딩네반현 彈퐁 마을(퐁니·퐁넛) 住民들의 大量虐殺 損害에 對한 請求

尊敬하는 下院議會 議長님, 우리는 1968年 2月 12日, 꽝男性 디엔半舷 퐁니퐁넛 마을에서 韓國軍에 依해 殺害를 當한 35家口의 一家親戚들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태어나 繼續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熱心히 일하는 農夫였습니다. 現職 軍人 또는 戰歿 軍人들의 家族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젖을 떼지 않은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市民證을 가지고 베트남共和國 統制地域 아래서 평화롭게 살아왔습니다.

갑자기 디엔半舷 隣近에 駐屯하던 韓國軍 部隊가 우리 地域에서 作戰을 遂行했고, 사람들을 집에서 끌어내 銃을 쏴 죽이고 身體 一部를 토막 내는 等 野蠻的 行爲를 벌였습니다. 우리는 위와 같은 일이 다른 이웃에게도 再現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우리 一家 親戚들이 虐殺당한 1周忌가 다가오는 오늘, 우리는 그분들의 죽음을 哀悼합니다. 아! 슬프도다.

市民權을 가지고 있고, 4千 年의 文明을 지닌 67名의 베트남人들이 一介 昆蟲 取扱을 받았습니다. 이 不幸한 喜箱子들에 對해 어떤 集團에서도 公式的인 哀悼를 표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 以上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要求를 國民에 對해 責任을 지는 機關인 下院議會의 尊敬하는 議長님께 傳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議長님께 韓國軍과 남베트남 政府가 다른 類似한 事件에서 適用했던 規則에 따라 賠償해주기를 鄭重하게 要求합니다.

1969年 2月. [23]

1969年 12月 18日 駐월美軍司令部 監察部에 있던 샘 샤프 大領은 參謀長 타운젠트 所長에게 祕密文書 하나를 보냈는데, 그 祕密文書는 '1968年 2月 12日 韓國軍 海兵에 依한 殘酷行爲 疑惑'이다. 여기에 添附된 美海兵 第3上陸戰司令部 調査報告書 中 응우옌싸의 陳述內容을 보면 當時 虐殺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아래의 引用文은 그 內容 中 一部를 拔萃한 것이다.

聯合戰鬪 小隊의 民兵隊員이자 남베트남 國民인 응우옌싸의 陳述:

2月 12日 約 10時에 우리 6名은 CAP D-2에 있는 벙커 위에 앉아서 韓國軍隊를 바라보고 있었다. 퐁니 마을에 攻擊이 始作됐을 때 우리가 있던 곳은 1番 道路와 아주 가까운 地點이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確實하게 目擊할 수 있었다. 우리는 雙眼鏡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韓國軍은 마을로 進入해 住民들을 그룹別로 잇따라 죽였다. 우리는 3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첫 番째 場所에서는 한番에 17名이 射殺됐고, 두 番째 場所에서는 14名이, 그리고 다른 場所에서는 6名, 3名이 射殺됐다. 이날 午後 우리가 그 마을을 搜索했을 때 나는 내 親戚 10名이 射殺됐다는 事實과 2名이 부상당했음을 確認했다. [24]

남베트남 政府 亦是 美軍 司令部에 强力히 抗議하였다. 한便, 美軍 政治 顧問 제임스 脈은 報告書에서 퐁니·퐁넛과 같은 民間人 虐殺이 無數히 일어나 "韓國軍에 對한 베트남人들의 憎惡心이 대단히 深刻하다"고 診斷했다. 美國은 韓國軍이 共産主義者를 죽이기 위해 血眼이 되어 있어 매우 勇敢하지만, 民間人에 對한 殘酷行爲를 일삼고 占領軍과 같은 態度를 取하고 있어 問題라고 認識하고 있었다. [25] 이런 理由로 美國은 이 問題를 繼續 追窮하였지만, 韓國은 小隊長들에 對한 中央情報部의 調査를 끝냈으며 [3] , 當時 大統領이었던 朴正熙 에게도 報告가 있었지만 結局 事件을 隱蔽하였다. 當時 韓國의 言論은 이 事件을 한 줄도 報道하지 않았다. [26]

虐殺의 證據 寫眞을 찍은 본 上兵은 調査官인 캠퍼넬리 少領에게 寫眞과 함께 陳述書를 提出하였고, 얼마 뒤 美國으로 돌아갔다. 그는 1994年 46살의 나이로 死亡했다. 한便, 本 上兵이 마지막으로 찍은 寫眞에 나온 16歲의 쩐티득은 4年 뒤인 1972年 남베트남 民族解放戰線 에 加擔하였다. 그는 빈디엔 近處의 남베트남군 哨所에 부비트랩을 設市하다 發覺되어 監獄에 갔으며 1975年 4月 戰爭 後에 풀려났다. 쩐티득은 以後 다낭 에서 雜貨商을 하다 1999年 8月 乳房癌에 걸려 47살의 나이로 死亡하였다. [27]

2000年 11月 《 한겨레21 》은 終戰 26年을 맞아 機密 解除된 文書 속의 犧牲者를 찾아 나섰다. 寫眞 속 가슴이 도려내진 女性은 當時 21살이었던 응우옌 티 彈이었다. 女同生 응우옌 티 虎牙는 언니가 하룻동안 더 살아 있었고 나즈막히 엄마를 부르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當時를 回想하였다. 다낭 에 살던 응우옌 티 炭의 家族은 正月 大보름 佛供을 드리기 위해 퐁넛 마을을 찾았다 一家族이 모두 犧牲되고 막내만이 살아남는 慘事를 當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大韓民國 政府 가 事件의 眞實을 認定하였는지 궁금해 하였다. [28]

2013年 8月 글로벌포스트 와 인터뷰한 大韓民國 國防部 代辯人은 "韓國軍이 그러한 民間人 虐殺을 恣行했다는 것은 不可能하다"며 베트남 戰爭 當時 韓國軍에 依한 虐殺 一切를 否定하였다. [29]

2015年 4月 8日 訪韓한 퐁니·퐁넛 마을 虐殺 事件 被害者인 응우옌티彈 氏는 베트남戰 參戰軍人 大韓民國 枯葉劑戰友會 의 反對 集會를 마주했다. [30]


市民平和法廷 [ 編輯 ]

市民平和法廷에서 證言하는 퐁니·퐁넛 마을 虐殺 生存者(當時 8歲) 응우옌 티 탄

2018年 4月 22日 - 23日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 모임 한베平和財團 을 비롯한 大韓民國의 여러 市民社會 團體들은 베트남 戰爭 時期 韓國軍에 依한 民間人 虐殺 眞相糾明을 위한 市民平和法廷을 開催하였다. [31] 이 市民平和法廷은 퐁니-퐁넛 마을 虐殺 事件의 生存者인 응우옌 티 彈과 ‘ 하미 마을 虐殺 事件 ’의 生存者 응우옌 티탄(同名異人)李 原稿로 나서 大韓民國 政府를 被告로 하여 損害賠償을 請求하였으며 [32] , 市民平和法廷의 裁判部는 이들의 主張을 받아들여 ‘ 國家賠償法 ’에 따른 賠償을 判決하고 大韓民國 政府에 眞相調査를 勸告하였다. [33] [34] 市民平和法廷은 模擬法廷으로 法的 拘束力이 없으나 베트남 戰爭 時期 虐殺을 普遍的 人權의 問題로서 闡明하였다는 意義가 있다. 市民平和法廷 側은 公訴時效 를 없애는 特別法이 必要하다고 主張하였다. [35] 또한, 民辯은 1968年 當時 퐁니-퐁넛 마을 事件을 調査하였던 中央情報部의 資料 公開를 請求하는 訴訟을 進行 中이다. [36] 國精院 은 "外交的 不利益"을 根據로 情報를 公開하지 않다가 法院의 公開 命令을 받자 ‘個人情報 保護’를 理由로 다시 情報 公開를 拒否하였다. [37]

司法 節次 [ 編輯 ]

情報公開 要求에 對한 大法院의 判決 [ 編輯 ]

2021年 3月 25日 大韓民國 大法院 國家情報院 이 가지고 있는 퐁니·퐁넛 마을 虐殺과 關聯한 情報를 公開하라고 判決하였고 國家情報院은 大法院의 判決에 따라 情報를 公開하기로 決定하였다. [38] 그러나 實際 公開된 內容은 當時 調査를 받았던 軍人 3名의 이름 뿐이다. 訴訟을 進行한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 모임은 追加的인 情報 公開를 다시 要求하였다. [39]

被害賠償 要求에 對한 法院의 判決 [ 編輯 ]

2023年 2月 7日 서울中央地方法院 民事68單獨 박진수 部長判事는 大韓民國을 相對로 한 被害者 응우옌 티탄의 被害賠償 請求에 對해 大韓民國의 責任을 認定하고 請求 金額 3,100萬원 全額을 賠償하라고 判決하였다. [40] 이는 베트남 戰爭에서 韓國軍이 集團的으로 遂行한 民間人 虐殺에 對해 政府의 賠償 責任을 認定한 첫 判決이다.

류진성의 暴露 [ 編輯 ]

2017年 베트남 戰爭에 參戰했던 류진성은 匿名으로 京畿道의 한 圖書館에서 CBS노컷뉴스 記者를 만나 "끔찍했던 場面이 생생하다. 언제 生을 마칠지 모르니 꼭 알려야겠다"며 50年 前 베트남 戰爭에서 經驗했던 記憶을 傳했었다. 그에 따르면, 1967年 12月 自身이 있던 部隊가 다낭 方向으로 向하던 途中 꽝男性 호이안 周邊의 한 마을을 지나게 됐는데, 베트콩(남베트남 民族解放戰線)이나 民兵隊 게릴라軍이 있었는지는 確認되지 않은 狀況에서 證據가 없었지만 '죽이지 않으면 다음에 또 當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3名을 銃殺했다고 傳했다. 류진성은 "우리 海兵이 民間人으로 알고 죽인 건 없었고 베트콩으로 誤認해서 죽이는 일은 作戰 때마다 있었다"며 "統計는 모르지만 그 數가 宏壯히 많았다"고 밝히며, "罪惡이다. 어떻게 謝罪를 해야 하나 싶다"라고 밝혔었다. [41]

2018年 4月 21日 서울 麻浦區 文化備蓄基地에서 열린 '베트남戰爭 時期 韓國軍에 依한 民間人虐殺 眞相糾明을 위한 市民平和法廷'에서 류진성의 匿名 인터뷰 映像이 證據로 提出됐었는데, 그는 "지난 1968年 2月 디엔半舷 퐁니·퐁넛마을에 1大隊 1中隊 2小隊 所屬 尖兵으로 나갔다"며 "美軍 裝甲車가 부비트랩에 걸린 뒤 마을에서 敵을 索出하라는 指示가 떨어졌다"고 陳述했었다. 이어 "그때 越南에서 오래 있었던 古參(選任)病이 와서 '에이 XX, 이런 것 하나도 處理 못 하냐' 하며 히스테리로 되레 갈겨서 卽死해버렸다"고 證言했다. [42]

2021年 7月 7日 류진성은 國會에서 “韓國軍 海兵隊가 作戰 中 敵軍뿐 아니라 老人이나 女性 等 民間人을 大規模로 射殺했다는 證言”을 했다. 이番에는 實際 얼굴과 實名을 公開한 채로 民間人 虐殺이 있었음을 暴露했다. 류진성 氏는 "避身하지 못한 婦女子들, 老人들을 全部 끌어내서 논바닥 가운데 全部 集結을 시켜놓고 그 過程에 現場에서 射殺한 民間人도 있다"며 "우리 小隊에서도 老人 한 분을 射殺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잡아놓은 民間人들을 어떻게 處理할까요' 물었더니 中隊長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는 말을 3小隊 애들에게 들었다"며 "모여있는 良民을 全部 射殺한 것"이라고 밝혔다고 證言했다. 또한 류진성氏는 "옆을 보니까 兩쪽 길에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그 위에 屍體를 全部 줄지어 뉘어 놓았더라"며 "우리 中隊 3小隊에서 命令이 下達돼서 集團 射殺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퐁니 퐁넛 虐殺은 아니지만, 그의 證言을 통해서 隣近 地域에서의 民間人 虐殺이 있었다는 事實이 드러났다. [43]

그의 證言에 따르면 그는 部隊 前方에서 尖兵 役割을 하던 中 베트남人들이 道路를 막고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을 하는 狀況을 目擊했으며, "옆에 보니 거적대기 위에 수많은 屍體들이 누워있었다"며 "그래서 뭔가 큰일이 있었구나 알게 됐다"고 證言했다. 류진성은 1968年 2月 作戰 中 平生 잊을 수 없는 일을 目擊했으며, 民間人 屍身 100具 程度를 본 것으로 判斷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屍體가 100具 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70餘具라고 들었다"고 證言했으며, 이날 機智에 復歸한 류진성은 自初至終을 部隊員들에 물었는데 옆에 小隊員들이 武勇談처럼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류진성은 "韓國軍이 作戰 遂行 中일 때, 베트콩들이 民間人을 集團 殺害하고 사라지는 것은 不可能하다."며, "그건 自殺 行爲다. 베트콩은 게릴라전을 한다. 露出되는 걸 覺悟하고 靑龍部隊 코앞에서 그런 無謀한 行動을 하는 건 不可能하다"고 斷言했다. [44]

또한 그는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고 謝過하고 補償하고 未來를 위해 좋은 파트너가 되도록, 判決 以前에 政府가 그런 政策을 率先垂範 해줬으면 좋겠다"며 "우리 企業이 中國 다음으로 베트남에 많이 가있다. 關係 改善이 切實하다. 勇斷과 決斷力을 政治權이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强調했다. [44]

베트남 政府의 態度 [ 編輯 ]

1990年代 以後의 狀況은 韓國 政府가 더 積極的으로 謝過하고 提案하는 모습이나 베트남 政府가 오히려 消極的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金大中 前 大統領 은 1998年 “不幸한 戰爭에 參與해 本意 아니게 베트남人들에게 苦痛을 준 데 對해 未安하게 생각한다”고 했고 盧武鉉 前 大統領은 2004年 “우리 國民이 마음의 빚이 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은 1992年 韓國과 修交할 當時부터 勝戰國 立場에서 굳이 謝過를 받을 必要가 없다는 立場을 보여왔고, 文在寅 政府가 謝過 意思를 打診하자 難色을 표하기도 했다. [45]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表紙이야기’ 잠자던 眞實, 30年만에 깨어나다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무엇을 했는가”… 美國 國立文書保管所 祕密解除 報告書·寫眞 最初公開” . 한겨레21 . 2000年 11月 15日.  
  2. 歷史發掘/短命의 길, 디엔半의 非명 , 한겨레21, 1999年 10月 28日
  3. 良民虐殺, 中央情報部에서 調査했다 , 《한겨레21》306號
  4. 1大隊 1中隊 2小隊 3分隊員의 證言 , 한겨레21, 2000年 6月 1日
  5. 베트남戰 良民虐殺 疑惑 美報告書' 公開 聯合뉴스 2000年 11月 14日
  6. 베트남에 韓國軍 民間人 虐殺 追慕碑 세운다 오마이뉴스 2004年 6月 17日
  7. 베트남戰 韓國軍 良民虐殺 陰害自害 行爲와 퐁니퐁넛 眞實
  8. "The History Place ? Vietnam War 1945?1960" . Retrieved 2012-11-14.
  9. 권헌익, 兪絳은 驛, 《虐殺, 그 以後》, Archive, 2012年, ISBN   978-89-5862-510-0 , 59-62쪽,
  10. 조너선 닐, 정병선 驛, 《美國의 베트남 戰爭》, 冊갈피, 2004年, ISBN   89-7966-033-2 , 77쪽
  11. 이규봉 (2012). 《未安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 156쪽.
  12. 김현아 (2002). 《戰爭의 記憶, 記憶의 戰爭》. 冊갈피   , 126-127쪽.
  13. 김재엽, 《大韓民國 海兵隊》, 살림, 2006年, ISBN   89-522-0580-4 , 舊正攻勢와 괴룡作戰 / 第4部 靑龍은 간다 - 베트남戰爭(1965.10.~1972.2.)
  14. 김현아 (2002) , 116-117쪽.
  15. 김현아 (2002) , 115쪽.
  16. 김현아 (2002) , 117쪽
  17. 고경태 (2015). 《1968年 2月 12日: 베트남 퐁니퐁넛 虐殺 그리고 世界》. 한겨레出版   , 335쪽
  18. 여기 한 衝擊的인 報告書가 있다 , 오마이뉴스, 2000.11.14
  19. 이규봉 (2012) , 157-159쪽.
  20. 이규봉 (2012) , 121-124쪽.
  21. 靑龍旅團서 良民虐殺 造作隱蔽 , 《한겨레21》310號
  22. 고경태 (2015) , 255쪽.
  23. 고경태 (2015) , 254~255쪽.
  24. 고경태 (2015) , 229쪽.
  25. 偏見인가, 꿰뚫어 본 것인가 , 《한겨레21》334號
  26. 김현아 (2002) , 129-130쪽
  27. 고경태의 1968年 그날 ⑬ 寫眞을 찍은 者와 찍힌 者, 20代 美軍과 10代 베트남 少女의 이야기 , 한겨레21 , 2014年 3月 31日
  28. 그날의 주검을 어찌 잊으랴 , 《한겨레21》356號
  29. Battle of the dueling war crimes , Global Post
  30. 베트남戰 虐殺 被害者 訪韓…枯葉劑戰友會 "從北" 反撥 "慰安婦 問題와 베트남 民間人 虐殺 問題 다르지 않아" 프레시안 2015.04.07
  31. 베트남戰 民間人 虐殺 生存者들 “謝過있어야 容恕도 可能” , 京鄕新聞, 2018年 4月 19日
  32. 베트남戰爭 時期 韓國軍에 依한 民間人 虐殺 眞相糾明을 위한 市民平和法廷
  33. 베트남 戰爭 時期 韓國軍에 依한 民間人虐殺 眞相糾明을 위한 市民平和法廷 判決 , 2018年 4月 22日
  34. 市民平和法廷 大韓民國, 베트남虐殺 責任認定·賠償하라 , 法律新聞, 2018年 4月 23日
  35. 正式裁判 땐 消滅時效 難關…“特別法 推進” , 한겨레, 2018年 4月 23日
  36. 베트남 民間人 虐殺 어렵게 입 뗀 生存者 “慘狀 알려져서 多幸” , 서울新聞, 2018年 4月 26日
  37. 國精院 또 “베트남 民間人虐殺 情報 非公開”…法院 判斷도 無力化 , 한겨레, 2018年 12月 26日
  38. 國精院 “大法 判決 따라 베트남戰 民間人 虐殺 資料 公開하겠다” , 한겨레, 2021年 3月 21日
  39. 4年 訴訟으로 받은 ‘15글字’…政府의 ‘베트남戰 虐殺 記錄’ 保有 確認 , 한겨레, 2021年 4月 9日
  40. 최민영 (2023年 2月 7日). “韓國 ‘베트남 民間人 虐殺’ 첫 賠償責任…法院 “韓國軍이 銃殺”” . 《한겨레》.  
  41. 參戰軍 暴露 "베트콩 區別안돼 民間人 銃殺했다" , 노컷뉴스, 2017年 12月 26日
  42. 베트남虐殺 參戰軍 "살려달라던 老人, 先任兵이 쐈다" , 노컷뉴스, 2018年 4月 21日
  43. 베트남 參戰軍 "논바닥에 모아놓고 民間人 射殺" , 노컷뉴스, 2021年 7月 7日
  44. 李長鎬 (2021年 11月 16日). " 非武裝 民間人 虐殺을 武勇談처럼"…베트남 參戰 海兵隊員의 告白” . 《뉴스1》 . 2023年 2月 9日에 確認함 .  
  45. “金大中 “未安” 노무현 “마음 빚”…韓國 大統領 세番째 ‘謝過’”. 京鄕新聞 . 2018年 3月 23日.  

參考 文獻 [ 編輯 ]

  • 고경태 (2015). 《1968年 2月 12日: 베트남 퐁니·퐁넛 虐殺 그리고 世界》. 한겨레出版.  
  • 김현아 (2002). 《戰爭의 記憶, 記憶의 戰爭》. 冊갈피. ISBN   978-89-7966-023-4 .  
  • 이규봉 (2012). 《未安해요! 베트남》. 푸른역사. ISBN   978-89-94079-58-5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