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강진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패강진 (浿江鎭)은 782年 ( 선덕왕 3年)에 新羅 서북면 에 設置한 軍陣(軍鎭) 또는 特殊行政區域이다. ' 浿江 (浿江, 統一新羅 의 境遇 大同江 )'이라는 이름 外에는 位置에 關한 端緖가 없어서 여러 異說이 있는데, 酒類 學說은 大同江 隣近의 黃海道 地域으로 推定한다. 平壤 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推測, 假說에 가까워서 確實하진 않다.

從來의 位置및 性格에 對한 學說 [ 編輯 ]

평산 位置설 [ 編輯 ]

從來에 只今의 黃海北道 平山郡 에 比定되어왔는데 딱히 根據는 없다. 무엇보다 패강진이 設置된 時期에 禮成江 一帶에는 郡과 縣等의 行政體制가 確立되어 있고 별다른 國防相의 威脅要素가 없었으므로 그런 곳에 또다시 軍陣을 두어야 할 特別한 理由가 없었고 나중에 평산에 津이 設置되기는 했지만 그건 패강진과 別個인 대곡眞(大谷鎭)이다.

鳳山 位置설 [ 編輯 ]

그런 탓에 그나마 훨씬 北쪽이고 浿江에서도 가까운 鳳山 일대로 非情하는 說이 나왔다. 이는 三國史記 地理誌 漢山州 조에서 漏落된 서북면 一帶의 地域單位로 看做하고자 하는 見解에서 나온 說이다. 一角에서는 "처음에 평산에 있다가 北쪽으로 올라가 鳳山으로 옮긴 것이다"라고 兩 說을 折衷하는 見解도 있다.

從來의 패강진의 性格에 對한 通說 [ 編輯 ]

평산說이든 鳳山說이든 패강진의 位置를 大同江 以南으로 非情한다는 點은 같다. 더구나 이를 渤海 에 依한 軍事的 威脅을 想定하고 여기에 對抗하기 위한 것으로 把握했다. 패강진은 渤海의 南侵을 防禦하고 다른 地域에 비해 相對的으로 邊境地帶人 黃海道 一帶에 對한 軍政的(軍政的)인 性格의 機關으로 看做한 것이다.

反論 [ 編輯 ]

그러나 位置에 對한 反論으로 패강진이 設置된 時點에 이미 黃海道 全域에 對한 軍,現等의 行政體制가 完備되었으므로 굳이 該當地域에 對한 軍事的인 統治機關을 設置할 必要가 있느냐는 反論이 提起되고 있다. 渤海에 南侵威脅에 對한 對應이라는 것도 渤海와 新羅가 完全히 接境을 이루고 있고 두 나라가 늘 敵對的이어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 特히 國力이 强力한 渤海가 相對的으로 弱小國인 新羅를 南侵할 可能性이 있었다는 通念下에 이루어진 說이다. 그러나 이 또한 當時의 實際情況이나 最近 北韓쪽의 考古學的인 調査에 依하면 否定되고 있는데 實際 渤海가 韓半島에 進出하기 始作한 連帶는 760年 에 首都를 上京 용천부 로 薦度하는 時期와 맞물려서 咸鏡南道 北靑 一帶에 南京 남해부 와 傘下 3株(州)를 設置하면서부터였고 그나마 韓半島 內에서 渤海의 領土는 咸鏡道 大部分과 함께 義州 (義州)等의 鴨綠江 沿岸에 限定되어 있었으므로 [1] 新羅와 渤海사이에는 咸鏡道에서를 除外하고 實際로 國境을 接한 곳이 없었고 平安道 一帶는 無주지(無主地)였다는 點이다.

그러므로 一旦 國境上으로 渤海의 南侵可能性은 없었다. 實際 記錄으로서도 新羅와 渤海는 戰爭은커녕 가벼운 國境紛爭조차 일으킨 記事가 單 한次例도 없었다. 渤海의 南侵威脅에 對한 根據로 黃海道 一帶의 郡縣들에 對한 築城(築城)記事를 들고 있지만 이는 行政體制를 整備하고 치소를 設置하거나 마을및 都市를 建設하기 위한 行政的 次元이지,국방상의 次元은 아니다. 渤海의 燈住 攻擊 後 唐나라의 要請에 依한 北伐도 新羅로서는 渤海와는 無關한 것으로 當時 두 나라는 國境을 接하고 있지도 않았다. 渤海는 主敵(主敵)을 唐나라로, 新羅는 日本으로 삼고 있었다. 흔히 壓倒的으로 强한 渤海가 新羅를 壓迫했다는 것도 渤海가 新羅의 10倍에 가까운 領土를 保有했다는 事實에서 起因한 偏見으로 實際로는 오히려 新羅가 國力에서 渤海에 多少 優位를 占하고 있었고 渤海도 이를 警戒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渤海로서는 主敵인 唐나라도 事實 버거운 판에 南쪽에 또다른 敵을 만들 理由가 없기 때문이다.

서로 敵對的이어서 交流가 없었다는 것과는 달리 事實은 東海岸 軸으로 兩國間에 外交, 通商(通商)的인 交流는 活潑했었던 것이다.

이런 等의 理由로 패강진이 渤海의 南侵威脅때문에 設置되었다는 通說은 浪說임을 알 수 있다.

平壤 位置설- 浿江陣에 對한 새로운 理論 [ 編輯 ]

只今의 黃海道 地域은 三國史記 地理誌 한酒造에서 보듯 全域에 郡縣이 設置되어 漢山州 에 所屬되어 있었다. 三國史記等의 記錄들을 檢討하면 漢山州와 패강진은 別個의 行政區域으로 看做되어 있는 듯한 印象을 주고 있다. 假令 三國史記 신라본기 憲德王 14年 條에는 金憲昌의 난 때 김헌창 軍(軍)에 降伏한 州와 抗戰中인 株를 區分해 列擧하면서 漢山州와 別途로 浿江을 言及하고 있다. 人物에 對한 出身에 對해서도 寒山과 浿江을 別途로 言及하고 있다. 卽 패강진은 거의 樽酒(準州)로 取扱된 模樣이다.

三國史記 地理誌는 패강진이 設置되기 以前인 景德王代를 基準으로 明示되어 있으므로 그 以後의 패강진이나 그 領域은 나오지 않는다. 아직 패강진의 領域은 新羅의 公式 領土는 아니었던 模樣이다. 그런 理由로 패강진의 領域은 漢山州 밖의 地域에서 찿아야 한다. 前述한 바와 같이 平安道 一帶는 無주지에 屬했다. 渤海는 只今의 義州를 中心으로 鴨綠江 沿岸만을 領有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新羅는 景德王代까지 14個 郡縣을 設置하는 것으로 對한 行政體制를 樹立하고 開拓하여 黃海道 一帶를 完全히 領土化하였다. 以後 新羅는 거의 主人이 없는 平安道 一帶, 特히 옛 高句麗 의 首都였던 平壤 一帶로 進出을 推進했다.

新羅로서는 高句麗의 首都였던 平壤 一帶를 領有해야할 當爲性이 있었다. 高句麗의 마지막 王이었던 安勝 이 新羅로 歸順했고 그 後에 高句麗 遺民의 大多數가 新羅로 건너왔으므로 高句麗에 對한 正統性도 自身들에게 있다고 본 것이었다. 高句麗의 敗亡以後 平壤과 그 一帶에는 몇몇 말갈족과 高句麗 遺民들이 살고 있었고 羅唐 戰爭 時에 新羅가 高句麗의 復興運動을 後援한 例가 있으므로 平壤 一帶의 高句麗人들로서는 新羅가 차라리 반가웠을 것이었다. 거기에 新羅는 自國의 支配下에 넘어온 高句麗人들을 공民畫하고 여러 惠澤을 주는 措置들을 取했으므로 [2] 더욱 그러했다.

浿江 流域은 唐나라의 軍事的인 壓力으로 名目上 領土로 삼기는 했지만 實際로 行政權을 主張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735年 성덕왕 34年에 浿江 一帶의 新羅의 領有權을 唐나라機 認定하는 것으로 唐나라가 代 東方進出 政策을 事實上 廢棄했으므로 新羅는 大同江 以北의 地域으로의 進出을 考慮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 直後 新羅는 몇몇 官吏들을 보내 平壤地域을 偵察하도록 하여 [3] 以後 持續的으로 平壤 一帶를 觀察하며 管理했고 혜공왕 臺에 開拓團을 派遣하는 것으로 本格的인 領土化를 開始했다. [4] 平壤一帶로의 大量 移住는 혜공왕 다음의 선덕왕 3年에 宣德王이 漢山州 一帶를 돌며 平壤으로의 移住를 督勵하는 것으로 繼續 이어졌고 이렇게 새로 開拓된 平壤 一帶를 다스리기 위한 機關을 設置한 것이 바로 패강진 이었던 것이다.

浿江鎭典 [ 編輯 ]

浿江鎭典(浿江鎭典)은 平壤一帶를 統治하는 浿江陣을 管理하는 行政官廳이다. 初期에 새로운 開拓地를 管理하기 위한 前哨 軍事基地로 始作된 패강진은 平壤 一帶가 漸次 安定化되어감에 따라 行政機構로 變化되어갔고 그럼에도 패강진이 新羅의 北邊地域을 管轄하는 特殊行政求人 關係로 軍陣으로서의 性格도 같이 갖고 있었다. [5] 浿江鎭典의 守令은 各 州(州)의 總督인 都督(都督)과 같은 級으로 도호(都護)라고도 불리는 6~9官等의 頭上大監(頭上大監) 1名과 10~13官等의 頭上弟監(頭上弟監) 1名씩이 있는데 各 민정과 郡政을 맡아 主管하되 頭上大監이 總括하는 形態이다. 頭上大監은 金巖 의 境遇에서 보듯 패강진 一帶의 農業振興의 任務도 같이 맡고 있었다. 平壤 一帶는 平野地帶이기 때문에 그 一帶의 開墾은 自營農民으로 定着한 住民들의 生活安定과 함께 새로운 稅金收取의 源泉이 되어서 新羅朝廷의 財政을 든든하게 해 줬고 이는 新羅王權의 强化에 도움이 되었다. 民情을 主管하는 頭上大監 밑으로 6~13官等의 大監(大監) 7名과 8~12官等의 寶鑑(步監) 1名이 頭上大監을 補佐한다. 7名의 大監은 패강진 傘下 7個 行政單位의 地方官으로 派遣되었다.

軍士를 主管하는 頭上弟監은 패강진 內의 治安維持와 開拓事業, 隣近 말갈족들에 對한 懷柔와 團束을 맡고 있었다. 頭上弟監의 밑으로는 11官等의 弟監(弟監) 1名과 12~17官等의 所感(小監) 6名이 補佐한다.

패강진의 管轄範圍와 新羅의 北方限界線 [ 編輯 ]

平壤에 치소를 둔 패강진의 領域에 對한 記錄은 全無하지만 後의 記錄으로 대충 推定할 수 있다. 패강진의 行政範圍는 只今껏 大同江~元山으로만 알려졌던 [6] 新羅의 最大 北方限界線의 基準點이 된다. 後三國 時代에 禮成江 沿岸의 패서 一帶가 弓裔에 投降하자 平壤星州 검용(黔用)李 같이 投降했는데 그 地域까지 합쳐 13個 陣을 設置했다고 한다. 정약용 은 我邦疆域考에서 이 13開陳의 位置를 패수와 撒水사이의 地域이라고 적고 있다. 獨立運動家이자 歷史學者로 檀國大學校 初代 學長인 장도빈 (張道斌)은 "新羅史硏究의 槪要"에서 안주읍地(安州邑誌)를 根據로 平安南道 按酒 一帶까지가 新羅의 領域이라고 하였다.

패강진의 以後 [ 編輯 ]

新羅末期가 되자 新羅의 行政體制가 무너지면서 後進 變更地域人 패강진은 放置되고 말았다. 新羅將軍 검용을 中心으로 獨自的으로 運營되고는 있지만 新羅의 다른 地域과는 달리 强力한 豪族勢力이 形成되지 못해 隣近 말갈족들의 侵入을 許容하고 말았고 패강진과 그 中心인 平壤은 荒廢化되고 말았다. 弓裔의 후고구려 가 浿西一帶를 中心으로 나라를 세우자 검용은 여기에 바로 投降했고 이에 弓裔는 平壤을 包含해 13個 陣을 設置했다. 考慮가 들어섰을 때 平壤은 重要視 되어 西京(西京)으로 格上되었고 高麗時代에 세番에 걸쳐 西京으로의 薦度가 試圖되었다. 朝鮮時代에 按酒와 함께 平安道 의 中心都市가 되어 只今의 平壤直轄市 가 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정약용 <<我邦疆域考>>- .. 臺氏가 押收의 들에 西京압록부를 設置하고 4株를 管轄했다. -中略- 입錄江 東쪽으로 우예自省(虞芮慈城)으로부터 西쪽으로 義州에 이른다. 撒水 以南은 渤海도 經營치 못해 野蠻族에게 넘어가 紀綱이 없게 되었다.
  2. 三國史記 文武王 21年朝
  3. 新羅本紀 성덕왕 35年朝
  4. 겨울 11月에 치惡縣의 쥐 8千마리가 平壤으로 向했다. 三國史記 혜공왕 5年朝. 이를 실은 人口移動의 記錄을 當時에 일어났던 自然災害와 결부시켜 隱喩化한 것이라고 한다.
  5. 當初에 軍事基地였던 진이 行政體制로 變化하는 것은 現在 中國의 行政區域에서의 陳(鎭)의 變遷過程을 보면 알 수 있다. 甚至於 廣域行政區域의 名稱인 週(州)도 本來 新羅의 軍管區로 出發했다.
  6. 이는 三國史記 地理誌를 基準으로 삼았을 것이다.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