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討論 : 韓國의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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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意見: 3年 前 (Kirschtaria님) - 主題: 歷史 사이드바

여러 時代에 걸쳐 있는 境遇의 敍述 [ 編輯 ]

All7676님이 현대에 臨時政府를 後三國時代에 渤海를 追加하였습니다. 이 部分에 對해 討論을 해보고자 합니다.

  • 臨時政府의 境遇는 1919年 設立되어, 1948年 解散하였으나, 주된 活動 期間은 日帝强占期였습니다. 韓國史에서의 現代를 어디부터로 非情하냐의 問題가 있긴합니다만, 普通 1945年 8月 15日을 起點으로 봅니다. 期間상으로는 3年程度가 겹치기는 하나 이를 틀에서 包含해서 敍述해야하는 가는 다른 問題라고 생각합니다.
  • 後三國時代는 甄萱이 後百濟를 建國한 900年을 起點으로 하여, 後百濟가 滅亡한 936年까지를 後三國時代로 다룹니다.
    • 渤海의 境遇는 698年 建國하여, 926年에 滅亡한 것으로 봅니다.
    • 高麗는 918年에 建國하였습니다.
    • 新羅는 三國時代-南北國時代를 거쳐, 後三國時代에 滅亡한 것으로 봅니다.

이와 같은 點에서 볼 때, 渤海는 南北國時代에 넣는 것으로 充分하며, 마지막 26年間이 後三國時代와 겹치기는 하나 三國의 對立에 直接的으로 加擔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後三國時代에 들어가시에는 不足합니다.

時代 區分은 巨視的으로 큰 區分을 하는 것이므로, 境界線에 걸친 境遇에는 選擇的으로 넣는 것으로 充分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강철 ( 討論 ) 2017年 12月 24日 (일) 17:11 (KST) 答辯

음, 그말도 一理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제생각엔 渤海나 臨政이 그前時代에 包含되었고, 다음時代에 먼저 滅亡했던 國家보다도 오래된 國家(渤海의 境遇 후고구려보다 國家가 오래維持되었고, 渤海를 後三國時代에 削除視 統一新羅와의 一貫性도 問題가됨)가 重複됬다는 理由로 國家가 빠진다면 後三國時代나 韓國史時代같이 時代 自體가 歪曲되어 비춰질 수 있다는 側面이 있어서 그部分度 생각해 보아야할문제인것같습니다.-- All7676 ( 討論 ) 2017年 12月 24日 (일) 19:17 (KST) 答辯

이 部分에 對해서는 兩者 討論으로는 決定 짓기 어려운 問題로 보아, 다른 使用者 분들의 意見을 묻기 위해 意見 要請 틀을 답니다. -- 이강철 ( 討論 ) 2017年 12月 24日 (일) 21:48 (KST) 答辯

同意합니다. 意見開陳付託드립니다.-- All7676 ( 討論 ) 2017年 12月 24日 (일) 21:57 (KST) 答辯

All7676님께서 編輯하신 理由에 對해서 共感합니다. 特히 臨時政府의 境遇에는 解放 後 美軍政과의 交涉 過程과 分斷 過程에서 빠뜨릴 수 없는 存在라고 보기에 그러합니다. 다만 틀에서만큼은 便宜를 위해 出發 時點을 揭載 基準으로 삼고, 다른 時代로 넘어가는 境遇는 反映하지 않는 것으로 整理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느 한쪽에 記載되어 있다고 해도, 그 名稱 옆에 記載된 沒落年度를 通해 確認이 可能하기에 크게 誤解하는 境遇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 밥풀 떼기 " 2017年 12月 24日 (일) 22:18 (KST) 答辯
渤海의 境遇 南北國 時代에만 追加하는 旣存 方案을 支持합니다. 大韓民國 臨時 政府의 境遇 현대에 追加하는 方案도 좋을 것 같습니다. 事實 現代의 始作을 1945年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1919年 3.1運動으로 볼 것인지에 對해서는 論議가 必要하다고 생각합니다. 大韓民國 政府는 1948年에 갑자기 樹立된 것이 아니라 1919年 3.1運動으로 臨時 政府가 樹立되고 오랜 獨立運動을 통해 마침내 正式 政府로 樹立되었습니다. 美國도 實際 政府가 樹立된 날이 아니라 그 前에 英國 植民地로부터 獨立宣言을 한 날을 美國 歷史의 始作으로 보듯이, 大韓民國도 "大韓獨立 萬歲"를 외친 1919年 3.1運動을 그 歷史의 始作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19年 4月에 國號를 '大韓民國'으로 定하고, 政治體制를 '民主共和制'로 明示한 憲法을 制定했고, 以後 初代 大統領으로 李承晩을 選出했으며, 立法/司法/行政의 3卷 分立을 갖춘 民主主義 政府를 構成했습니다.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制로 한다."라는 憲法 첫 句節은 1948年이 아니라, 1919年 3.1運動 直後에 만든 憲法 에 明示된 文句입니다. 비록 領土와 國民은 日帝 植民地 治下에 있었으나, 오랜 獨立運動과 美.蘇 聯合軍의 도움으로 光復을 하고, 正式 政府를 樹立했는데, 그 始作은 "獨立 宣言"을 한 1919年 3.1運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大韓民國의 始作은 1919年 3.1運動과 臨時 政府의 樹立이고, 現代의 始作 時點도 1919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以上 個人的 意見이었습니다. -- 阿斯達(Asadal) ( 討論 ) 2017年 12月 28日 (木) 04:12 (KST) 答辯
阿斯達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해도 어찌됐든 通常的으로는 現代를 光復 以後라 합니다. 이는 臨時政府 大韓民國 의 前身이냐와는 다른 槪念입니다. 一旦술먹고합시다 ( 討論 ) 2018年 1月 7日 (일) 09:37 (KST) 答辯
이강철님께서 잘 써주셨습니다. 現行 維持를 해도 딱히 歪曲해서 認識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一旦술먹고합시다 ( 討論 ) 2018年 1月 7日 (일) 09:37 (KST) 答辯

保護 案內 [ 編輯 ]

틀 本文에서 編輯 紛爭이 發生하고 있으므로 3週間 保護하였습니다. ??regards, Revi 2019年 9月 6日 (금) 10:27 (KST) 答辯

衛滿朝鮮의 追加 除外에 關하여 [ 編輯 ]

位만이 朝鮮人 或은 朝鮮系統 사람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韓國史에서 衛滿朝鮮을 빼버러야한다는 論據는 되지 않습니다. 衛滿의 國籍 問題가 衛滿朝鮮 政權의 民族 正體性 問題와 直結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위만 朝鮮도 朝鮮이라는 國號나 그 前부터 存在하던 政治 體制, 支配層을 그대로 維持했기 때문이죠. 首都도 王儉城에 그대로 뒀고요. 더 나아가면 애初에 이 時期에 近代 들어서 確立된 民族 正體性 운운하는 것 自體가 意味가 없죠 代表的인 境遇 中 하나가 淸나라입니다. 當時의 滿洲族 支配階層들은 自身들의 正體性을 維持하고자 人口의 絶對多數를 차지하는 한족에게 辮髮을 强要하기도 했지만, 結果的으로는 그 自身들의 言語인 滿洲語도 잊어버릴 만큼 한족에게 完全히 童話됬습니다. 現在 淸나라는 中國의 歷史로 取扱되잖아요. 衛滿朝鮮度 位만이 中國系件 朝鮮系건간에 自己 스스로가 朝鮮人들의 服飾을 하고 入國해서 朝鮮人들의 王이 됐으니, 그 正體性이야 어찌되었건 相關할 必要 없죠. 於此彼 왕이 中國人이였다손쳐도 古朝鮮의 正體性을 그대로 維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意見 있으시면 기탄없이 揭載 바랍니다. - Sjun9725 ( 討論 ) 2019年 9月 6日 (금) 17:40 (KST) 答辯

韓國史 틀에서 衛滿朝鮮 을 削除해서는 안 되고, 元來대로 復舊해야 합니다. 古朝鮮은 紀元前 108年에 한나라의 侵攻을 받아 滅亡했다고 記錄되어 있는데요. 그 當時의 古朝鮮 이 바로 衛滿朝鮮입니다. 衛滿朝鮮에 對한 歷史記錄은 中國 側 史書에 매우 仔細하고 正確하게 나옵니다. 紀元前 195年 中國 燕나라에 居住하고 있던 위만 은 約 1,000名의 무리를 이끌고 古朝鮮으로 亡命하였는데, 勢力을 기른 後 古朝鮮의 首都인 王儉城 으로 들어와 準王 을 내쫓고 紀元前 194年 王이 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以後 衛滿朝鮮은 眞番과 臨屯 等 周邊의 작은 나라들을 合倂하여 領土를 數千里로 擴張하였고, 變한(경남 金海市) 地域의 鐵을 漢나라에 파는 中繼貿易을 통해 크게 蕃盛했습니다. 衛滿朝鮮의 勢力이 强盛해지자 한나라 는 마침내 衛滿의 孫子인 우거왕 때, 衛滿朝鮮의 首都인 王儉城을 攻擊하여 約 1年間 熾烈한 戰鬪를 벌인 끝에 마침내 紀元前 108年 王儉城을 陷落시키고, 그 자리에 樂浪郡 等 이른바 '漢四郡'을 設置했습니다. 이런 歷史的 事實을 볼 때, 衛滿朝鮮은 古朝鮮의 後期 歷史에 該當하며, 韓國史의 一部分으로 보아야 합니다.
位만이 中國 燕나라 地域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記錄이 있는데, 그게 곧 位만이 한족 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當時 燕나라는 한족만 살았던 것이 아니라 古朝鮮 遺民들이 相當히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大韓民國 歷史學界는 位만이 朝鮮으로 亡命할 當時에 "상투를 틀고 朝鮮人 옷을 입었다"(?結蠻夷服)는 記錄을 土臺로 位만이 朝鮮 遺民 出身이라 推測하고 있습니다. 상투 는 朝鮮人들의 固有한 머리 模樣이며, 한족 은 상투를 틀지 않습니다. 結局 위만은 古朝鮮이 燕나라 眞個 의 侵入으로 요동 一帶 2千里의 넓은 땅을 喪失했을 때 그 地域에 남아 燕나라 國籍으로 살았던 朝鮮人이라고 본 것입니다. 實際로 位만이 고조선의 王이 된 以後에도 國號를 고치거나 首都를 옮기지 않고 王儉城에 繼續 머물러 있었으며, 朝鮮 사람처럼 상투를 틀고 朝鮮의 服飾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事項을 綜合해 볼 때, 衛滿朝鮮은 古朝鮮의 連續으로 보는 것이 妥當합니다.
결론적으로 衛滿朝鮮은 韓國史의 一部이며, 韓國史 年表에서 削除해야 할 아무런 理由가 없으므로, 예전 틀로 復舊하는 것이 맞습니다. -- 阿斯達(Asadal) ( 討論 ) 2019年 9月 7日 (土) 04:06 (KST) 答辯
넣는 것이 妥當하겠습니다. -- 양념派닭 ( 討論 · 寄與 ) 2019年 9月 17日 (火) 00:25 (KST) 答辯
黨 討論의 總意에 따라 衛滿朝鮮이 包含되는 버전으로 되돌렸습니다. ??regards, Revi 2019年 9月 17日 (火) 09:15 (KST) 答辯

틀 形式에 對해 [ 編輯 ]

@ Asadal , 쿠모野 : 元來 이 틀은 特需:差異/22513639 와 같았으나 2018年 9月 23日에 特需:差異/22513639 編輯을 통해 現在와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該當 編輯에 對해 어떤 總意가 있었나요?-- Namoroka ( 討論 ) 2019年 10月 30日 (水) 00:56 (KST) 答辯

歷史 사이드바 [ 編輯 ]

韓國의 歷史 틀을 타 國家의 歷史 틀과 같은 樣式으로 맞출 것을 提案합니다. Kirschtaria ( 討論 ) 2020年 7月 8日 (水) 16:01 (KST) 答辯

Kirschtaria 님이 提案하신 樣式은 單純히 묶여 있는 表로서 內容이 많거나 時間的 흐름과 相關 없이 羅列할 境遇에 效果的일 것입니다. 그러나 韓國史처럼 內容이 적으면서 時代의 흐름에 따라 變化 過程을 나타내야 할 境遇에는, 只今과 같이 열려있는 테이블에 色을 입히는 樣式이 視覺的인 面에서도 훨씬 效果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굳이 樣式을 統一할 必要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라別로 더 效率的인 樣式이 있다면, 나라別로 따로 採擇해서 使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따라서 只今과 같은 樣式을 維持할 것을 要請합니다. 逆으로 他 國家의 歷史 틀에서도 韓國史 틀과 같은 樣式의 適用을 檢討해볼 것을 提案합니다. Lazedoth ( 討論 ) 2020年 7月 12日 (일) 00:32 (UT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