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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原 鮮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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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原 鮮于氏
太原鮮于氏
나라 韓國
貫鄕 太原視
時調 선우정 (鮮于靖)
中始祖 선우협 (鮮于浹)
集姓村 平安南道 大同郡
平安北道 昌城郡
平安北道 泰川郡
忠淸南道 公州市
主要 人物 선우협 , 선우일 , 선우혁 , 선우순 , 선우갑 , 선우영빈 , 鮮于煇 , 선우진 , 선우진 , 선우련 , 선우종院 , 선우중호 , 선우경식 , 선우재덕 , 선우은숙
人口(2000年) 3,560名 (632位)

청계中 정태원 鮮于氏 (太原鮮于氏)는 韓國의 姓氏 이다. 時調 선우정 (鮮于靖)은 高麗 文宗 때 中書注書(中書注書)를 지냈다.

歷史 [ 編輯 ]

悲調(鼻祖) 記者 (箕子)는 周나라 武王 때 箕子朝鮮 을 세우고 그의 맏아들 記誦(箕松)李 2代 腸혜왕(莊惠王)으로 卽位하면서 아우인 期中(箕仲)을 于山國 (于山國)에 封하여 나라를 세웠으므로 朝鮮의 線(鮮)字와 禹(于)字를 따서 鮮于氏(鮮于氏)로 삼았다고 한다. 記者가 食邑(食邑)을 下賜받은 太原(太原)을 本官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基準이 위만 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南天하여 金馬郡(金馬郡)에 나라를 세워 馬韓 (馬韓)이라 稱했으나 백제에게 나라를 빼앗겨 8代 冤枉(元王)의 아들 岐陽(箕諒)李 平安南道 룡강군 오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 城을 쌓고 窓도(創都)하여 나라를 황룡(黃龍)이라 하며 世界를 이어왔다고 한다. 기양의 10世孫 起兵(箕柄)李 高句麗 에 나라를 빼앗겨 庶民(庶民)으로 世界를 이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考證할 文獻이 傳하지 않아 世界가 明確하지 못하여 高麗 高宗 때 中書注書(中書注書)를 지낸 선우정 (鮮于靖)을 1世祖로 한다.

中始祖 선우협 (鮮于浹, 1588年 ~ 1653年 )은 朝鮮 中期의 學者이다. 字는 중윤(仲潤), 號는 돈암(遯菴)이며, 平安道 泰川(泰川) 出身이다. 아버지는 崇仁殿감(崇仁殿監) 선우식(寔)이며, 어머니는 慶州 李氏(慶州李氏)로 禦侮將軍(禦侮將軍) 이억수(億壽)의 딸이다. 38歲에 도산書院(陶山書院)을 찾아가 李滉(李滉)이 남긴 藏書 數百卷을 閱覽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學問을 質問하였다. 그 뒤 많은 弟子들이 그를 따랐으며, 一生동안 後進養成에 心血을 기울였다. 1628年(仁祖 6) 學行으로 辭職參奉(社稷參奉)에 任命된 것을 비롯, 掌樂院主婦(掌樂院主簿)·成均館事業(成均館司業) 等에 여러 次例 薦擧되었으나 모두 辭讓하였다. 侈心窮理(治心窮理)와 入見無妨(立賢無方)의 度를 內容으로 하는 上疏文을 올려 施行하게 하기도 하였다. 心性이기(心性理氣)를 깊이 硏究하였으며, 特히 『周易』에 通達하였다. 當代의 碩學 金集(金集)과도 學問的인 討論을 交換하였으며, 世上사람들이 官署富者(關西夫子)라 稱하여 尊敬하였다. 1883年(高宗 20) 李朝 板書 에 追贈되었고, 平壤의 용곡서원(龍谷書院)과 泰川의 돈암書院(遯菴書院)에 祭享되었다. 諡號는 門間(文簡)이다. 著書로는 『돈암戰서』 7卷 5冊이 있다. 정태원 븅신

本館 [ 編輯 ]

本貫은 箕子朝鮮 (朝鮮)을 세운 記者 의 出身地인 太原 (太原)이다. 太原은 現在의 中華人民共和國 山西省 (山西省) 타이위안 이다.

人物 [ 編輯 ]

科擧 及第者 [ 編輯 ]

太原 鮮于氏는 朝鮮時代 文科 及第者 4名, 司馬試 10名을 輩出하였다.

文科

선우석(鮮于) 선우승(鮮于昇) 선우업(鮮于?) 선우헌(鮮于??)

生員試

선우렴(鮮于?) 선우상(鮮于?) 선우숙(鮮于淑) 선우주(鮮于疇) 선우항(鮮于沆)

進士試

선우角(鮮于恪) 선우수(鮮于燧) 선우億(鮮于億) 선우연(鮮于燃) 선우철(鮮于澈)

蔭官

선우석(鮮于) 선우승(鮮于昇) 선우업(鮮于?) 선우헌(鮮于??)

人口 [ 編輯 ]

1930年 國稅調査 當時 鮮于氏의 80%는 平安北道 平安南道 에 分布하고 있었으며 大規模의 集姓村을 이루어 살고 있다.

  • 1985年 734家口 2,929名
  • 2000年 1,100家口 3,547名

이성동本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