漆谷 기성리 三層石塔

漆谷 기성리 三層石塔
(漆谷 箕聖里 三層石塔)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寶物
種目 寶物 第510號
( 1969年 6月 21日 指定)
數量 1期
時代 南北國 時代
所有 國有
位置
칠곡 기성리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칠곡 기성리
漆谷 기성리
漆谷 기성리(大韓民國)
住所 慶尙北道 漆谷郡 동명면 기성리 1028番地
座標 北緯 36° 0′ 6″ 東京 128° 35′ 39″  /  北緯 36.00167° 東京 128.59417°  / 36.00167; 128.59417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漆谷 기성리 三層石塔 (漆谷 箕聖里 三層石塔)은 慶尙北道 漆谷郡 동명면 기성리에 있는 新羅의 三層石塔이다. 1969年 6月 21日 大韓民國의 寶物 第510號로 指定되었다.

법성사 터로 알려진 곳에 塔으로, 2段의 基壇 위에 3層의 塔身을 올린 形態이다. 各 層의 下段 部分만 5個의 階段을 이루고 있으며 基壇은 宇宙나 撐柱가 없고 안상(眼像)李 새겨져 있는 것이 特徵이다.

槪要 [ 編輯 ]

법성사(法聖寺)터로만 알려진 곳에 있는 塔으로, 2段의 基壇(基壇) 위에 3層의 塔身(塔身)을 올린 形態이다.

아래層 基壇은 8個의 돌로 構成되어 있으며,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模樣을 새겨 놓았다. 위層 基壇에는 둥글고 넓은 裝飾의 안상(眼象)을 各 面이 다 채워질 만큼 큼직하게 새겨 놓았다. 塔身의 몸돌과 지붕돌은 各各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마다 모서리기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지붕돌은 아래받침이 5단씩이고 네 귀퉁이는 輕快하게 치켜올려져 있으며, 塔 上部의 머리裝飾部分은 路盤만이 남아있다.

이 塔은 基壇이 2段으로 이루어진 點과 지붕돌 밑面의 받침酬價 5段인 點 等으로 보아 統一新羅時代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基壇에 眼象을 새겨 두었다는 點이 特異하며, 1971年 盜掘者들에 依해 윗部分이 부서져 있던 것을 復元하였다.

旣成里死地 [ 編輯 ]

기성리四肢는 '법성사'터로 傳하고 있으나, 이와 關聯한 文獻은 確認되지 않는다. 1969年 調査資料에는 '칠곡 期성동 三層石塔'이라는 名稱으로 石塔과 周邊 四肢에 對해 報告되었다. 調査當時 周邊은 耕作地였으며, 建物地 2個所, 石築, 礎石 等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以後 1977年 資料에는 石塔 現況에 對해서 言及하고 있다. 2000年代 以後에 刊行된 資料에는 四肢와 石塔에 對해 簡略히 敍述하고 있다. 또한 調査區域에서 遺物과 치石材들이 發見되면서 使役에 對한 推論이 可能하게 되었다.

가리四肢는 三層石塔이 있는 1028番地 一員이다. 이곳은 八公山 破戒峯과 도덕산 사이에 形成된 盆地이며, 四肢가 있는 법성마을은 盆地 東西쪽 끝에 있다. 이곳에서 直線距離로 東쪽 4km 程度 떨어진 八公山 西쪽자락에는 把溪寺가 있다.

四肢는 마을 南쪽에 있으며, 北西쪽 溪谷을 사이에 두고 山자락과 면하여 있다. 石塔 東쪽에는 낮은 언덕이 있다. 따라서 使役은 地形上 東쪽 언덕과 西쪽 溪谷사이에 南北으로 긴 平坦地이다. 石塔을 基準으로 北쪽에 位置한 941番地에는 現在 建物 造成을 위한 平坦化 作業을 하고 있다. 南쪽 1031-8番地 一圓은 石塔이 있는 中心區域보다 2~3미터 높게 形成되어 있다. 마을住民의 傳言에 따르면 南쪽8番地 一圓에는 대구지하철 工事 때 가져온 흙을 埋立하였다고 한다. 또한 期調査에 言及되었던 建物地, 石築, 礎石 長臺石 等도 耕作地가 造成되면서 毁損되었다고 한다.

遺物은 北쪽 941番地와 942番地에 많은 量이 散布되어 있다. 941番地의 朔土面과 942番地 耕作地 石築 사이에는 두께 0.8~2.1cm의 先文, 格子門, 魚骨불, 幾何學問, 無紋 瓦片과 高麗時代 土器篇, 朝鮮時代 土器篇 等이 있다. 大體로 統一新羅~朝鮮前期의 樣相을 보이며, 高麗時代 遺物 比重이 가장 높다. [1]

現地 案內文 [ 編輯 ]

이 塔은 統一新羅時代의 3層 石塔으로 높이는 5.2m이다. 여기에 법성사라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傳해진다. 절터는 밭으로 바뀌어 크고 작은 기와조각들이 밭이랑에 널려 있고 다음은 石材들이 밭둑의 一部를 이루고 있다. 이 塔은 윗 部分이 부서져 있던 것을 1971年 解體·復元한 것이다. 이 塔의 特徵은 基壇免席에 모서리 기둥을 본떠 새기지 않고 큼직한 窓模樣의 안상 만을 새겨 둔 點이다. 基壇 免席에 眼象을 새겨둔 境遇가 間或 있기는 하나 모서리기둥을 새기지 않고 안상만을 새긴 境遇는 없다. 相輪部에는 路盤이 남아 있다. 비록 큰 塔은 아닐지라도 가벼운 變化와 溫和하고 安定된 感이 있는 것으로 보아 9世紀에 建立된 것으로 推定된다. [2]

寫眞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의 사지 現況調査報告書, 慶尙北道 附錄, 2015 下, 文化財廳·韓國佛敎文化財硏究所
  2. 現地 '칠곡 期성동 三層石塔' 案內文에서 引用

參考 資料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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