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沆
(崔沆,
972年
~
1024年
7月 13日
(
陰曆 6月 5日
))은
高麗
의 文身이다. 者(字)는 內융(來融)이며, 本貫은
慶州
(慶州)이다.
최언위
의 孫子이자 最有婦(崔有孚)의 아버지이고, 더불어 이작충(李作忠)의 丈人이다.
生涯
[
編輯
]
新羅
末 時代 '三崔(三崔)' 中에 하나였던
최언위
의 孫子로,
991年
成宗
때 文科에 壯元 及第하여 內査 사인이 되었다.
穆宗
때 지空地로 知名人士를 官僚로써 많이 뽑았으며,
1009年
왕이 病席에 누워 있을 때 中樞院使로서
김치양
의 陰謀를 알아채고
채충순
과 함께
顯宗
을 卽位시켜 便을 막았다. 그 後 한림 學事·政黨 文學 等을 지내고 秋忠陣節僞史 功臣의 號를 받았다. 政堂文學으로 있을 때 30年間 廢止되었던 '
八關會
'를 부활시켰다.
玄宗의 名으로 維新(儒臣) 崔沆은 高麗 太祖 以下 7代祖의 實錄을 編纂하였다.
[1]
性品이 誠實하고 청렴하고 佛心이 깊었으며,
[2]
皇龍寺의 塔을 監督·受理하였다.
거란의 侵略 때 原本이 불타버렸다던 〈勳요 10兆〉는 偶然히 慶州 出身 崔沆의 집에서 發見되어 顯宗에게 바쳐졌다. 玄宗은 新羅系를 外家로 하고, 支持基盤 亦是 新羅系列의 臣下들이었던 王이다.
죽은 後
德宗
때 정광에 追贈되었다.
崔沆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