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沆 (97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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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沆
崔沆
高麗 의 政堂文學
在任 1010年 ~ 1023年
國王 高麗 顯宗
이름
港(沆)
內융(來融)
시호 절의(節義)
身上情報
出生日 972年
出生地 高麗 開京
死亡日 1024年(53歲)
死亡地 高麗 開京
國籍 高麗
性別 男性
學歷 991年 文科 壯元 及第
家門 慶州 崔氏
親姻戚 최언위 (親祖父)
최치원 (再從祖父)
최승로 (三從姪)
宗敎 佛敎

崔沆 (崔沆, 972年 ~ 1024年 7月 13日 ( 陰曆 6月 5日 ))은 高麗 의 文身이다. 者(字)는 內융(來融)이며, 本貫은 慶州 (慶州)이다. 최언위 의 孫子이자 最有婦(崔有孚)의 아버지이고, 더불어 이작충(李作忠)의 丈人이다.

生涯 [ 編輯 ]

新羅 末 時代 '三崔(三崔)' 中에 하나였던 최언위 의 孫子로, 991年 成宗 때 文科에 壯元 及第하여 內査 사인이 되었다. 穆宗 때 지空地로 知名人士를 官僚로써 많이 뽑았으며, 1009年 왕이 病席에 누워 있을 때 中樞院使로서 김치양 의 陰謀를 알아채고 채충순 과 함께 顯宗 을 卽位시켜 便을 막았다. 그 後 한림 學事·政黨 文學 等을 지내고 秋忠陣節僞史 功臣의 號를 받았다. 政堂文學으로 있을 때 30年間 廢止되었던 ' 八關會 '를 부활시켰다.

玄宗의 名으로 維新(儒臣) 崔沆은 高麗 太祖 以下 7代祖의 實錄을 編纂하였다. [1]

性品이 誠實하고 청렴하고 佛心이 깊었으며, [2] 皇龍寺의 塔을 監督·受理하였다.

거란의 侵略 때 原本이 불타버렸다던 〈勳요 10兆〉는 偶然히 慶州 出身 崔沆의 집에서 發見되어 顯宗에게 바쳐졌다. 玄宗은 新羅系를 外家로 하고, 支持基盤 亦是 新羅系列의 臣下들이었던 王이다.

죽은 後 德宗 때 정광에 追贈되었다.

崔沆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崔沆"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