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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수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최영수

요한   최영수   大主敎
樞機卿 職責 天主敎 大邱大敎區
大敎區 大邱大敎區長
管區 大邱管區 管區長
任期 2007年 3月 29日 ~ 2009年 8月 17日
前任者 이문희 바오로
後任者 조환길 他隊伍
聖職
司祭敍品 1970年 11月 6日
主敎敍品 2001年 2月 27日
個人情報
出生 1942年 3月 23日 ( 1942-03-23 )
일본 제국의 기 日本 帝國
腺腫 2009年 8月 31日 ( 2009-08-31 ) (67歲)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大邱 가톨릭대病院
安葬地 大邱市 中區 남산동 敎區聖職者 墓地 北緯 35° 51′ 36″ 東京 128° 35′ 17″  /  北緯 35.860131° 東京 128.588059°  / 35.860131; 128.588059
國籍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敎派 天主敎
學歷 가톨릭대학교
母校 가톨릭대학교
社目標語 그리스도와 함께

최영수 (崔榮壽, 1942年 3月 23日 ~ 2009年 8月 31日 )는 大韓民國 天主敎 大邱大敎區 第9代 敎區長 이다. 洗禮名은 요한 이다.

一代記 [ 編輯 ]

1942年 3月 23日 慶北 慶山에서 父親 최석암(비오), 母親 김정식(막시마) 사이 7男妹 中 셋째로 태어난 최영수는 神心 두터운 父母님의 가르침으로 해맑은 心性을 품고 자랐다. 特히 周邊 사람들을 보살피고 베푸는 것을 矜持로 삼았으며, 늘 謙遜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다. 同窓 최재용 神父(水原敎區 水原代理球場)도 2001年 崔 大主敎가 補佐主敎로 任命되던 當時 가톨릭新聞 과 가진 인터뷰에서 “남을 헤아릴 줄 아는 고운 性品을 지녀 同窓들이 잘 따랐다”며, “後에 司牧者로서 큰 몫을 다할 것이라고 期待했다”고 말했다.

1982~1986年 산격本堂 主任神父 時節에는 聖堂 建立을 위해 渾身을 쏟다 몇 番이나 煉炭가스에 中毒되고, 밥 代身 라면만 먹었다는 逸話는 有名하다. 慶州 城東本堂 主任神父 時節에는 公所를 짓기 위해 計劃한 豫算의 3倍를 建立費로 支援해 只今의 양남성黨을 세울 수 있었다고 傳해진다. 1972~1976年 永川本堂 主任神父 時節에는 本堂에서 信仰學校를 처음 導入할 程度로 靑少年 敎育에 깊은 關心을 나타냈다.

反面 溫和한 性品과 달리 業務에 있어서만큼은 合理性을 바탕으로 每事에 愼重하게 일을 處理했다. 그는 司祭 敍品 後 本黨과 特殊司牧 等 다양한 所任을 맡으며 어떤 일이든 熱情的으로 推進해 나가고 無難히 일을 處理해 ‘外柔內剛型 司牧者’로 깊은 印象을 남겼다. 特히 1995~1997年 第17代 가톨릭新聞 社長을 歷任했으며, 1996~2001年 大邱 평화방송 初代 社長으로 個國을 主導하는 等 宣敎 活動에도 最善을 다했다.

2000年 12月 22日 補佐主敎 任命 後 최영수는 2001~2004年 韓國 天主敎 主敎會의 正義平和委員會 委員長으로 活動하며 敎會의 가르침에 따라 大社會的으로 生命文化 定着과 人間尊嚴性을 守護하는데 앞장섰다.

무엇보다 崔 主敎는 死刑廢止 運動과 反生命法人 母子保健法 廢止運動 等에 발 벗고 나섰다. 崔 大主敎는 타 宗團 指導者들과 함께 死刑廢止에 對한 宗敎人들의 뜻을 모으는 데 球心的 役割을 遂行했으며, 2001年 6月 國會會館 내 大會議室에서 最初로 6代 宗團이 聯合해 死刑廢止 行事를 가지며 社會的 反響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寄與했다.

또한 새만금 갯벌 살리기 等 環境運動에도 努力을 기울였다. 崔 大主敎는 當時 主敎會의 次元에서 처음으로 새만금 干拓事業과 關聯해 公式立場을 밝히는 聲明書를 發表하기도 했다.

補佐主敎 任命 後 최영수는 5年 餘 동안 이문희 大主敎를 輔弼하며 總대리직을 遂行, 1997~1999年 열린 第1次 敎區 시노드를 通해 마련된 後續事業人 代理區體制 定着과 小共同體 運動 活性化 等에 邁進하며 2011年 敎區設定 100周年 準備의 기틀을 마련했다.

敎區設定 100周年 準備事業은 최영수가 2007年 4月 30日 大邱大敎區長에 着座하면서 더욱 可視化됐다. 같은 해 10月 23日 敎區 司祭硏修를 통해 崔 大主敎는 ‘다시 새롭게 2011’(Renew 2011)을 標語로 내건 가운데 第2次 敎區 시노드, 100周年 記念 大聖殿 建立, 100周年社 編纂 等 100周年 3代 記念事業을 公表했다.

지난 100年 間의 歷史를 되돌아보는 한便, 앞으로의 100年을 展望하면서 ‘다시 새롭게’ 敎區 全體에 福音精神을 불러일으키는 세 가지 記念事業을 公表한 崔 大主敎는 敎區 刷新과 새로운 跳躍의 발板을 마련하기 위해 敎區의 모든 力量을 100周年 記念事業에 쏟을 것을 當付했다.

崔 大主敎는 記念事業 公表의 자리에서 “敎區는 重要한 일을 決定할 때마다 會議를 통해 모든 司祭團의 意見을 收斂할 것”이라며, “앞으로 다가올 100周年을 向해 우리는 이제 앞만 보고 달려 나가면 主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敎區 發展을 위해 온 熱情을 쏟아오던 최영수 大主敎는 뜻밖의 重病으로 2009年 8月 17日 敎皇 베네딕토 16歲 의 受諾으로 大敎區長職을 辭任했고, 大邱가톨릭大學病院에서 治療를 받아오다 持病 惡化로 2009年 8月 31日 午前 6時 20分 享年 67살에 善終했다. [1] 최영수 大主敎의 마지막 瞬間에는 敎區長 職務代行 조환길 主敎, 遺家族, 醫療陣을 비롯해 몇몇 敎區廳 司祭들이 함께했다. 大邱大敎區 事務處長 하성호 神父는 “大主敎님께서 病患 中에서도 敎區 100周年과 敎區 發展을 위해 努力해 달라고 하시며 腺腫하실 때까지 敎區를 위해 祈禱하셨다.”라고 말했다.

腺腫 直後인 午前 8時 40分 頃 大邱 가톨릭대病院 葬禮式場 地下 1層 參觀室에서 첫 年度가 바쳐졌다. 이 자리에는 利用길 第1代理區 主敎代理 神父를 비롯, 司祭와 修道者 10餘 名이 함께했다.

以後 崔 大主敎의 遺骸는 遺家族들이 함께한 가운데 計算聖堂으로 옮겨졌다. 大邱大敎區 葬儀委員會(委員長 조환길 主敎)는 이미 計算聖堂에 殯所를 마련하고 鳶島客을 맞을 準備에 나서는 等 迅速한 움직임을 보였다.

조환길 主敎는 午前 9時40分頃 大邱가톨릭大學病院을 出發, 計算聖堂에 到着한 崔 大主敎의 運柩 行列을 맞았으며, 곧 司祭團이 遺家族과 信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有害를 聖堂 안으로 옮겨 祭臺 앞 琉璃管에 安置했다.

午前 10時에는 遺族과 敎區 司祭團과 修道者, 信者 等 200餘 名이 함께한 가운데 前 大邱大敎區長 이문희 大主敎 主禮로 첫 追慕미사가 奉獻됐다. 遺骸가 安置된 計算聖堂에는 崔 大主敎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많은 信者가 몰렸다. [2]

최영수 大主敎의 葬禮미사는 2009年 9月 4一日에 擧行되었다. 葬禮 節次는 4日 午前 9時 계산성당에서 열린 出棺 禮節로 始作됐다. 聖歌, 聖水 禮式과 祈禱, 焚香과 遺家族들의 故人에 對한 마지막 人士 等이 끝난 뒤 運柩 車輛은 計算聖堂을 빠져나와 葬禮미사 場所인 대구가톨릭대학교 남산동 캠퍼스 聖 金大建 記念館으로 移動했다. 葬禮미사는 午前 10時부터 조환길 主敎의 主禮로 韓國 天主敎 主敎團 스물일곱 名과 大邱大敎區 司祭團의 共同 執典으로 擧行됐다. 聖 金大建 記念館에 들어선 崔 大主敎의 官은 一般 信者의 葬禮미사 때와는 달리 除隊 쪽이 아닌 新磁石을 向하도록 놓였다. 司祭는 비록 故人이 됐지만 信者들을 위한 司祭로서의 마지막 職務를 다한다는 意味를 담고 있다.

이날 記念館 내 司祭와 市民 3千餘名이 葬禮미사를 함께했고, 入場하지 못한 信者 3千餘 名은 記念館 앞에 마련된 大型 스크린을 통해 葬禮미사를 지켜보며 奉獻했다.

大邱大敎區 하성호 事務處長이 崔 大主敎의 略歷을 紹介한 뒤 故人의 育成이 스피커를 통해 2分假量 흘러나왔다. 이어 駐韓 敎皇大使人 오스발도 파딜랴 大主敎가 敎皇 베네딕토 16歲의 哀悼門을 朗讀했고, 조환길 主敎가 葬儀委員長으로서 人事를 했다.

下棺 禮節은 大邱市 中區 남산동 天主敎 大邱大敎區靑 內 敎區聖職者 墓地에서 치러졌다. 前날 午後 10時 계산성당에서 조환길 主敎의 主禮로 치러진 殮襲과 入棺 禮節에서 囚衣 代身 祭衣를 입은 崔 大主敎는 主敎館을 쓰고 손에 默珠를 든 채 大主敎 文章이 새겨진 香나무 棺에 入棺됐다. 棺이 들어간 墓地의 넓이는 3.96m 2 (1.2坪)이다. 墓地는 흙으로 封墳을 한 다음 일정한 期間이 지난 後에 石板을 덮게 된다. 따로 床石을 세우지도, 除隊를 쌓지도 않았다.

大邱大敎區 關係者는 "一般 公園墓園의 墓地도 9.9m 2 (3坪)를 넘는 데 비하면 敎會의 큰 어른이신 大主敎의 墓域으로는 貧弱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며 "自身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奉獻한 聖職者들의 儉素한 삶은 永遠한 安息處가 된 墓地에서도 無言의 울림을 준다."라고 했다. [3]

各州 [ 編輯 ]

  1. 우세민 (2009年 9月 6日). “최영수 大主敎의 발자취” . 가톨릭 新聞 . 2009年 9月 12日에 確認함 .  
  2. 우광호, 우세민, 이도경 (2009年 9月 6日). “최영수 大主敎 追慕 綜合” . 가톨릭 新聞 . 2009年 9月 12日에 確認함 .  
  3. 김수용 (2009年 9月 4日). “큰 울림 남기시고…, 儉朴하게 永眠의 길綜合” . 每日新聞 . 2009年 9月 12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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