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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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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년 (崔永年, 1859年 陰曆 2月 6日 ~ 1935年 陽曆 8月 29日 )은 大韓帝國 日帝强占期 의 言論人이다. 宗敎 佛敎 다. 大韓帝國 末期에 一進會 會員으로 活動했으며 新小說 作家 최찬식 의 아버지이다. 筆名으로 梅夏産인 (賣下山人, 梅下山人), 매下生 (梅下生)을 썼다.

生涯 [ 編輯 ]

1894年 京畿道 光州 에 私立 始興學校를 設立하고 獨立協會 의 活動에 參與한 開化派 出身이다.

1907年 一進會 會員이 되면서 大韓帝國 軍隊 解散 以後 活潑해진 義兵 抗爭 彈壓을 위한 〈거의宣言書(擧義宣言書)〉 發表에 同參하는 等 親日派 로 活動했다. 一進會 이름으로 發表된 〈거의宣言書〉는 義兵 運動을 繼續하면 殺戮하겠다는 脅迫을 담고 있는 文書이다. 特히 최영년은 義兵을 暴徒로 規定하고 이들의 運動을 晻昧(闇妹)하다고 卑下한 〈警告脂肪暴徒門(警告地方暴徒文)〉을 直接 作成해 頒布하기도 했다.

1909年 에는 송병준 系列의 《 國民新報 》 主筆을 거쳐 第4代 社長에 任命되었다. 一進會 機關紙 格인 國民新報는 韓日 倂合 條約 締結을 促求하는 一進會의 倂合 請願 運動을 支援하는 論說을 실어 《 大韓每日申報 》로부터 “難敵倍”로 指稱되던 親日 媒體였다. 《 大韓季年史 》에 따르면 이때 宋秉畯이 自身과 사이가 좋지 않은 한석진을 社長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최익현 의 7寸 조카를 自處하는 최영년을 社長에 앉혔으며, 漢學에 밝고 글재주가 뛰어난 최영년이 各 機關에 보내는 倂合 請願 趣旨의 글을 度말아 作成하여 “침 뱉으며 辱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만큼 많은 非難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최영년은 國民新報 社長으로 勤務하면서 一進會 政見協定委員을 지내고 이토 히로부미 楸島를 위한 團體에 參加했으며, 一進會의 建議書 作成에도 加擔했다. 1910年 에는 이용구 系列의 親日團體인 大寒常務組合 本部長에 任命되었고, 1912年 韓日 倂合에 세운 功을 인정받아 日本 政府로부터 韓國倂合記念章 을 授與받았다.

1917年 《朝鮮文藝》 發行人 兼 編輯人을 맡아 메이지 天皇 의 婦人인 쇼켄 皇太后 의 죽음을 哀悼하는 詩를 지어 이 雜誌에 싣는 等 文筆을 利用한 親日 活動을 繼續했다. 日本의 統治가 始作된 뒤 “文明의 氣象이 增進하고 昇平의 光輝가 發揚되었다.”라고 評價하거나 요순 時代에 比喩하는 等 日帝 統治를 讚揚하는 글을 비롯하여, 日帝 下의 朝鮮 民衆을 “太平聖代 太平한 사람들”로 描寫한 漢詩를 創作해 發表했다.

1919年 警 儒敎 系列의 親日 團體인 代動詞門會 發起人과 理事를 지냈고, 1930年 에는 亦是 儒敎系列 親日 團體로 김종한 李 院長을 맡은 大聖院 (大聖院) 姜社長에 任命되었다.

최영년은 1910年 韓日 倂合 前에 이미 아들 4兄弟와 그 親舊들에게 日本式 이름을 지어줄 만큼 앞서가는 親日 行跡을 보여 “盜賊보다 더 凶惡한 永年같은 저 凶賊은 天下萬國 歷史上에 前無後無 하리로다.”라는 赤裸裸한 非難이 《大韓每日申報》 評論란에 실릴 程度였다. 1926年 《朝鮮語》라는 雜誌를 통해 朝鮮 사람들에게 日本語 를 배울 것을 强勸하는 글을 發表한 바도 있다.

事後 [ 編輯 ]

2006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06人 名單 2002年 公開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言論 部門에 選定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6年 12月). 〈최영년〉 (PDF) . 《2006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944~956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