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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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千祥炳
作家 情報
出生 1930年 1月 29日 ( 1930-01-29 )
日本 帝國 효고현 히메지視
死亡 1993年 4月 28日 ( 1993-04-28 ) (63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籍 大韓民國
職業 是認 , 文學 評論家 , 兒童文學家
學歷 서울大學校 經濟學科 中退
宗敎 天主敎 (洗禮名 : 시몬)
筆名 雅號: 深穩(深溫)
장르 詩文學, 隨筆, 評論, 童話
配偶者 목순옥
子女 없음

천상병 (千祥炳, 1930年 1月 29日 ~ 1993年 4月 28日 )은 大韓民國 의 詩人, 文學評論家이다. 號는 深穩(深溫), 本貫은 營養(潁陽)이다. 日本 효고현 (兵庫縣) 히메지 (姬路)에서 出生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日本 효고 現 고베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原籍地는 大韓民國 慶尙南道 馬山 이다. 宗敎는 天主敎 이며, 逍風 온 俗世를 떠나 하늘 故鄕으로 돌아간다는 內容을 담은 詩 《 귀천(歸天) 》으로 有名하다. 1967年 不幸히도 동백림 事件 에 連累되어 甚한 獄苦와 拷問 을 겪었으며, 1993年 持病인 肝硬化 로 인해 他界하였다.

生涯 [ 編輯 ]

日本 효고현 히메지 에서 韓國人 父母에게서 出生했으며, 8.15 光復 後 父母를 따라 歸國하였다. 1949年 마산중학교 5學年 때, 《竹筍(竹筍)》 11집에 詩 《空想(空想)》 外 1篇을 發表했으며, 여러 文藝誌에 詩와 評論 等을 發表했다. 1951年 서울大學校 商科大學 經濟學科에 入學해 다니다가 中退했으며, 中央情報部 에 依해 誇張된 事件으로 判明된 所謂 ' 동백림 事件 '( 1967年 )에 連累되어 6個月間 獄苦를 치렀다. 親舊 강빈구에게 막걸리 값으로 5百원,1千원씩 받아 썼던 돈은 工作金으로 誇張되었으며, 千祥炳 詩人 自身도 電氣 拷問 으로 몸과 精神이 멍들었다. 그때의 悽慘한 受難을 千詩人은 이렇게 말한다.

"이젠 몇 年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고문)당한 그날은...//이젠 몇 年이었는가/무서운 집 뒷窓가에 여름 昆蟲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握手를 請한 그날은.../네 謝過 뼈는 알고 있다./진실과 苦痛/그 어느 쪽이 强者인가를..."

以後 千詩人은 여러 逸話들을 남기는데, 1970年 에는 無緣故者로 誤解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收容되는 일도 있었다. 當時 知人들은 갑자기 사라진 千詩人이 죽었다고 생각, 遺稿詩集 《 》를 發表하였다.

當時 詩集內容의 一部는 다음과 같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靈魂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果毅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1972年 親舊의 女同生인 목순옥 女史와 結婚한 千祥炳 詩人은 1979年 詩集 《 酒幕에서 》를 민음사에서 펴냈고, 《 千祥炳은 天上 詩人이다 》( 1984年 ), 《 저승가는 데도 旅費가 든다면 》( 1987年 ), 詩集 《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1991年), 童話集 《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1993年)도 發表하였다. 千詩人은 하느님 에 對한 素朴하고 純粹한 基督敎 적 信仰을 보여주는 作品活動度 하였다.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대우주의 精氣(精氣)가 모여서/되신 분이 아니실까싶다.//대우주는 넓다./너무나 크다.//그 큰 宇宙의 精氣가 結合하여/우리 하느님이/되신 것이 아니옵니까?"(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千祥炳은 改宗을 하지는 않았다. 天主敎 明洞聖堂 을 다니다가 81年부터 改新敎( 長老敎 ) 연동敎會 로 나갔다.

"나는 只今까지 約 30年동안은/명동 天主聖堂에 다녔는데/ 그러니까 어엿한 天主敎信徒인데도/81년부터는/기독교 연동교회로 나갑니다./주임목사 김형태 牧師님도/대단히 훌륭하신 牧師님으로/ 그리고 基督敎放送에서/그동안 두番 說敎를 하셔서/나는 드디어 그분의 연동교회엘/나갈 것을 決心하고 나갑니다./교회당 構造도 아주 敎會堂답고/조용하고 아늑하여 기뻐집니다./아내는 미리 연동교회였으나/그동안 가톨릭에 拘礙되어 나 혼자/鳴動 天主聖堂에 나갔었으나/그런데 81年부터는 다릅니다./한번밖에 안 나갔어도 그렇게 좋으니/이제는 연동교회에만 나가겠습니다./물론 改宗은 않고 말입니다./배신자라는 말 듣기는 아주 싫습니다."(연동교회)

1993年 4月 28日 持病인 肝硬化症 으로 議政府市 장암동 自宅에서 他界했고, 議政府 公園墓地에 安葬되었다. 以後 유고詩集 《나 하늘로 돌아가네》, 《千祥炳 全集》李 發表되었다. 2007年 5月 1日 에는 第 4回 천상병 藝術祭가 천상병이 죽을 때까지 10餘 年 間 居住한 議政府市 에서 열리기도 했다. [1]

作品 目錄 [ 編輯 ]

  • <德壽宮의 午後>
  • <어둔 밤에>
  • 《새》
  • <장마>
  • <間 봄>
  • <귀천>
  • 《酒幕에서》
  • 《저승 가는데도 旅費가 든다면》

[2]

드라마化 [ 編輯 ]

學歷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 配偶者 : 목순옥(1935年 ~ 2010年 8月 26日)
    • 膝下 없음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경인일보 第4回 천상병 藝術祭
  2. “韓國現代文學大辭典 - krpia” . 2021年 4月 7日에 確認함 .  
  3. 聯合 (1994年 12月 17日). “<放送> K-1TV <人間劇場-歸天> 千祥炳時人 삶 그려” . 聯合뉴스 . 2015年 11月 30日에 確認함 .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