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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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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준경
拓俊京
朝奉大夫 檢校 戶部尙書
門下侍郞平章事
身上情報
出生日 1062年
出生地 高麗
死亡日 1144年 2月 (陰曆)
死亡地 高麗 開城
國籍 高麗
性別 男性
家門 谷山 척氏
父親 척偉功
母親 未詳
配偶者 未詳
子女 척順

척준경 (拓俊京, 1062年 ~ 1144年 陰曆 2月 )은 高麗 중기의 管理이자, 武臣이다. 本貫은 谷山 (谷山)이며, 檢校大將軍(檢校大將軍) 척偉功 의 아들이다.

黃海道 穀酒(谷州: 黃海北道 谷山郡 ) 出身이다. 1104年 (肅宗 9)부터 1109年 까지 尹瓘 , 오연총 , 왕자지 等과 함께 咸鏡道 에 侵入한 女眞族 을 몰아내고 東北 9星 을 쌓는데 寄與하였다. 뛰어난 勇猛으로 女眞族 征伐에 從軍하여 많은 功을 세웠으나, 이자겸 과 함께 專橫을 일삼아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1070年頃 檢校大將軍(檢校大將軍) 척偉功 의 아들로 黃海道 穀酒( 谷山 )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家門은 寒微한 地域 鄕吏 집안으로 가난해 學問을 배우지 못하고 無賴輩와 사귀므로 서리(胥吏) 되기를 바랐으나 되지 못했다. 肅宗 이 王子 身分으로 鷄林共(鷄林公) 翁(?)으로 불리고 있을 때 肅宗을 섬기게 되어 肅宗 卽位年인 1095年에 樞密院 別加(樞密院別駕)가 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1104年 1月 척준경이 樞密院에서 9年間 勤務하다가 職責을 얻게 된다. 이때 동여진의 오라數와 部內로가 部族間 다툼을 벌였는데 이때 다툼에서 밀려난 部內로는 軍事 1753名을 이끌고 高麗로 逃亡을 왔다. 平素 部內로와 親하던 高麗朝廷은 그를 欣快히 받아주었고, 이로 인해 火가 난 오라수 는 그의 將帥인 공型과 志操에게 起兵을 주어 정주성으로 쳐들어가게 했다. 그리하여 朝廷에서는 門下侍郞平章事 林間을 동북면行營兵馬使로 삼아 이를 鎭壓하라 命을 내린다. 척준경度 林間 (林幹)의 副官으로 出戰하게 된다.

女眞族 征伐 [ 編輯 ]

第2次 女眞族 討伐 [ 編輯 ]

1104年 (肅宗 9) 陰曆 2月 동북면 兵馬使 林間 이 井州(定州)에서 訓鍊되지 않은 軍士를 無理하게 出征시켰다가 동여진 과 싸워 크게 敗하고 戰死했으며 정주성의 陷落 危機에 直面했는데, 척준경이 敵將 둘을 베는 等 追擊해오는 敵의 氣勢를 꺾었기 때문에 女眞族이 놀라 退却하고 남은 兵士들이 無事히 돌아올 수 있었다. 拓俊京은 林間에게 武器와 甲옷입힌 말(介馬)을 얻은 뒤, 혼자 女眞族 騎兵隊를 向해 突進했다. 그는 女眞族 騎兵隊의 窓에 베였으나 騎兵隊 틈사이를 헤치고 敵將 1名을 베어 죽였고 捕虜인 俊敏, 德린과 함께 活路 各各 女眞族 1名씩 쏘아 죽이자 女眞族 軍士들이 놀라 動搖하였다.

척준경이 물러나려 하자 餘震起兵 100餘名이 뒤를 쫓았는데 이때 숲으로 들어가 追擊하는 女眞族 長壽 1名을 射殺하였다. 姓까지 退却하니 城壁에서 對象(大相) 인점이 또 敵將 1名을 죽이자 指揮官을 잃은 女眞族 軍士들은 動搖하여 달아났다. 그러나 高麗軍 戰死者 多數 發生으로 敗戰의 責任을 지고 황유현, 松蟲, 王공윤, 條規 等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罷免되었으나, 拓俊京의 이름은 이 싸움을 契機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功으로 千牛衛 錄事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가 되었다. 그해 3月 尹瓘 과 함께 다시 女眞族 討伐에 나섰으나 不得已 敗戰하였다.

肅宗은 윤관으로 林間을 代身하게 하였으나, 陰曆 3月에 윤관이 싸워도 女眞族에게 밀려 强化를 請하고 돌아오자 크게 憤怒하여 여진 征伐 計劃을 推進하게 되었다.

第3次 女眞族 討伐 [ 編輯 ]

都元帥 尹瓘

肅宗이 昇遐한 後 卽位한 睿宗 1107年 17萬 大軍을 編成하여 女眞族을 攻擊하게 하였다. 이때 拓俊京은 지난날 지은 罪를 윤관이 容恕하였기에 용감히 싸워 拔群의 活躍을 보였다.

1107年(睿宗 2年)에 女眞族의 動態가 尋常하지 않다는 한 邊將(邊將)의 緊急報告를 接하자 王命으로 都元帥 尹瓘 , 副元帥 오연총 의 副官이 되어 17萬 大軍을 거느리고 女眞族 征伐에 出征하였다. 當時 女眞族은 우리 나라 東北部에서 滿洲에 걸쳐 살면서 北部 國境地帶인 咸興 地方을 威脅하자 高麗의 北進 政策에 逆行이 되었던 女眞族을 掃蕩하려고 出征하였으나 累次 失敗하고 心慮 끝에 그 原因이 女眞族의 騎兵임을 깨닫고 王命을 받아 오연총은 윤관과 特殊部隊 17萬을 거느리고 여진村落 135個를 쳐서 砲로 1030名, 射殺 4940名 等 큰 功을 세웠다.

1107年의 活躍 [ 編輯 ]

1107年 (睿宗 2) 陰曆 12月 出廷하기에 앞서 女眞族 酋長들에게 예전에 抑留했던 酋長들을 풀어준다고 하여 高麗 땅으로 불러들이고는 모두 죽였는데, 高麗 側의 말을 믿지 않은 一部 酋長은 千里長城 밖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다. 윤관을 따라 中軍 病魔祿仕(中軍兵馬錄事)로 出征한 拓俊京은 김부필 (金富弼 : 金富軾의 兄), 최홍정 과 함께 이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出征 後 女眞族들이 石城(石城)에서 頑强하게 籠城하자 先頭에 서서 女眞族을 무찔렀고, 그 때문에 軍士들의 士氣가 올라 城을 占領할 수 있었다. 이 싸움에서의 專攻으로 緋緞 30疋을 下賜받았다.

그해 12月 尹瓘 오연총 은 17萬 名의 軍士를 中·左·右의 3軍으로 編成했으며 水軍(水軍)까지 動員해 餘震征伐에 나섰다. 高麗軍은 一擧에 쳐들어가 女眞族을 쫓아내고 9城을 쌓았다. 처음 女眞族을 攻擊하는 척 하다가 後退한 뒤, 餘震酋長에게 使者를 보내 高麗가 앞서 잡아둔 女眞族 許政(許貞)·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겠다고 거짓通報를 하자, 女眞族 酋長은 400餘名의 護送 兵力을 보내왔는데, 이때 윤관과 오연총은 이들을 誘引하여 거의 殲滅시키고 사로잡았다.

以後 윤관의 麾下에서 活躍하다가 그에게 別途의 部隊를 編成하여 石城을 追擊의 名을 받는다. 尹官軍의 奇襲攻擊에 눌린 餘震이 退却하여 東音聲(冬音城)으로 숨자 精銳部隊를 編成하여 追擊, 다른 餘震軍이 숨은 石城(石城)을 追擊하라는 尹瓘 의 命을 받고 城을 攻擊, 防牌를 들고 石星의 城壁을 올라가 性에 潛入하여 女眞族 軍士들과 城에서 攻防戰을 벌여 勝利했다. 女眞族이 再起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擊破하여 殲滅하였다. 척준경軍이 石城에서 攻防戰을 벌이는 사이 윤관은 親히 이끌고 左軍과 함께 石城을 陷落시켰다. 이날 征伐軍 全部對는 女眞族을 크게 擊破하여 需給1萬個를 얻었고 동여진의 要乙代와 麾下 3230名의 降伏을 받아내는 成果를 얻었다. 拓俊京은 石城에 潛入한 공으로 綾羅(綾羅) 30疋을 받았다.

1108年의 活躍 [ 編輯 ]

副元帥 오연총

1108年 (高麗 睿宗 3年) 陰曆 1月 오연총 , 尹瓘 , 왕자지 等과 함께 別武班을 이끌고 다시 出征하였다.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淨甁 8,000餘名을 데리고 街閑村(加漢村) 入口의 작은 길로 나가니, 풀숲 사이에 埋伏하던 女眞族 軍士는 윤관과 오연총의 軍士가 이르는 것을 기다려서 이를 急히 攻擊하여 殲滅시켰다. 이때 윤관이 거느린 軍士가 進軍하던 中 街閑村 戰鬪 途中 險曲에서 埋伏에 걸려들어 大部分 죽고 다만 10餘 名이 남았다. 이때 都元帥 윤관과 副元帥 오연총 과 함께 女眞族 에게 포위당하고 捕虜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形勢가 위태로워지자, 화살에 맞은 오연총이 사로잡히기 前에 急히 使者를 보내 危急함을 알렸다. 그러나 척준경이 後發隊를 이끌고 急襲하여 겨우 救出되었다.

拓俊京은 아우 척준신 이"敵陣이 堅固하여 좀처럼 突破하지 못할 것 같으데 공연히 쓸데없는 죽음을 當하는 것이 무슨 利益이 있겠습니까?"라며 挽留에도 不拘하고 拓俊京은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奉養하거라! 나는 이 한 몸을 國家에 바쳤으니 義理上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答辯하며 急히 精銳兵士 10餘名을 거느리고 敵陣 속으로 突擊하여 女眞族들이 包圍를 풀고 달아나게 했다. 瞬息間에 赤軍 10餘名을 죽이고 윤관을 救出한 刹那,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支援軍이 나타나 尹瓘 오연총 을 救出하였다. 無事히 榮州(英州 : 考慮가 占領地에 設置한 9星 中의 하나)로 돌아온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感激해하였다. 윤관은 領主城으로 돌아와 拓俊京에게 고마움의 表示로 養子로 對하였고, 拓俊京을 闔門至厚로 昇格시켰다.

以後 敵이 騎兵과 步兵 2萬을 이끌고 領主城 南쪽으로 進軍하였다. 윤관과 임언 , 오연총 等은 防禦에 置重하고자 했으나 拓俊京은 反對하며 敵과 싸우고자 하였다. 윤관은 拓俊京의 勇猛을 믿어 決死隊를 보내 敵을 치게하였다. 決死隊를 이끌고 城밖으로 나간 척준경軍은 바로 敵軍 19名의 머리를 베었고 女眞族 先發隊는 놀라서 退却, 北쪽으로 달아났다. 이를 城壁위 累代에서 본 尹瓘 等이 累代에서 내려와 이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서로 절을 하였다.

척頃입費도, 尹瓘 等이 女眞族征伐 直後 國警備를 세우는 場面 (17世紀 民畫)

以後 尹瓘, 오연총은 이에 祭場들을 거느리고 中性大都督府(中城大都督府)로 모였다. 이때 권지승選 왕자지 가 공險性(公險城)으로부터 軍士를 거느리고 都督府로 오던 中 女眞族 長壽 사현(史現)의 軍士를 만나 갑작스런 攻擊을 받아 그가 이끄는 軍隊가 敗頹하고, 危機에 處하자 拓俊京은 勇猛과 基地로써 왕자지를 救援하여 女眞族들을 敗退시켰으며, 왕자지가 말을 잃어버리자 直接 敵陣에 달려가 女眞族 兵士 한名을 쓰러뜨리고 말 한疋을 빼앗아서 왕자지에게 주기도 했다.

2月 우야속은 大軍을 이끌고 熊州性(雄州)에 進擊했다.우야속 軍이 熊州城을 包圍하자 怯에 질린 高麗軍은 움직이지 못했으나 최홍정이 軍士들을 타이르고 激勵하니, 잃었던 戰意를 가지게 되었다. 곧 4門을 열고 一齊히 나가 攻擊하여 크게 이겼는데, 사로잡고 벤 것이 80級, 兵車(兵車) 50餘 輛, 中擧(中車) 2百 輛, 말 40疋을 鹵獲하였고, 그 外에도 鹵獲한 武器는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하지만 時間이 지날수록 敵의 包圍가 심해지자 城 안에 있던 拓俊京은 狀況이 危急함을 듣고 軍士의 해진 옷을 입고 홀로 밤에 줄에 매달려 性을 내려가, 井州로 돌아가서 軍士를 整頓하고 井州에서 援軍을 거느리고 와 통태진을 通過하여 야등포로부터 吉州에 이르러 女眞族들을 次例次例 擊破했다.

1108年 陰曆 8月과 9月에도 왕자지와 함께 싸워 專攻을 세워, 8月엔 함주와 榮州, 9月엔 사지령에서 女眞族을 大破하여 總 需給 60個를 얻었고 3名을 捕虜로 잡았다. 그러나 以後 餘震의 反擊이 거세지고 朝廷에서도 和親을 主張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1109年 撤收해야 했다. 그러나 女眞族을 相對로 수많은 專攻을 세움으로써 名聲이 높아지고 數次例 昇進을 거듭했으며 睿宗은 拓俊京의 專攻을 致賀하는 뜻에서 行營病魔判官에 임명하고 1109年 5月에 睿宗은 아버지 척偉功을 宮闕로 불러들여 慰勞하고 준경의 功을 致賀하고 술과 고기, 銀한덩이, 멥쌀 10席을 上으로 하사하였다.

以後 女眞族에 對한 態度 [ 編輯 ]

1109年 7月 衛尉寺 소경이 되었다. 女眞族을 征伐할 때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勇猛을 떨쳤던 척준경이었으나, 戰爭이 끝난 後에는 女眞族을 신중하게 對해야 한다는 態度를 보였다.

1115年 陰曆 1月 遼나라 에 反旗를 들었던 완안 阿骨打 金나라 를 세우고 皇帝라 稱하자, 遼나라의 天祚帝 野率演戱(耶律延禧)는 大軍을 編成하여 女眞族을 鎭壓하려 했으나 遼나라軍은 金나라軍에게 大敗하였다. 그해 陰曆 8月 天祚帝는 다시 15萬 大軍을 編成하여 金나라를 攻擊하려 했는데, 이때 高麗에도 使臣을 보내어 金나라와의 싸움에 軍士를 보내 달라고 하였다. 大多數의 臣下는 軍士를 보낼 것을 主張했으나 拓俊京은 김부일 · 김부식 等과 함께 女眞族 征伐 以後 國力이 回復되지 않았음을 理由로 反對하였다. 結局 出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天祚帝는 金나라軍과 싸워 또 한 番 悽慘한 敗北를 當했다. 天祚帝는 陰曆 11月에도 使臣을 보내 高麗軍의 出兵을 要請했으나 끝내 成事되지 않았다.

1123年 參知政事 , 二部 相서 를 거쳐 1124年 12月 中書侍郞平章事(中書侍郞平章事)에 任命됐다. 그러나 文臣 官僚들의 蔑視와 無時로 1125年 4月 辭職하고 落鄕하였다. 이에 人種은 최식, 以後를 보내 그를 달래어돌아오게 했다. 1125年 다시 中書侍郞 平章事가 되었다. 1126年 陰曆 3月 調整에서 金나라를 받드는 것에 對해 論議하자 大部分의 臣下가 反對했으나, 拓俊京은 李資謙과 함께 金나라가 强大해졌으므로 섬기는 것이 옳다고 主張하였다. 이로 인해 高麗와 金나라 사이에 君臣關係가 맺어지게 되었다.

政治 活動 [ 編輯 ]

이자겸과의 協力 [ 編輯 ]

拓俊京은 人種 이 登極한 後 權力을 잡은 이자겸 을 돕게 되며, 理由는 明確치 않으나, 李資謙의 다섯째 아들인 이지원(李之元)李 拓俊京의 사위인 것과 關聯이 있을 것으로 斟酌할 수 있다. 李資謙은 拓俊京을 自己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준경의 딸을 自己의 아들과 婚姻시켜 사돈지간이 되자고 勸告했고, 拓俊京은 李資謙의 提案을 受容한다.

李資謙의 權勢가 커짐에 따라 拓俊京의 位相도 높아졌으며, 동생 척준신 과 아들 척順 (拓純) 亦是 벼슬이 높아졌다. 拓俊京은 人種 秒에 吏部尙書(吏部尙書)에 올라 參知政事(參知政事)를 거쳐 門下侍郞平章事(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兵部尙書로 兵權을 掌握하였다. 이어 동생 척준신이 兵部尙書로 昇進한다.

仁宗은 李資謙이 分에 넘치는 專橫을 일삼는 것에 對해 큰 不滿을 가지고 있었으며, 1126年 (人種 4) 陰曆 2月 지녹연 等이 人種의 뜻을 받들어 李資謙 一派를 除去하기 위해 擧沙하여 宮闕을 掌握하였다. 이 過程에서 척遵信과 척純度 殺害當하고 闕 밖으로 屍體가 던져졌다.

人種의 이자겸, 척준경 除去 祈禱 [ 編輯 ]

1126年 陰曆 2月, 人種의 側近인 內侍至厚 (內侍祗侯) 金瓚 (金粲)과 內侍祿仕(內侍綠事) 안보린 (安甫麟)李 東知樞密院事 지녹연 에게 이자겸·척준경(拓俊京) 等을 誅殺할 것을 謀議하고 人種 에게 이를 상주하자 人種은 同意한다. 그러자 지녹연은 바로 上將軍 (上將軍) 汚濁 (吳卓)과 大將軍(大將軍) 卷數 (權秀), 將軍(將軍) 고석 (高碩) 等을 隱密히 불러 李資謙을 逮捕하도록 計劃을 세운다.

이들 武將들은 兵權을 쥐고 있던 拓俊京과 그의 동생 척준신 을 매우 싫어했던 사람들이었다. [1] 그런데 李資謙이 權力을 獨食하면서 척준경 亦是 權座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拓俊京의 아우 척준신은 汚濁, 卷數의 部下 將帥로 있다가 兄의 背景에 힘입어 그들의 上官인 兵部 相서 에 올라 있었다. [1] 따라서 이를 못마땅해 하고 있던 武將들은 拓俊京과 척준신 을 除去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그때 마침 지녹연이 李資謙을 逮捕해 달라는 付託을 했던 것이다. [1]

1126年 2月 25日 어둠이 내릴 무렵 人種의 命을 받은 최탁과 汚濁, 그리고 卷數 等이 軍士를 이끌고 宮闕로 進入한다. 지녹연, 汚濁, 卷數, 고석 等은 더불어 擧沙하여 大闕을 掌握하여 拓俊京의 아우인 兵部 相서(兵部尙書) 척준신 과 拓俊京의 아들인 內侍(內侍) 척順 (拓純)을 죽이고 屍體를 闕 밖에 버렸다. 以外에도 祗候 김정분, 錄事 電氣商, 崔瑩 等도 함께 除去하였다. 그러나 內職기두 學問이 城壁을 타고 넘어가 中郞將 지호 를 통하여 李資謙에게 이 事件을 報告하였다. [2] 최탁 等의 攻擊 消息을 接한 李資謙은 拓俊京에게 自身의 아들 議長이 거느리고 온 玄化寺의 僧侶 3百餘 名을 이끌고 宮城을 包圍하도록 命하였다. [3]

出兵과 宮闕 掌握 [ 編輯 ]

拓俊京과 이자겸 , 李資謙의 아들 이지미 等은 事態를 接하고 처음엔 매우 唐慌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急히 側近勢力으로 構成된 朝廷 百官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解決策을 謀議한 끝에 拓俊京의 말에 따라 反擊을 加하기로 했다. 拓俊京은 시랑 최식, 祗候 이후진, 錄事 윤한 等에게 數十 名의 軍士를 이끌고 가서 宮城門을 열라고 指示했다. [2] 이미 議長이 거느린 僧侶 3百名이 開京 王宮에 到着해 있었고 이들과 함께 宮闕을 攻略한다.

拓俊京의 命令을 받은 所長들은 宮城에 到着하자 자물쇠를 부수고 城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高喊을 지르며 叛軍들에게 降伏을 慫慂했다. [2] 그러나 宮城兵力은 그들의 數字가 많은 줄 알고 門을 걸어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2] 2月 26日 아침 李資謙은 拓俊京을 直接 派遣했다. 拓俊京은 비로소 自身의 동생 척遵信과 아들 척順의 屍體를 發見하고 復讐를 다짐했다. [2] 그는 軍卒을 불러모아 최탁 等이 叛亂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宮城을 包圍할 것을 命令했다. 여기에 僧侶 議長이 이끄는 獻花社 僧兵 3百餘 名도 加勢했다. [2]

불현듯 神鳳門 위에 人種 이 黃色 陽傘을 펼쳐보이며 나타나자 拓俊京은 困境에 處하고 말았다. [2] 왕이 이미 逆徒들에게 붙잡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拓俊京의 軍士들이 歡呼聲을 질러댔던 것이다. [2] 왕이 手下를 시켜 兵卒들에게 '너희들은 왜 武器를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이에 兵卒들은 拓俊京에게 들은대로 "敵이 宮中으로 侵入했다고 해서 社稷을 水位하려고 왔을 다름입니다."하고 對答했다. 人種은 그 對答을 듣고서 自身은 無故하니 武裝을 解除하고 물러가라고 命令하고 內帑庫를 열어 銀과 緋緞을 꺼내 城 위에서 달아내렸다. [2] 그러나 結局 척준경 軍士는 王宮을 掌握했고 人種은 武裝解除를 命했지만 兵士들은 듣지 않는다.

뜻밖의 事態에 李資謙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나 拓俊京은 軍士를 모아 大闕로 가서 威勢를 보이자 오히려 擧事한 地록年 等이 萎縮되어 大闕을 지키기만 했다. 仁宗은 親히 나와서 拓俊京의 軍士들에게 解散하게 하고 財物을 하사했으나, 拓俊京은 성을 내며 大闕을 攻擊하였다. 그리고 地록連이 이끄는 軍士가 밤에 攻擊해올 것을 憂慮하여 大闕의 殿閣에 불을 지르고 攻擊했다. 이 渦中에 화살이 人種이 있는 자리까지 날아가 守備軍들이 防牌로 가려 막기도 했다.

李資謙과 査頓인 척준경이 앞장서서 軍士를 이끌고 大闕을 攻擊했으며, 出嫁한 아들 議長(義莊)도 玄化寺(玄化寺)의 中 3百을 이끌고 이자겸, 척준경이 이끌고 온 軍士들과 合勢하였다. 李資謙의 軍士가 宮闕을 掌握하자 李資謙은 人種 에게 亂을 일으킨 者들을 내놓을 것을 要求했다. 그러나 人種은 듣지 않았다.

宮闕 放火 事態 [ 編輯 ]

宮闕을 掌握한 李資謙은 闔門至厚 최학欄과 都兵馬使 錄事 小億을 宮門 밖까지 보내서 人種 에게 多分히 脅迫調로 宮中에서 變亂을 일으킨 者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宮中이 危險해질 것이라고 傳했다. [4] 하지만 人種이 要求를 들어주지 않자 李資謙은 拓俊京과 協議하여 宮城 攻擊을 命令했다. [4] 拓俊京에게 攻擊을 指示했으나 軍士가 들어가지 못했고, 이에 拓俊京은 畫工으로 攻擊한다.

戰鬪 經驗이 많던 拓俊京은 밤이 되면 오히려 不利하다고 判斷하고 날이 어둡기 前에 大大的인 攻擊을 펼치는 것이 가장 빠른 解決策이라고 말했고, 이자겸 은 그의 意見을 따랐다. [4]

拓俊京은 化工을 하기로 作定하고 童話門에 長斫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러자 바람에 불꽃이 날려 霎時間에 來侵까지 불길이 번졌고, 宮人들은 魂飛魄散하여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宮城 兵力들도 唐慌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불길은 밤까지 繼續 타올랐고, 宮城 內의 兵士들은 불길과 煙氣를 避해 밖으로 밀려나오기 始作했다. [4] 拓俊京은 兵力을 이끌고 闕文 앞에 待機하면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이 나오자 拓俊京은 宮城을 빠져나오는 사람은 無條件 죽이라고 命令하고 手下들로 하여금 各 城門을 지키게 하였다. [4] 拓俊京의 畫工으로 敗色이 確然해지자 宮城 兵力을 이끌고 있던 汚濁은 人種을 護衛하여 西門으로 빠져나가고, 나머지 兵力은 밀어닥친 拓俊京의 兵力과 싸우다가 逮捕되거나 戰死하였다. [4] 그러나 人種이 보이지 않자 拓俊京은 追擊臺를 따로 編成하여 汚濁 等의 뒤를 쫓게 한다.

또한 人種을 引導하던 汚濁은 척준경이 보낸 郎將 將星 에 依해 殺害되었으며, 최탁, 卷數, 고석 等의 장수들도 모두 척준경이 보낸 兵士들에 依해 죽임을 當했고, 宮城 兵力에 加擔한 大將軍 윤성 , 將軍 朴英 , 左僕射 洪灌 等도 殺害되었다. [4] 仁宗은 불길이 繼續 번지자 어쩔 수 없이 臣下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는데, 이때 拓俊京은 擧事에 加擔한 將軍들과 文官들을 죽였다. 李資謙은 强壓的으로 人種의 居處를 自身의 집으로 옮기도록 했으며, 이 일 때문에 李資謙과 拓俊京의 權勢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척준경에 依해 宮城兵力이 모두 制壓되었을 때 宮闕 內部는 完全히 戰爭터와 같았다. 宮闕의 大部分은 불타 없어지고, 산호정, 상춘情, 尙火情과 같은 亭子들과 제석원 行廊 數十 간만 겨우 남아있을 뿐이었다. [4] 宮闕을 掌握하였으나 王이 있는 곳을 防火했다 하여 그는 繼續 批判을 받게 된다.

이자겸과의 葛藤 [ 編輯 ]

이자겸 은 王과 같은 權限으로 行動하면서, 人種 을 自身의 舍宅인 中興擇 書院에 軟禁해버리고 모든 情事를 自身이 主管하며 決濟했다. [5] 그러나 人種은 다시금 李資謙을 逐出하기 위해 內醫院 최사전 과 謀議하고 拓俊京과 李資謙을 離間질시키기로 作定한다. [5] 그런데 李資謙의 아들 이지언 (李之彦)은 척준경이 宮城에 활을 쏘고 불을 지른 事實을 非難하였다. 그러한 때에 國王은 拓俊京에게 사람을 보내어 李資謙을 除去하여 功을 세울 것을 慫慂했다. [3]

그 後 李資謙이 露骨的으로 王位를 노리기 始作하자 李資謙 一派를 除去할 方案을 찾던 人種은 최사전 (崔思全)의 말에 따라 拓俊京을 이자겸에게서 떼어내 李資謙의 軍事的 基盤을 除去하려 했다. 拓俊京은 최사전의 말에 說得되었으며, 얼마 後 이지언의 종이 拓俊京의 종에게 宮闕을 불사르고 人種에게까지 화살을 날린 것이 죽을罪라고 非難하자 성을 내며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仁宗은 拓俊京에게 다음과 같은 調書를 보낸다.

오직 나의 不察로 凶惡한 者들이 일을 저지르도록 放置함으로써 代身들에게 근심과 수고를 끼쳤다. 이것은 모두 나의 罪이다. 이제부터 스스로를 反省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臣民들과 함께 敎化를 새롭게 할 것을 盟誓하노라. 그대는 더욱 受信에 힘쓰고 旣往의 일은 다시 생각하지 말 것이며, 誠心껏 나를 補佐하여 後患이 없도록 하라. [5]

이 調書를 받고 拓俊京은 慇懃히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元來부터 忠誠心이 剛하고 용맹스런 人物이었기 때문에 王의 付託을 쉽게 拒絶하지 못했던 것이다. [5] 또한 그때 마침 이지언의 執事가 拓俊京의 執事와 是非가 붙는 事件이 發生했다. [5] 어떤 일로 싸움을 벌인 그들은 서로 相對方의 上典을 辱하는 地境에 이르렀다. [5] 이지언의 執事가 火김에 '너희 上典은 임금이 있는 자리에 대고 활을 쏘고 宮中에 불을 질렀으니 그 罪는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이고, 너도 마땅히 官奴로 글려가야 될 터인데 敢히 네놈이 나를 辱해! [5] " 이 말이 곧 拓俊京의 귀에 들어갔고 拓俊京은 李資謙의 집으로 달려가서 따지며 衣冠을 벗어던져 버렸다. [5] 척준경側의 不滿이 심해지고 이자겸 側에서는 謝過를 拒否하자 人種은 사람을 보내 이들의 葛藤을 부채질했다.

상경과 出兵 [ 編輯 ]

難處한 立場이 된 이자겸 은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 和解를 要請했으나 拓俊京은 辱지거리를 쏟아놓으며 隱退하여 故鄕으로 돌아가겠다고 公言했다. [5] 人種 이 이 所聞을 듣고 다시 樞密院使 김부일 을 그에게 보내 제 位置로 돌아가 일을 보라고 勸誘하며 鞍裝을 끼운 말을 한 匹 膳物로 보냈다. 그리고 密旨를 내려 王室을 위해 忠誠을 다하려면 李資謙을 除去하는 것이 優先이라며 懷柔하였다. 人種의 親筆을 받고 그는 感激한다. 李資謙이 아들들을 보내 和解를 請했으나 拓俊京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때마침 人種이 김부일과 최사전으로 하여금 李資謙 除去를 재촉하자 이를 實行에 옮기기로 決心하고 人種에게 忠誠을 盟誓하는 글을 올렸다.

李資謙이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고 王을 毒殺하려고 하자 이 消息을 들은 拓俊京은 드디어 王에게 忠誠을 하겠다는 決定을 내린다. 王의 親書를 받은 拓俊京은 人種이 危險에 處해 있음을 感知하고 將校 7名과 官奴 20餘 名을 引率하려 宮闕로 向했다. 그때 이들은 武器가 없어 목冊나무를 몽둥이 삼아 뽑아든 채로 달려가고 있었다. 結局 拓俊京은 人種에게 忠誠을 盟誓하는 글을 바치고 바로 上京했고 李資謙은 그가 到着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宦官 弔意의 印度로 그들이 宮으로 들어가자 巡檢도령 正硫黃이 軍事 1百餘 名을 이끌고 軍器監으로 들어가서 甲옷과 兵器를 꺼내 나누어주고 연경궁으로 向했다. 이때 拓俊京은 李資謙의 受荷人 소경 유원식을 만났는데,그가 李資謙에게 알릴 것을 念慮한 弔意는 유원식을 殺害하였다.

李資謙 除去 [ 編輯 ]

1126年 陰曆 5月 拓俊京은 宮闕로 들어가 人種을 護衛할 態勢를 갖추었다. 李資謙의 軍士들이 抵抗했으나 拓俊京의 威勢에 눌려 簡單히 制壓되었다. 이어 김향 (金珦)·이공수와 더불어 大闕로 들어가 李資謙의 軍士들을 制壓한 다음 李資謙을 불러냈다. 그러나 都城에 척준경이 到着한 줄을 생각하지 못한 이자겸 은 繼續 政事를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拓俊京은 人種 을 安全한 軍器監에 데려다 놓고 手下들로 하여금 護衛하도록 한 다음 乘船 강후玄을 派遣하여 李資謙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6]

大勢가 기울었음을 안 李資謙은 素服 차림으로 人種 앞에 나온 後 곧바로 獄에 갇혔다가 靈光 으로 流配되어 後날 귀양地에서 死亡했다. 拓俊京은 李資謙과 그의 處子들을 모두 八關寶에 가두고, 그를 護衛하고 있던 將軍 强豪와 고진수를 죽였다. [6] 또한 兵士들을 풀어 그의 殘黨들을 모두 잡아들이거나 죽이고, 王을 다시 宮으로 모셔갔다. [6]

仁宗은 拓俊京의 功을 表彰하고 衛社功臣(衛士功臣)의 稱號를 내렸다. 또한 門下侍中으로 삼으려 했으나, 拓俊京은 이를 辭讓하였다.

同年 6月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에 錄勳되고 檢校太史 受胎步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判戶部事 兼 書經留守에 任命되고, 上柱國에 錄勳되었으며 夫人 黃氏는 提案郡大夫人에 封해진다. 또한 人種이 갑자기 꿈을 꾸자 拓俊京은 林氏 姓을 가진 王后를 맞이할 것이라고 豫言하였는데, 豫言이 的中하여 人種은 門下侍中 임원후 의 딸 工藝王后 를 揀擇하여 王妃로 삼았다. 그해 陰曆 11月 人種은 拓俊京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共新黨에 걸게 했다.

그러나 拓俊京의 威勢는 오래 가지 못했다. 척준경이 李資謙을 除去한 功을 내세우며 權勢를 부리려 하자 人種은 拓俊京을 꺼리게 되었으며, 마침내 정언(正言) 정지상 이 拓俊京의 옛 罪를 들어 彈劾하는 上疏를 올리자 1127年 陰曆 3月 癌打倒(巖墮島)로 귀양 가게 되었다.

末年과 죽음 [ 編輯 ]

1127年 陰曆 3月 "李資謙을 除去한 일은 一時의 공이나 宮闕을 侵犯하고 불사른 것은 萬歲의 罪"라는 鄭知常의 彈劾을 받아 巖泰島로 流配되었다가, 1128年 陰曆 4月 李資謙을 除去한 功을 參酌하여 拓俊京의 귀양地를 癌打倒에서 故鄕인 穀酒로 옮기게 하였으며 [7] , 1130年 陰曆 10月에는 "罪는 중하나 또한 공도 적지 않다" 하며 家族들과 한곳에 살도록 했다. 또한 1132年 陰曆 11月에는 拓俊京의 아들에게 直前(職田)을 돌려주게 하였다.

1144年 (人種 22) 陰曆 2月 人種은 拓俊京을 檢校戶部尙書(檢校戶部尙書)에 任命, 바로 上京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등瘡 으로 世上을 떠났다. 以後 人種은 그의 官職을 回復하고, 子孫들에게도 出仕길을 열어주었다.

에피소드 [ 編輯 ]

拓俊京과 人種 사이에 人種이 꾼 꿈의 解夢에 對한 逸話가 있다.

李資謙이 除去된 後 그의 두 딸도 王妃의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새로운 王妃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 무렵 人種은 깨 다섯 되와 黃규(黃葵) 서 되를 얻는 꿈을 꾸었는데, 拓俊京은 이 꿈이 아들 다섯을 얻고 그 中 세 名이 王位에 오를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그의 말대로 새 王妃가 된 공예태후 (恭睿太后) 임(任)氏의 子息들 中 毅宗 (毅宗), 明宗 (明宗), 新種 (神宗)이 나왔다.

기타 [ 編輯 ]

싸움을 매우 잘했다. 當代 高麗에서 最强級의 武藝로 名聲을 떨치기도 했다.

拓俊京의 官職 歷任 [ 編輯 ]

척준경이 거친 벼슬을 年代順으로 羅列하면 다음과 같다 [8] .

鳶島(年度) 官職(官職)
1095年 肅宗이 鷄林공에 있었을 때 섬기게 되어 1095年에서 1104年까지 9年間 樞密院 別加가 됨.
1104年 陰曆 2月 女眞族에게 敗走하던 林間의 軍士를 求해낸 공으로 千牛衛祿仕 참군사로 任命됨.
1105年 陰曆 12月 睿宗이 登極한 後 病魔祿仕가 됨.
1108年 陰曆 1月 征伐 中 女眞族에게 奇襲당한 윤관을 救해내어 闔門至厚(閤門祗候)에 任命됨.
1109年 陰曆 3月 開京 에서 再出征할 때 工夫 員外郞(工部員外郞)의 자리에 있었음.
1115年 遼나라가 出兵을 要請해 왔을 때 僞位소경(衛尉少卿)의 자리에 있었음.
1117年 陰曆 1月 서북면 兵馬副使(西北面兵馬副使)로, 陰曆 6月에는 知御史臺事(知御史臺事)로 任命됨.
1119年 陰曆 1月 동북면 兵馬使로 任命됨.
1122年 陰曆 3月 위僞經(衛尉卿) 直門下性(直門下省)으로 任命됨.
1123年 陰曆 7月 高麗에 왔다가 돌아가는 宋나라의 使臣을 電送할 때 東知樞密院事(同知樞密院事)의 자리에 있었으며 [9] , 陰曆 12月 吏部尙書(吏部尙書)·參知政事(參知政事)로 任命됨.
1124年 陰曆 12月 開府儀同三司 檢校 사도 수사공 中書侍郞平章事(開府儀同三司檢校司徒守司空中書侍郞平章事)가 됨.
1125年 陰曆 12月 門下侍郞平章事가 됨.
1126年 陰曆 4月 門下侍郞 判兵部事(判兵部事)로 任命됨.
1126年 陰曆 6月 李資謙을 除去한 功으로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稱號를 받고, 檢校 太史 受胎步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戶部事(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戶部事)로 任命되는 한便, 書經有數社(西京留守事) 上柱國(上柱國)을 겸함.
1144年 陰曆 2月 人種이 詔書를 내려 朝奉大夫(朝奉大夫) 檢校 戶部尙書로 삼았으나, 얼마 가지 못하고 등瘡으로 죽음.
1146年 陰曆 2月 門下侍郞平章事의 官職이 回復됨. [10]

家計 [ 編輯 ]

關聯 人物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各州 [ 編輯 ]

  1.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47페이지
  2.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48페이지
  3. 김당택,《우리 韓國史:政治史中心의 새로운 韓國通史》(푸른역사, 2006) 137페이지
  4.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49페이지
  5.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50페이지
  6.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52페이지
  7.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考慮王朝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53페이지
  8. 參考文獻에 記錄된 官職名 中 가장 仔細히 記錄된 것을 실었다.
  9. 이 事實은 韓國의 史料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며, 徐兢 (徐兢)의 著書인 《 高麗圖經 》에 記錄된 것이다.
  10. 이 무렵 人種이 병들어 危重했는데, 무당이 拓俊京의 魂靈이 병들게 했다고 하자 이를 달래기 위해 벼슬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11. 1963年 , 北韓 社會科學 古典硏究所 編纂, 大韓民國 아름出版社 펴냄.
  12. 徐兢 지음, 民族文化推進會 옮김, 서해문집 펴냄.
  13. 以下의 著書 內容은 〈 韓國古典飜譯院 Archived 2013年 8月 17日 - 웨이백 머신 〉에서 參考하였다.

外部 링크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貴族社會의 童謠"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