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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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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동근(蔡東根)
- 兒名: 勇德(龍德)
- 者: 대유(大有)
- 號: 石地(石芝), 夕講(石江), 精算(定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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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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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曆) 1850年 2月 4日
(
1850-02-04
)
漢城府
北部
진장방
진장방界
삼청동
(現
서울特別市
鍾路區
삼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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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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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曆) 1941年 6月 4日
(
1941-06-04
)
(91歲)
全羅北道
井邑郡
신태인읍
陸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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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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僉節制使→中樞院議官→漆谷郡數→精算郡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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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
(蔡龍臣,
1850年
2月 4日
~
1941年
)은
朝鮮 後期
의 肖像畫가. 號는 石地(石芝), 本貫은
平康
(平康)이다. 號는 石地 또는 夕講이다. 벼슬은 從二品(從二品)에 이르렀으며 그림은 山水, 人物, 영모 모두 잘 그렸다. 特히 肖像畫에 뛰어나서
高宗皇帝 御眞
을 그린 것을 비롯하여 朝鮮時代 逆洋畫 技法의 影響을 보이는데 이것은
日本
을 거쳐서 波及된 外來樣式의 受容으로 보인다. 1893年 釜山鎭 水軍僉節制使, 1896年 돌山眞 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1900年에
太祖
,
肅宗
,
英祖
,
正祖
,
順調
,
憲宗
의
御眞
을 그렸고, 1901年에는
高宗
의
御眞
까지 그렸다. 이때
高宗
에게 夕講이라는 號를 받았고, 慶尙北道 漆谷郡 郡守로 赴任했으며, 많은 生必品까지 膳物받으며 惠澤을 누렸다. 1905年에 忠淸南道 精算群 郡守로 赴任했다가 1906年 辭職하고 全羅道로 落鄕한 後 1941年까지 35年間 수많은 作品을 그렸다. 또 朝鮮 時代 肖像畫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人物의 오른쪽 얼굴도 그렸는데,
黃玹 肖像
과
운낭자賞
이 그렇다. 또 그의 그림에는 憂國之士의 肖像畫가 많다.
그의 初期 肖像畫는 劇細筆을 使用하여 얼굴의 陸里門 描寫에 注力하고, 많은 線을 使用하여 凹凸, 遠近, 明暗을 描寫하는 것이 特徵이다.
[2]
그가 1911年에 그린
戰友
의 肖像은 細筆을 使用하여 얼굴의 凹凸을 表現하고 弼善으로 얼굴의 陰影과 遠近을 表現한다.
[3]
1910年代 中盤부터는 西洋畫처럼 面積으로 얼굴을 描寫한다.
[2]
作品
[
編輯
]
그의 肖像畫 作品으로는 <
최치원
肖像(崔致遠肖像)> <
최익현
肖像(崔益鉉 肖像)> <戰友 肖像(田愚肖像)> <운낭자 肖像(雲娘子肖像)> 等 多數가 있다.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