蔡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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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邕

蔡邕 (蔡邕, 133年 ~ 192年 )은 後漢 末期의 學者로, 者는 百個 (伯?)이며 連奏 진류群 어현(?縣) 사람이다. 傳한 의 開國功臣 채인 의 14歲손으로, [1] 學問과 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가져 名聲이 높았다. 書藝 의 技法인 永字八法 의 考案者라고도 알려져 있다. 後날 西進 초의 名匠 良好 의 外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또 傍系 曾孫子로 彩票(蔡豹,字士宣) 等이 있다.

生涯 [ 編輯 ]

175年 3月, 영제 는 儒學者들에게 5景 의 文字를 바로잡고 그 內容을 當時 議郞(議郞)이었던 蔡邕에게 拷問 (古文), 戰서 , 예서 세가지 글씨로 옮겨쓰게 한 다음 石工에게 그 글씨를 새긴 碑石을 세우도록 했다. 碑石이 처음 세워졌을 때 蔡邕의 글씨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했다고 한다.

理解 采翁은 官職에 있는 姻戚끼리 서로 結託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三湖法(三互法) [2] 때문에 幼主와 冀州에서 管理가 없어도 쉽게 登用하지 못하자, 規制에 拘礙받지 말고 人材를 뽑을 것을 請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8年 7月 푸른 무지개가 宮闕에 나타나자 朝廷에서는 不吉하게 여기고 臣下들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對策을 말하게 했다. 이때 采翁은 宦官 인 中常侍(中常侍) 情況(程璜)과 太后宮의 곽옥(?玉) 等을 물리치고 어진 人材를 登用할 것을 建議하였다. 그러나 다른 宦官 調節 이 蔡邕의 글을 보고 情況에게 內容을 알려 주었다. 이 때문에 怏心을 품은 情況은 蔡邕을 謀陷하여 내쫓을 窮理를 했다.

마침 蔡邕의 叔父인 위위 채질(蔡質)李 情況의 養女와 結婚한 楊口(陽球)와 사이가 나빴기에 情況은 두 사람을 한꺼번에 謀陷하여 獄에 갇히게 하고, 繼續 영제에게 아뢰어 處刑하려 했다. 그러나 또다른 中常侍 여강(呂强)李 蔡邕의 救命을 위해 애썼기 때문에 머리를 깎인 채 朔方 에 귀양가는 것으로 그쳤다. 이에 滿足하지 못한 楊口는 刺客을 보내고 現地 官吏에게 賂物을 주어 蔡邕을 暗殺하려 했다. 그러나 刺客과 管理가 모두 拒絶하는 바람에 無事할 수 있었다. 한便 驪江은 179年 에 上疏를 올려 蔡邕을 다시 登用할 것을 請했으나 영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以後 赦免令이 내려져 귀양살이를 끝냈으나 吾園 태수 왕지(王智)가 蔡邕이 調整을 誹謗했다고 謀陷하는 바람에 童濯 이 부를 때까지 繼續 居住地를 옮기며 逃亡다녀야 했다.

189年 , 하진 이 죽은 後 武力으로 政權을 잡은 동탁은 蔡邕의 높은 名聲을 듣고 調整으로 불러들였다. 采翁은 病을 핑계삼아 應하지 않았으나, 火가 난 동탁이 蔡邕의 집안을 滅族시키겠다고 脅迫하여 어쩔 수 없이 官職에 나아갔다. 동탁은 蔡邕을 極盡히 待接하면서 3日 동안 數次例의 高速 昇進을 시켜 市中(侍中)으로 임명하였다. 以後 左中郞將(左中郞將)이 되고 高陽向後(高陽侯)에 封해졌다.

동탁은, 소제 를 廢하고 진류王 (獻帝)을 세울 뜻을 내비쳤다. 노식 이 面前에서 反對하자 동탁은 노식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當時 갓 登用되어 동탁의 信任을 받고 있던 蔡邕이 노식의 書札을 받고 곧바로 調整으로 달려와 간한 德分에 벼슬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그쳤다. 190年 采翁은 話題 廟號 人 穆宗(穆宗), 眼眥 의 廟號 空宗(恭宗), 順帝 의 廟號 警鐘(敬宗), 丸劑 의 廟號 爲從(威宗)을 모두 없애자고 建議하였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그대로 施行되었다. [3] 191年 동탁의 部下들이 童濯을 太公望 女商 에 비하며 詳報(尙父)로 推戴하려 하자 采翁은 反童濯 聯合軍 이 鎭壓되고 洛陽 으로 還都한 後에 實行할 것을 建議하여 이 일은 中斷되었다. [4]

192年 王胤 이 童濯을 죽였을 때 王胤과 같은 자리에 있던 采翁은 동탁의 죽음을 歎息하였다. 이를 노엽게 여긴 王胤은 蔡邕을 죽이려 했다. 采翁은 自身의 잘못을 認定하면서도 漢나라 歷史를 著述할 것을 願하였고, 王胤의 固執을 警戒한 上書僕射 祀孫서 太尉 마一齊 를 비롯한 大部分의 臣下들도 蔡邕을 救濟하려 했으나 王胤은 듣지 않고 끝내 蔡邕을 죽게 했다. [5]

《三國志演義》 속 蔡邕 [ 編輯 ]

三國志演義 에서는 동탁이 蔡邕을 登用한 것이 理由 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敍述하였다. 王胤이 童濯과 그 一族들을 죽이고 財産을 沒收한 다음 屍體를 著者에 버린 後 동탁의 屍體 앞에서 哭하여 잡혀 왔고, 王胤의 命令에 依해 監獄에서 목이 졸려 죽었다고 하였다.

蔡邕의 親族關係 [ 編輯 ]

各州 [ 編輯 ]

  1. 蔡邕,《채중랑집》 卷9 量高陽後引受簿冊票(讓高陽侯印綬符策表)
  2. 自己나 自己 姻戚의 본적이 있는 地方의 管理가 되지 못하게 하는 法. 例를 들면 진류 사람인 采翁은 진류太守가 될 수 없다.
  3. 《資治通鑑》59卷에 실린 內容이다.
  4. 《三國志》 魏書 童濯前에는 동탁이 長安으로 遷都한 後 床褓로 불렸다고만 記錄되어 있으나 《獻帝機(獻帝記)》와 《資治通鑑》에는 이와 같이 蔡邕이 諫言하였다고 記錄되어 있다.
  5. 蔡邕의 죽는 部分에서《후한서》에서는 王胤이 蔡邕을 죽였다고만 하고 있으며, 《資治通鑑》에서는 王胤에 依해 監獄에 갇힌 途中 죽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그 外의 나머지 部分은 두 冊의 記錄이 모두 비슷하다. 《三國志》에 註釋을 단 配送地는 蔡邕이 童濯을 마음속으로 따랐을 理 없었다는 點을 들면서 後漢書를 쓴 史乘 이 妄靈되게 記錄했다고 批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