曾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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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鞏·『萬小黨畫展』

曾鞏 (曾鞏, 1019年 - 1083年 )은 北送 의 散文家이다. 者는 子固(자고), 諡號는 文定(문정). 建昌(乾脹) 南豊(南風)에서 出生. 王安石(王安石)·柳宗元(柳宗元)·韓愈(韓愈)·蘇洵(蘇洵)·소식(蘇軾)·蘇鐵(蘇轍)·歐陽脩(歐陽修)와 더불어 唐宋八大家 로 일컬어지며 曾祖(曾肇)·症抛(曾布)·症禹(曾紆)·症굉(曾紘)·증협(曾協)·症돈(曾敦)과 더불어 南?七曾(南風七證)으로도 일컬어진다. 世上에서 南?先生(南風先生)으로 불리기도 했다.

素筌 [ 編輯 ]

建昌(乾脹) 南豊(南風)[現, 江西省(江蘇省) 南豊縣(남풍현)] 出身. 12歲 때에 『六論(陸론)』을 썼다. 1057年 歐陽脩 가 主催한 過去 에 兄弟之間인 消息 · 蘇鐵 과 함께 及第한 後 文風(文風)을 一新하게 해서 名聲을 얻었다. 太平州(太平週) 司法?軍(司法參軍)을 거쳐 中央에 들어가 編校史館書籍(便敎師觀書籍;中央圖書館)·館閣校勘(館閣交感)·集賢校理(집현敎理)·英宗實錄檢討官(英種實錄檢討官)李 됐다. 地方에 다시 나와서 越州(越州)·通州(統主)의 通判(通判), 齊州(濟州)·襄州(洋酒)·洪州(紅酒)·福州(福州)·明州(明紬)·?州(薄酒) 等의 知州(持株)를 歷任했고 赴任地마다 民衆의 安寧 維持와 幸福 增進을 꾀하는 行政에 마음을 잘 써서 治績을 올렸다. 濟州(齊州)의 地主(知州)로서 任期를 마치고 떠나려 할 때, 民衆이 그 훌륭한 公的(功績)을 애석히 여겨 橋梁을 破壞해 閉門한 채 曾鞏을 내보내지 않으려고 해서 밤을 틈 타 艱辛히 떠났다. 이어 判三班院事(판三班元士)로 在職 時, 國家의 財政이 近年에 들어 膨脹하는 事態를 憂慮해 尙州(上奏)하여 警備(經費)를 반드시 削減(削減)해야 한다고 力說했다. 人種 은 그 意見을 기꺼이 듣고서 “五朝(오조)의 治績은 曾鞏의 判斷이 옳다”라고 하면서 史館修撰(士官修撰)에 除授했다. 1082年 에 中書?人(中書舍人)을 거쳐 翌年 4月에 죽었다.

먼 血統의 姻戚 關係에 있는 王安石 과는 1041年 經에 直接 알게 된 以後 平生에 걸쳐 親하게 사귀었다. 동생인 曾布(症抛)는 新法黨(新法黨)의 有力한 一員이었지만, 曾鞏 自身은 新法(新法)을 批判하는 態度를 보였다. 王安石에게 懇切한 便紙를 直接 送付해 그 反省을 재촉하기도 한다. 수수한 人品이 理由의 하나가 되어 官界(關係)에는 그다지 出世하지 못했고 그 散文도 華麗는 不足하지만, 끈氣 있고 結實한 議論(議論)의 展開가 特徵으로, 臺 桐城派(桐城派)의 古文家(古文家)인 姚?(요내)는 “曾鞏(曾公)은 능히 그 短點으로 하는 곳을 避해 어기지 않는다”라고 評한다. 南?七曾(南風七證)의 一員이자 唐宋八大家 의 一員으로서 西撥(序跋)·雜技(?記) 類에 優秀한 作品이 많고 古代 書籍 整理·校監에 從事하던 時期의 作品인 『戰國策目錄序(戰國策目錄서)』가 有名하다. 詩文集에 『元豊類藁(원풍류고)』 50卷·『續元豊類藁(속원풍류고)』 40卷·『隆平集(융平집)』 30卷이 있다.

古典的(古典籍)의 矯正(校訂)과 保全에도 努力하고 現存하는 『 戰國策 』 33篇本銀 症공이 再校庭을 施行한 텍스트이다.

關聯 圖書 [ 編輯 ]

  • 『譯註 唐宋八大家文抄 曾鞏』, 譯註 宋基采, 傳統文化硏究會, 2011年 7月 15日, ISBN: 9788991720626

可考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