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일國交正常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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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일國交正常化 (中日交正常化)는 1972年 9月 發表된 中日共同聲明 을 契機로 日本 中華人民共和國 이 國交를 樹立한 事件이다.

1949年 中華人民共和國(以下 '中國') 建國 以來 日本과 中國은 外交 關係가 없었는데 1972年 9月 25日 다나카 가쿠에이 日本 總理가 中國 베이징市 를 訪問하여 中일공동성명에 調印하여 旣存의 對立 關係를 淸算하고 國交를 맺었다. 이와 同時에 日本은 中華民國 (以下 '臺灣')과 斷交했다.

1971年 10月 유엔 總會 決意 第2758號 로 臺灣을 代身하여 中國이 常任理事國의 地位를 獲得하는 等 國際關係가 急變한 것이 契機가 되었다. 國交正常化는 1972年에 이루어지긴 했으나 그 以前부터 自由民主黨 을 비롯해 日本社會黨 , 公明黨 , 민사당 等이 各各의 立場에서 訪中하여 中일 間의 意思疏通에 큰 役割을 했으며 體育界나 經濟界 等에서도 많은 關係 個션 努力이 있었기에 可能했던 일이었다.

國交正常化에 따라 1973年 1月 11日 베이징시에 日本 大使館이 開設되었고 2月 1日에는 도쿄都 에 中國 大使館이 設置되었다. 한便 日本은 中國에 3兆 엔이 넘는 政府開發援助 (ODA)를 施行했다.

中日關係社 [ 編輯 ]

두 個의 中國 [ 編輯 ]

1945年 第2次 世界 大戰 이 끝난 以後 日本軍國主義 에 共同으로 抵抗하던 中國 國民黨 中國共産黨 사이에 國共 內戰 이 일어났다. 內戰에서 勝利한 共産黨은 1949年 10月 中華人民共和國 政府를 樹立했고 國民黨은 타이완 섬으로 敗退했다. 共産黨이 끝내 타이완섬에 上陸하지 못했기에 中國을 代表한다고 主張하는 政府가 두 個 存在하게 되었고 이는 中國 代表權 問題를 惹起했다.

中國은 蘇聯 을 비롯한 東歐圈과 外交 關係를 構築했다. 西歐圈에 屬하는 英國 홍콩 을 의식하여 臺灣과의 領事 關係를 維持한 채 中國 政府를 承認했다. 하지만 美國 은 臺灣하고만 外交 關係를 맺고 中國 政府를 承認하지 않았다. 1950年 韓國 戰爭 이 일어나 美國은 大韓民國 을, 中國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을 도와 서로 銃부리를 겨누면서 이 現象은 더 深化되었다. 美國이 主導하는 西歐圈에 屬한 日本 政府 亦是 臺灣과 修交하고 中國을 認定하지 않았다. 다만 民間 經濟 交流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中日民間貿易協定 [ 編輯 ]

하지만 兩國 間의 民間 貿易은 微細한 水準이었다. 1950年 10月 中日友好協會가 設立되었지만 韓國 戰爭에 中國이 參戰하면서 大衆 輸出이 全面 禁止되었고 中國을 警戒하는 雰圍氣가 剛해졌다.

1952年 4月에는 中日貿易促進會議 設立을 推進하던 고라 都彌, 虎牙視 게이, 미야코視 基스케 等 國會議員들이 政府 方針을 無視하고 蘇聯을 거쳐 베이징을 訪問했다. 이들은 2個月 뒤 第1次 中日民間貿易協定에 調印했는데 이는 日本에서 큰 反響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1953年 7月 韓國 戰爭이 休戰瑕疵 中日貿易促進에 關한 決意가 中참 兩院에서 採擇되고 이케다 마사노스케를 團長으로 하는 中日貿易促進의원연맹대표단이 中國을 訪問해 第2次 中日民間貿易協定을 맺었다. 두 次例의 貿易協定을 契機로 兩國 間의 民間 貿易이 活潑해졌다.

요시다 內閣과 平和 條約 [ 編輯 ]

1951年 9月 요시다 시게루 日本 總理는 샌프란시스코 講和 會議 를 앞두고 國會에 出席하여 臺灣 政府를 承認할 것을 明確히 答辯하지 않았다. 當時 西歐圈 亦是 英國이 中國과 臺灣 두 政府와 同時에 關係를 가지고 있는 것에 注目하여 臺灣 政府를 承認하더라도 中國 상하이市 에 貿易事務所를 開設할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

甚至於 日本 政府는 中國 代表權 問題가 解決될 때까지 中國과 臺灣 어느 政府도 承認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으나 존 포스터 덜레스 美國 國務部 顧問이 이를 一蹴해버렸고 [1] 結局 日本 政府는 臺灣 政府만을 承認했다. [2] 1952年 4月 28日 講和 條約이 發效되던 날 日本 政府는 臺灣 政府와 平和 條約을 締結하여 戰爭 狀態를 終結시켰다. 하지만 이는 20年 뒤 重일國交正常化 交涉을 어렵게 만든 主 要因이 되었다.

하토야마 內閣과 政經分離 [ 編輯 ]

요시다가 辭任한 後 하토야마 이치로 가 新任 日本 總理가 되었다. 하토야마는 美國 中心 外交에서 脫皮해 자주 外交를 推進하여 蘇聯과 日蘇共同宣言 을 이끌어냈다. 같은 共産圈 國家인 中國에 對해서도 政經 分離를 原則으로 外交 關係는 없지만 經濟 關係의 擴大를 要求했다. 이시바시 單盞 通商産業大臣은 中일무역확대를 希望했다. 이러한 하토야마 日本 內閣의 움직임을 中國 政府도 注目하고 있었다.

1955年 4月 반둥 會議 에서 다카사키 다쓰노스케 日本 經濟審議靑 長官과 저우언라이 中國 總理가 會同하여 平和 5原則 을 基礎로 하여 中일 間 國交正常化 推進을 希望한다고 밝혔다. 한 달 뒤에는 日本國際貿易促進協會, 日中貿易促進議員聯盟이 中國의 貿易代表團과 만나 제3차 中日民間貿易協定을 맺었다. 12月 中國 政府가 對日 政策을 執行하는 責任 部署로 對日工作(工作)委員會를 設置했다. 1956年 9月에는 中國에 남아 있던 日本人 戰犯과 抑留者 1,000餘 名이 釋放된 지 11年 만에 日本으로 돌아왔다.

中國은 이러한 過程을 통해 民間 交流를 바탕으로 政府 間의 關係 强化로 連結시키려는 目的이 있었다. [3] 第3次 貿易協定에서 外交官 大宇의 通商代表部 設置를 要求한 것도 이 때문인데 이는 政經 分離를 原則으로 내세우는 日本의 立場과는 差異가 있었다. 日本은 美國이 默認하는 範圍 內에서만 中國과의 民間 交流를 擴大하길 願했고 하토야마 內閣과 後任 이시바시 內閣의 對中 政策은 冷戰 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기시 內閣과 아시아 外交 [ 編輯 ]

1957年 2月 이시바시가 病으로 辭任한 뒤 기시 노부스케 가 新任 日本 總理로 就任했다. 기시는 冷戰의 틀 안에서 美日安保條約 改正을 이끌어내는 等 하토야마와 마찬가지로 자주 外交를 目標로 했는데 特히 東아시아 에서 賠償 問題를 包含한 戰後 處理를 推進했다. 이는 美國과 對等한 位置에서 日本의 自主性을 높이려는 意圖와 함께 아시아 國家와의 關係 改善을 꾀하는 것이었다.

日本 總理로는 처음으로 東南아시아 巡訪에 나섰고 돌아오는 길에는 臺灣을 訪問해 장제스 總統과 會談도 했다. 기시는 軍事的인 大陸 反共에 反對한다면서 臺灣을 大陸보다 豐足하게 만드는 것이 政治 宣傳이 될 것이라고 提案했다. 이 얘기에 中國은 反撥한다. 기시는 親美 파이면서 親臺灣派였지만 한便으론 中日貿易促進에 關한 決意의 提案者 中 한 名이었고 中國과의 國交 樹立은 이르지만 第4次 中日民間貿易協定에 反對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中國과의 關係는 基本的으로 政經 分離라고 말했다.

1958年 3月 第4次 中日民間貿易協定이 締結되었다. 이 協定에는 外交特權을 가진 通商代表部를 設置하고 兩國의 國旗 揭揚을 認定하는 等의 內容이 包含되어 있었다. 하지만 美國과 臺灣은 이에 反撥하였고 臺灣은 豫定되어 있던 日本과의 頂上會談을 中止하고 日本 製品 購買 禁止 處分을 내렸다. 結局 기시는 한 발 물러서서 外交 特權도 國旗 揭揚度 認定하지 않을 方針임을 밝혔다. 그러자 이番에는 中國이 反撥하여 緊張 關係가 감도는 渦中에 5月 2日 나가사키 國旗 事件 이 發生했다. 천이 (陳毅) 中國 外交部長은 日本 政府의 對應을 强度 높게 批判했고 以後 中일 間 貿易을 全面 禁止했다. 저우언라이는 中國 人民을 敵對視하지 않을 것, 두 個의 中國을 만들지 않을 것, 兩國 間 關係正常化를 妨害하지 않을 것을 明示한 政治 3原則을 表明했고 이에 日本이 不快함을 내비치면서 兩國 間의 關係는 膠着 狀態로 접어들었다. 이는 政經 分離 原則을 내세운 日本에 비해 中國은 政經 不可分 原則을 내세워 兩者가 對立했기 때문이었다. 1959年 이시바시가 訪中하여 저우언라이와 會談했지만 中國은 如前히 政經 不可分 原則을 固守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民間 次元의 接觸은 繼續 이어졌고 企業이나 友好 關係에 있는 團體·個人의 交流는 持續되었다. 이러한 接觸은 後날 友好貿易의 形態로 經濟 去來가 繼續되었고 이윽고 覺書에 依한 貿易이라는 두 個의 루트로 中일 間의 經濟 關係는 文化大革命 이 한창이던 1960年代에도 이어졌다.

이케다 內閣과 두 個의 中國 政策 [ 編輯 ]

1960年 기시가 辭退하고 이케다 하야토 가 日本 總理로 就任했다. 이케다는 日中 間 關係 改善과 貿易 促進을 希望했지만 두 個의 中國 問題는 事態의 解決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이케다가 總理가 될 무렵 유엔 安全 保障 理事會 常任理事國 議席을 臺灣과 中國 中 어느 政府가 가져야 할지가 問題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케다는 中國 政府의 代表權을 大陸에 限定하고 臺灣도 유엔 에 殘留하도록 하여 代表權 問題를 解決하고자 했다. 中國이 유엔에 加入하게 되면 國交 樹立의 可能性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두 個의 中國을 前提로 한 것이었고 中國과 臺灣 모두 하나의 中國 原則을 固守하여 問題 解決은 쉽지 않았다.

이케다는 臺灣을 支持하면서도 臺灣이 實際로 支配하고 있는 타이완섬, 진먼縣 , 마쭈 列島 로 그 地位를 限定하여 中國의 유엔 加入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이를 爲해 장제스를 說得해야 했고 美國으로부터 도움받길 願했던 이케다는 1961年 6月 美國을 訪問해 존 F. 케네디 大統領을 만났다. 이케다는 中國 問題의 重要性을 言及했지만 케네디는 中國의 유엔 加入에 對한 美國 國內의 抵抗이 크다며 反對하여 收穫을 거두지 못했다.

以後 1964年 1月 프랑스 가 中國과 修交를 하면서 世界를 놀라게 했다. 또한 프랑스는 臺灣이 斷交 措置를 하지 않는 以上 只今의 關係를 維持하겠다고도 밝혔다. 日本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은 臺灣이 두 個의 中國을 認定할지 與否를 두고 注目했으며 이케다는 衆議院에 出席해 中國의 유엔 加入이 實現되면 日本도 中國 政府를 承認하고 싶다는 意向을 비쳤다. 하지만 다음 달 臺灣은 프랑스와 斷交하면서 이케다의 뜻은 다시 無爲로 그쳤다.

友好貿易과 LT貿易 [ 編輯 ]

1960年 여름 이케다 內閣이 誕生할 무렵 中國은 積極的인 對日 貿易을 推進하기 始作했다. 日本에서도 마쓰무라 겐조 , 後루이 요시미 , 다카사키 等이 貿易 再開를 위한 努力을 始作했다. 日中貿易促進會議 任員과 저우언라이의 會談에서 貿易 3原則이 提示되었다. 이는 政府 間 協定의 締結, 個別 民間 契約 實施, 個別 配慮物資 斡旋을 말하는데 이를 契機로 이른바 友好貿易(友好貿易)李 始作되었다. 어디까지나 民間 水準에서 進行된 것이었지만 政治 3原則과 政經 不可分의 原則을 遵守하도록 했기에 政治的인 側面도 있었다.

以後 政府 保證도 聯關시키는 새로운 方式의 貿易을 進行하기 위해 1962年 10月 다카사키 通算大臣이 오카자키 街헤타 前日本空輸 社長 等의 企業人들과 함께 訪中하여 11月에 中日綜合貿易에 關한 覺書를 交換하여 政府 保證과 連絡事務所 設置가 이루어졌다. 이는 半官半民 形態이지만 中일 間 經濟 交流가 再開되었음을 의미했다. 이 貿易은 中國 代表 랴오청즈 와 日本 代表 다카사키의 이니셜을 따서 LT貿易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1963年 10月 中國 油壓式 機械代表團의 通譯으로 日本에 온 人物이 亡命을 要求하며 蘇聯 大使館에 갔다가 다시 臺灣 亡命을 要求했다가 最終的으로 中國 歸國을 希望한다고 主張하는 事件이 發生했다. 日本 政府는 該當 人物을 中國으로 强制送還했지만 臺灣이 反撥하여 日本과 臺灣의 關係가 크게 惡化됐다. 이에 요시다 前 日本 總理가 臺灣을 訪問하여 서로의 諒解 事項을 確認한 이른바 요시다 書簡을 作成하여 臺灣 總統府 祕書 장췬 에게 傳해주었다. 이 書簡에는 두 個의 中國에 反對하며 日中 間 貿易은 民間 援助에 한하고 中國에 對한 經濟 援助는 삼가겠다는 內容이 담겨져 있었다. 이는 LT貿易에 影響을 줬지만 이케다는 日中 貿易에 對한 積極的인 姿勢를 바꾸지 않았다.

1964年 4月 다카사키와 랴오청즈는 兩國의 新聞 記者를 交換하고 貿易連絡所를 設置할 것을 決定했다(중일기자교환협정). 9月에는 7名의 中國 記者가 도쿄에, 9名의 日本 記者가 베이징에 派遣되어 兩國의 尙州 記者 交換이 始作됐다.

文化大革命과 覺書貿易 [ 編輯 ]

1964年 가을 이케다가 물러나고 사토 에이사쿠 가 日本의 新任 總理가 되었다. 사토는 7年 8個月 동안 執權했지만 베트남 戰爭 , 오키나와 返還 等의 問題로 바빴고 이 時期 中國도 中小 紛爭 , 文化大革命으로 混亂했기에 中일 間 交流는 蹉跌을 빚었다.

1966年 3月 미야모토 겐지 일본공산당 書記長이 訪中했다. 하지만 마오쩌둥 과의 路線 對立으로 歸國해버렸고 그때까지 友好的이었던 中日 兩國의 共産黨 間의 關係는 크게 惡化됐다.

그 直後에 中國에서는 文化大革命이 始作되었고 中國 政府의 外交 活動은 停滯되었다. 이 混亂은 3年이 지난 1969年 4月 黨大會 以後 鎭靜되기 始作했다. 하지만 그 期間에 中일 兩 政府의 關係는 冷冷해졌다. 그 渦中인 1968年 3月 後루이가 訪中하여 覺書貿易會談 코뮈니케를 調印하여 이른바 覺書貿易 [4] 이 開始되었다. 後루이는 그 以後부터 每해 中國을 訪問해 覺書貿易을 지속시키고자 努力했다. 1960年代 後半이 되어도 두 나라의 外交 關係는 如前히 梗塞되어 있었고 LT貿易도 浮沈을 겪었지만 友好貿易은 上昇勢를 타서 10倍나 成長했다.

經緯 [ 編輯 ]

美國과 中國의 接近 [ 編輯 ]

1950年代 國際 情勢는 西歐圈과 東歐圈의 對立 構造를 보였지만 中小 對立, 프랑스의 讀者 外交, 베트남 戰爭, 文化大革命과 같은 事件들이 일어나면서 1960年代 國際 情勢는 더 複雜해지고 多角化되었다. 1969年에 일어난 中小 國境 紛爭 을 契機로 蘇聯을 敵對視하기 始作한 中國은 文化大革命의 混亂이 鎭靜되고 저우언라이가 權力을 回復한 뒤 積極的인 外交 政策을 펼치기 始作했다. 1970年 10月에는 캐나다 , 12月에는 이탈리아 와 國交를 맺으면서 美國과의 國交 樹立 움직임이 물밑에서 進行되기 始作했다.

나고야詩 에서 열린 1971年 世界 卓球 選手權 大會 때 中國選手團과 美國選手團 사이에서 些少한 이벤트가 있었고 이를 契機로 美國選手團이 中國에 招請받는 일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핑퐁 外交 인데 이 事件은 政治로 擴大되어 헨리 키신저 國務長官이 祕密裏에 베이징을 訪問하여 中國 政府와 對話했고 7月 15日 리처드 닉슨 美國 大統領이 다음해에 中國을 公式 訪問하겠다는 發表가 이어서 나왔다(제1차 닉슨 쇼크). 그리고 1972年 2月 닉슨은 公式的으로 訪中 했다.

1971年 中國의 유엔 加入에 對해 贊成票가 多數를 차지하여 中國의 유엔 加入은 確實視되고 있었다. 이 무렵 美國은 中國을 파트너로 하여 새로운 東아시아 秩序 形成을 摸索하기 始作했다. 이를 통해 蘇聯을 牽制하고 中國이 支援하던 베트남 民主 共和國 (북베트남)과 平和 交涉을 促進하고자 했다. 이러한 目的을 두고 닉슨의 갑작스런 訪中이 實現된 것이다.

닉슨이 訪中했을 때 키신저는 저우언라이에게 美日安保條約은 蘇聯을 牽制하고 日本의 軍事力을 억눌러 日本이 軍事大國으로 發展하는 것을 막는 것이 目的이라고 說明했다. 저우언라이는 이를 理解한다고 答했다. 이는 後날 中일 間 國交正常化 交涉에서 障礙物을 하나 除去한 셈이 되었다.

사토 內閣과 國際 情勢 [ 編輯 ]

사토는 臺灣의 유엔 殘留를 支持하면서도 前任 이케다 政權과는 달리 두 個의 中國을 前提로 하지 않았다. 臺灣을 正統 政府로 看做하는 現實的 對應을 前提로 하여 將來에 兩國이 서로를 承認하는 方向을 摸索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토 內閣 當時 베트남 戰爭이 激化하고 中小 對立과 文化大革命의 混亂 속에서 日本이 中國에 接近해도 얻을 수 있는 件 없었다. 또한 사토 內閣의 優先 課題는 오키나와 返還이었기에 中일 間 關係는 繼續 正體 狀態에 머물렀다.

1970年代 美中 間 急速한 接近이 이루어질 當時 西方 主要國 가운데 中國과 國交가 없던 나라는 日本과 西獨 뿐이었다. 이는 當時 日本 外交街 뒤처져있다는 印象을 주었다. 하지만 執權 자민당은 冷戰的 思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親臺灣派 勢力( 겐다 미노루 , 하마다 고이치 等이 親臺灣波로 活躍했다)의 힘도 强했다. 애初에 中國과 臺灣은 서로가 서로를 承認할 생각이 全혀 없었기에 사토의 構想은 받아들여질 餘地가 조금도 없었다.

1971年 가을 유엔 總會에서 中國의 加入을 審議했을 때 美國과 日本은 모두 加入 自體에는 反對하지 않고 臺灣을 유엔에서 排除하는 것을 重要事項으로 하여 只今까지와는 다른 方向의 思考 方式인 '逆重要事項안' [5] 과 中國의 常任理事國 進入을 認定하면서도 臺灣의 議席도 維持하는 '複合二重代表第決議案' [6] 두 가지를 共同 提案했다. 하지만 逆重要事項安易 否決되면서 複合二重代表第決議案도 自動的으로 消滅되어 中國의 加入과 臺灣의 追放을 規定한 유엔 總會 決意 第2758號가 採擇되었다. 美國과 日本은 反對했지만 贊成票가 더 많이 나와 이를 막지 못했다.

美國은 中國의 유엔 加入에 反對했지만 이미 祕密裏에 키신저는 訪中하여 닉슨의 訪問에 對한 協議를 한 狀態였다. 이 무렵 미노베 料키치 도쿄都知事 가 極祕裡에 訪中했을 때 호리 시게루 幹事長이 저우언라이에게 中國은 하나이며 中華人民共和國이 中國을 代表하는 政府이고 臺灣은 中國의 領土임을 言及한 親書를 傳하도록 했다. 該當 親書에는 兩國 政府 間의 對話를 하고 싶다는 內容도 함께 있었는데 이 親書의 存在는 今方 世上에 드러났다. 하지만 日本이 中國의 유엔 加入과 臺灣의 유엔 追放을 反對한다고 생각했던 저우언라이는 "속임數는 믿을 수 없다"라고 一蹴했다. 結局 호리의 努力은 失敗했지만 호리는 臺灣을 支持하는 旣存의 立場을 바꿔 中國과의 國交 樹立을 支持하게 되었고 자민당 內의 親中國波와 親臺灣派의 力學 關係도 變化하게 되었다.

한便 1971年에는 日本 財界도 訪中團을 派遣했다. 9月 사에키 이사무 를 中心으로 한 간사이財界訪中團이, 11月 나가노 시게오 日本商工會議所 會長과 基가와다 가즈打카 經濟同友會 代表幹事腸을 中心으로 한 도쿄財界訪中團이 中國을 찾아 베이징 人民大會堂 에서 저우언라이 總理와 會談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나가노에게 "이걸로 中日 關係는 完全히 收復되었다. 우리는 向後 어떤 日本人도 歡迎하겠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中일국교정상화는 日本 財界의 訪中 成果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評價가 있다.

1972年 1月 사토는 施政方針 演說에서 "中國은 하나라는 認識 속에서 앞으로 中國 政府와의 關係를 正常化하기 위해 政府 間 對話를 始作하는 것이 急先務다"라고 밝혀 中國과의 國交正常化를 目標로 삼는 意向을 내비쳤다.

日本放送協會 (NHK)의 取材에 依하면 사토는 任期 中에 國交 回復을 目標로 하여 祕密裏에 特使를 보내 中國과 臺灣 사이에서 連絡을 取했으며 美國에 이어 國交 回復 交涉을 進行하기 위해 베이징을 訪問하길 願했다고 한다. 다만 總理 자리를 노리는 자민당 內의 勢力으로부터 干涉이 들어와 計劃이 挫折되었고 後任 總理로 支持하던 후쿠다 다케오 에게 中國 側 關係者를 소개시켜주는 것으로 사토의 役割은 끝났다.

다나카 內閣 [ 編輯 ]

1972年 7月 다나카 가쿠에이 가 新任 日本 總理로 就任했다. 다나카는 就任 前부터 일中 關係 打開를 위해 積極的인 姿勢를 보였고 就任 後 첫 談話에서도 日中國交正常化를 서두르겠다고 發言했다. 저우언라이는 이틀 뒤에 곧바로 和答했으며 7月 16日 사사키 高調 社會黨 委員長이 訪中했을 때도 日本 總理의 訪中을 歡迎한다는 메시지를 傳했다. 7月 25日 다케이리 요시카쓰 公明黨 委員長이 訪中했을 때 [7] 저우언라이는 別途의 메모를 件내주었다. [8] 該當 메모는 8月 4日 다나카와 오히라 마사요시 外務大臣에게 건내졌는데 메모에는 '國交 回復 3原則을 充分히 理解한다', '唯一 合法 政府로서 認定한다', '共同 聲明으로 戰爭 狀態를 終結한다', '戰時 賠償을 抛棄한다', [9] [10] '平和 5原則에 同意한다', '霸權主義에 反對한다', '唯一 合法 政府로서 認定한다면 國交 回復 3原則에서 臺灣에 關한 部分은 祕密로 해도 좋다', '美日安保條約을 容認한다' 等의 內容이 담겨있었다. 다나카는 이를 읽고선 베이징을 訪問할 뜻을 굳혔다. [11] [12]

日本이 國交 回復에 本格的으로 나섰다는 것을 中國도 認知하였고 상하이無極團長으로서 日本을 訪問 中인 쑨핑화(孫平化) 中日友好協會 副祕書長과 샤오샹 前 中일備忘錄貿易변사처 도쿄連絡處 首長 代表가 8月 15日 帝國호텔에서 다나카와 談話하도록 했다. 이때 다나카는 방중할 意向이 있음을 처음 公式的으로 밝혔고 中國이 正式으로 다나카를 招待했음을 傳達받았다. 中國과 日本의 交涉은 이렇게 始作했다.

重일國交正常化 交涉 [ 編輯 ]

다나카는 美國보다 일찍 中國과 國交를 正常化하기로 決斷했다. 7月 19日 이런 意向을 로버트 S. 잉거솔 美國 大使에게 傳했고 하와이섬 에서 열린 日美頂上會談에서도 言及했다.

닉슨이 訪中하고 7個月이 지난 9月 25日 다나카가 中國을 찾았다. 베이징에서 1次 會談이 열렸는데 日本에서는 다나카, 오히라, 니카이度 스스무 官房長官, 다카시마 마스오 外務省 條約局長, 하시모토 히로시 外務省 中國課長, 구리야마 等 8名이 參席했으며 中國側 參與者는 저우언라이, 지펑페이 外交部長, 랴오청즈, 한녠롱(韓念龍) 外交部 副部長, 장샹山(張香山) 顧問 等 8名이었다. 日本은 共同聲明의 形態로 國交를 正常化할 것, 中國이 一味安保條約 體制를 是認할 것, 日本이 臺灣과의 平和 條約을 終了할 것 等이 確認되었다. 밤에 열린 晩餐會에서 저우언라이는 "兩國이 努力하고 充分히 對話해서 다른 點을 認定하면서 共同의 利益을 追求하면 [13] 中일국교정상화를 반드시 實現할 수 있다고 確信한다"고 말했고 다나카도 "過去에 中國 國民에게 많은 弊를 끼친 點을 깊이 反省한다"고 和答했다.

26日 午前 外相會談에서 戰爭 狀態를 終結, [14] 國交 回復 3原則, 賠償 請求를 抛棄, 戰爭 反省 等 네 가지에 關한 기초적인 見解가 提示되었다. [15] 午後에 열린 頂上會談에서는 저우언라이가 '民弊' 發言 [16] 과 '臺灣과의 平和 條約의 整合性(整合性)' 얘기를 날카롭게 指摘했다. 이에 그날 저녁 外相會談 日程을 急히 잡았는데 이 자리에서 中國은 '臺灣은 中國의 一部'라고 主張했고 日本은 '나눌 수 없는 一部임을 再確認한다', '日本 政府는 이를 充分히 理解하며 포츠담 宣言에 根據한 立場을 堅持한다' [17] 는 趣旨의 案을 提示했다.

27日 저녁 頂上會談은 溫和한 雰圍氣였다. 中小 關係를 包含한 全般的인 外交 問題와 政策에 關한 얘기가 話題를 이루었다. 다나카가 센카쿠 列島 얘기를 꺼냈을 때 저우언라이는 只今 얘기해도 相互 間에 利益이 없다면서 國交正常化를 위한 案件을 먼저 處理하자고 하여 論議를 避했다. 밤에 다시 外相會談이 열렸는데 戰爭 責任에 關해서는 '깊이 反省한다'는 表現으로 整理되었다.

28日 午後 頂上會談에서 오히라는 日本과 臺灣의 關係가 이番 共同聲明이 發表되는 다음 날에 終了될 것이지만 民間 貿易 等의 關係는 繼續될 것이라는 立場을 나타냈다. 저우언라이는 默認하는 姿勢를 보였다.

29日 다나카와 오히라가 저우언라이, 지펑페이와 만나 中일공동성명에 署名하여 中일국교정상화가 成立했다. 이때 日本은 戰後 最初로 戰爭 責任을 認定했다.

當時는 아직 戰爭이 끝나고 30年도 채 지나지 않았기에 國交正常化를 위한 交涉 過程에는 戰爭의 傷處가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日本 人民과 中國 人民은 모두 日本軍國主義의 被害者라며 日本軍國主義와 日本 人民을 區分하는 것으로 未來志向的 態度를 보였다. 이는 中國의 抗日民族運動을 讚美하고 日本의 軍國主義 侵略을 非難하더라도 兩國 間의 外交 問題에는 어떠한 否定的 影響도 없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루어진 未來志向的 態度와 政治的 合意는 只今도 繼續 이어지고 있다.

國交正常化가 이루어지고 6年이 지난 1978年 8月 후쿠다 다케오 總理는 中日平和友好條約 을 締結하게 된다.

參考 文獻 [ 編輯 ]

  • 倪志敏 「다나카 內閣의 日中國交正常化와 오히라 마사요시 (1 · 2 · 3 · 4)」 『류코쿠大學 經濟學 論集』 第45卷 第5號 / 第46卷 第5號 / 第47卷 第3號 / 第48卷 第3·4號 (2006年 3月·2007年 3月·2007年 12月·2009年 3月)
  • 鹿雪瑩 『後루이 요시미와 中國 日本 國交 正常化에의 길』 (思文閣出版, 2011年) ISBN 9784784215904
  • 핫토리 류지 (2011年), 《日中?交正常化 - 田中角?、大平正芳、官僚たちの挑?》 [重일國交正常化 -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官僚들의 挑戰], 中公新書, 中央公論新社, ISBN   412102110X  
  • 西原哲也 『覺醒 中國 숨겨진 日本企業社』 (社?評論社, 2012年)
  • 中野士朗 『다나카 政權·886日』 (行政問題?究所, 1982年)
  • 安藤俊裕 『政客 예전 ~호리 시게루』 (日本??新聞出版)
  • 鬼頭春樹 『國交正常化 交涉 ~베이징의 5日間~』 (NHK出版, 2012年)
  • 石井明?朱建??添谷芳秀?林?光 『日中國交正常化·日中平和友好條約 締結 交涉』 (岩波書店, 2003年)

各州 [ 編輯 ]

  1. 덜레스는 日本 政府가 臺灣 政府를 承認하지 않으면 强化 條約이 美國 議會에서 批准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言質을 주었다. 當時 日本은 美國의 占領 下에 놓여있었기에 讀者 外交가 어려웠고 結局 美國의 意向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2. 美國이 臺灣 政府를 强力하게 支持하고 있었고 臺灣 政府도 戰爭 賠償에 關한 戰後 處理를 서두르고 있었다. 當時 美國은 日本과 臺灣의 修交가 講和 條約 發效 後에 이루어지면 臺灣의 立地가 弱해질 것이라고 憂慮하고 있었다.
  3. 中國 政府의 이러한 政策을 移民促關(以民促官)이라 부른다.
  4. MT貿易이라고도 表記하는데 이는 覺書貿易의 英語 表現인 Memorandum Trade의 略稱이다. 그런데 'trade'라는 單語가 貿易이란 뜻이기에 MT貿易은 '覺書貿易 貿易'이란 뜻이 되어버린다.
  5. 中國의 유엔 加入은 重要事項으로 指定되어 2/3의 贊成이 必要했다. 이는 中國의 加入을 沮止하기 위해 美國이 主導해서 만든 것이었는데 1971年에는 反對로 臺灣의 追放을 重要事項으로 하여 2/3의 贊成이 必要하다고 바꾼 것이다.
  6. 旣存의 中國의 加入을 認定하지만 常任理事國 地位는 臺灣이 가지는 案件을 代身하여 中國이 常任理事國 地位를 承繼하되 臺灣의 유엔 殘留를 認定하는 案件으로 바뀐 것이다.
  7. 다케이리는 政府의 特使로 간 것도 아니었고 다나카의 메시지를 가지고 간 것도 아니었다. 다케이리는 後날 스스로를 '特赦와 비슷한 무언가'라고 했으나 다케이理가 다나카의 傳言을 가지고 왔을 것이라고 中國이 錯覺을 하여 그에게 日本 總理에게 보내는 메모를 傳達해주었고 다케이리는 意圖치 않게 仲介役으로서의 役割을 遂行했다.
  8. 다케이리는 後날 交涉 過程을 詳細히 記錄한 메모와 會談 記錄을 作成하게 된다. 參考로 이때의 메모는 다케이리 메모라고 부른다.
  9. 當時 外務省 條約局長이던 구리야마 다카카즈 는 後날 中國이 對日賠償請求權을 抛棄하지 않았다면 中國과의 國交正常化는 財政上 不可能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 다케이리는 賠償請求權을 抛棄한다는 中國의 發言에 몸이 떨렸다고 한다. 그는 中國이 賠償請求權을 抛棄하지 않을 것이고 個人的으로는 500億 달러 程度를 豫想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臺灣과의 平和 條約 當時에도 金錢的인 賠償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中國이 金錢的 賠償을 要求한다면 자민당 內에서 反撥이 나올 것이므로 中國이 이를 看破한 것으로 보인다.
  11. 다케이理가 저우언라이를 만났을 때 랴오청즈의 방일을 延期할 것을 發表한다면 이것을 다나카가 訪中하겠다는 뜻으로 理解하겠다는 合意가 있었다. 다음 날 日本 新聞에서 랴오청즈의 訪日이 延期되었다는 記事가 揭載되었고 中國은 이것으로 다나카가 방중할 뜻을 굳혔다고 받아들였다.
  12. 그런데 랴오청즈의 訪日은 元來 사사키가 要請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다케이理가 사사키에게 諒解를 求하지 않고 連絡도 하지 않은 채 一方的으로 發表를 해버려서 사사키가 크게 火를 냈다고 한다.
  13. 저우언라이가 말한 表現은 求同存異(求同存異)로 첫날 頂上會談에서 言及한 이 表現은 以後 中일 間 頂上會談의 키워드가 된다.
  14. 當時 日本과 中國은 平和 條約을 締結하지 않아 第2次 世界 大戰에서 祈願한 戰爭 狀態가 繼續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臺灣은 이미 日本과 平和 條約을 맺어 戰爭이 끝나고 戰爭 賠償 請求도 抛棄한 狀態였다. 따라서 中國과 平和 條約을 締結해 戰爭 狀態를 끝내버리면 하나의 中國 原則에 따라 臺灣과의 平和 條約은 存在 自體가 不正當하게 된다. 이를 憂慮한 外務省은 '戰爭 狀態' 終結이 아니라 '非正常的인 狀態'를 終結한다는 表現으로 合意를 이루어냈다. 以後 中日共同聲明 以後 臺灣과의 平和 條約은 終了하게 된다.
  15. 이 過程에서 다카시마가 臺灣과의 平和 條約과의 關係에서 戰爭 終結과 賠償 抛棄에 對한 整合性을 言及했고 저우언라이를 크게 火를 냈다.
  16. 다나카는 'ご迷惑'(民弊)라고 發言했는데 中國에선 이를 '添了麻煩'라고 飜譯했다. 이 表現은 謝過 表現이기는 하나 英語의 'sorry'에 該當하는 가벼운 謝過 表現이었기에 中國이 크게 反撥했다.
  17. 事實 이 時點에서는 아직 美國조차도 中國을 唯一한 合法 政府로 認定하지 않았다. 따라서 日本은 中國을 唯一한 合法 政府로 認定한다는 文句를 넣는 것은 避해야만 했고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포츠담 宣言을 堅持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구리야마의 아이디어였는데 이로써 日本은 臺灣이 中國을 代表하는 唯一한 政府임을 支持하지 않는다는 表現을 間接的으로 代替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