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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中 邊戒 條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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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中 邊戒 條約 (朝中邊界條約, 中國語 : 中朝?界?? )은 1962年 10月 12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中華人民共和國 兩國이 平壤 에서 締結한 國境 條約으로, 1964年 3月 20日 베이징 에서 兩國이 議定書( 朝中 邊戒 議定書 , 中國語 (中國) : 中朝?界?定? )를 交換함으로써 發效되었다.

이 條約은 白頭山 · 鴨綠江 · 豆滿江을 境界로 하는 兩國의 國境線을 明確히 하는 內容을 담고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金日成 과 中華人民共和國 저우언라이 가 兩國을 代表하여 署名하였다.

條約의 內容 [ 編輯 ]

白頭山 의 國境線

朝中 邊戒 條約 白頭山 , 鴨綠江 , 豆滿江 그리고 黃海 領海 (領海)의 國境線 에 關한 內容을 적고 있다.

條約文에 따르면 白頭山 天地 (天池)의 境界線은 '天地를 둘러싸고 있는 山마루의 西南쪽 眼部(鞍部, 鞍裝처럼 들어간 部分)로부터 東北쪽 眼部까지를 그은 直線'으로 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現在 天地 의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 45.5%는 中華人民共和國 에 屬한다. [1]

또한, 條約에는 鴨綠江 豆滿江 의 警戒 및 두 講義 하중도 使嗾 (砂洲, 모래톱)의 歸屬에 關한 內容도 담고 있는데, 이 條約의 議定書에는 兩側 國境의 銃 451個 섬과 使嗾 가운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은 264個의 섬과 使嗾(銃 面積 87.73 km 2 )에 對해, 中華人民共和國 은 187個의 섬과 使嗾(銃 面積 14.93 km 2 )에 對해 領土權이 있음을 列擧하고 있다. [2]

歷史的 背景 [ 編輯 ]

朝鮮 淸나라 는 1880年代에 두 次例 걸쳐 白頭山 과 그 東쪽의 國境을 明確히 劃定하기 爲한 減髻(勘界) 會談을 가졌으나, 會談은 모두 決裂되었다. 第1次 鑑戒會談( 1885年 )에서는 白頭山定界碑 에 쓰여진 동위토문(東爲土門)의 "土門(土門)"李 豆滿江 을 뜻하는 것인지에 對하여 兩側이 다투었다. 當時 朝鮮 側은 定界碑 의 位置上 '土門은 豆滿江과 別個의 江이다'고 主張하였고, 側은 兩國의 基本的인 國境線 豆滿江 이라는 前提下에 '土門은 곧 豆滿江을 指稱한다'고 主張하였다.

第2次 鑑戒會談( 1887年 )에서 朝鮮 側은 白頭山 算定(山頂)에서 가장 가까운 豆滿江 上流인 紅土수 (紅土水)를 國境으로 할 것을 主張하였고, 側은 北胞胎山(北胞胎山)에서 發源하는 豆滿江 의 支流인 洪斷水 (紅端水)를 國境으로 主張했다가 朝鮮 側 代表인 이중하 의 論理에 밀리자 紅土수 의 南쪽 支流인 석을수 (石乙水)를 境界로 삼자고 修正提議하였다.

1909年 9月 4日 , 朝鮮이 外交權을 박탈당한 狀態에서 淸나라 一齊 (日帝)는 間島 協約 을 締結하여 豆滿江 을 國境으로 하고, 白頭山定界碑 를 起點으로 하여 석을수 를 그 上流의 境界로 定하였다. [3]

1945年 8月 15日, 日帝가 敗亡함 으로써 日帝가 締結한 條約인 間島 協約 은 無效가 되었다. 이에 새로 國境線 을 定하기 위해 締結된 條約이 朝中 邊戒 條約 이다.

條約의 意義와 限界 [ 編輯 ]

條約의 意義 [ 編輯 ]

朝中 邊戒 條約 白頭山 의 國境을 自然 境界인 天地 (天池)로 하고 그 東쪽 國境을 天地에서 가장 가까운 豆滿江 上流인 紅土수 (紅土水)로 하는 [4] [5] 自然스러운 國境 을 定함으로써 19世紀 後半부터 한世紀 동안 論難을 이어 온 白頭山 豆滿江 上流의 國境線 을 明確히 劃定했다는 데에 意義가 있다.

條約의 限界 [ 編輯 ]

朝中 邊戒 條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中華人民共和國 兩側이 모두 祕密로 하였기 때문에 그 具體的 內容은 1999年까지 世上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條約은 兩國이 모두 그 締結을 公式的으로 認定한 바 없는 祕密 條約이므로 韓半島 統一 過程이나 그 以後에 國境 紛爭의 불씨가 될 可能性을 排除할 수 없다.

冷戰時代 였던 1980年代 初에 白頭山 天池(天池)를 北·中 兩側이 分割했다는 事實이 韓國 社會에 알려진 後 한동안 韓國戰爭 參戰의 代價로 北側이 天地의 折半을 中國側에 割讓했다는 主張이 信賴할 만한 根據 提示 없이 對北(對北) 不信感에 依存해 事實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으며, [6] 現在도 北側이 土門(土門)을 國境 으로 主張하지 않고 肝도 (間島)의 領土權을 抛棄했다는 否定的인 評價가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大韓民國 에서 發行된 地圖들은 天地 (天池) 全體를 大韓民國 領土로 보아 '天地를 둘러싸고 있는 北쪽 山마루를 이은 線'을 韓國과 中國 사이의 國境線으로 表示하고 있다. 그러나, 鴨綠江 豆滿江 의 國境線은 組中 邊戒 條約에 따른 國境線 과 같아서 肝도 地域을 大韓民國 領土로 標示하고 있는 地圖는 없다고 봐도 無妨하다.
  2. 朝中 邊戒 條約 第2條第1項에는 "條約 締結 前에 이미 한쪽의 公民(公民)李 살고 있거나 農事를 짓고 있는 섬과 모래섬은 그 國家의 領土가 된다."고 規定하고 있다.
  3. 間島 協約 第1條 原文 "第一條 日淸兩國政府ハ圖們江ヲ淸韓兩國ノ國境トシ江原地方ニ於テハ定界碑ヲ起點トシ石乙水ヲ以テ兩國ノ境界トナスコトヲ聲明ス"(第1條 日·靑 兩國 政府는 도문강을 淸國과 韓國의 國境으로 하고, 江 源泉地에 있는 定界碑 를 起點으로 하여 석을수 를 두 나라의 境界로 함을 成名한다.)
  4. 白頭山一帶 280km 2 우리땅 編入 京鄕新聞, 1999.10.21. 3面
  5. 過去 白頭山 國境의 標石이었던 白頭山定界碑 의 位置는 天地(天池) 南東쪽 4Km 地點이었기 때문에 한·中間 國境으로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朝中 邊戒 條約 의 國境 劃定으로 天地 의 54.5%와 白頭山 最高峯인 將軍峯을 韓國 領土로 確定했다는 點에서 韓國 戰爭 參戰의 代價로 北·中이 白頭山 天地 를 分割했다는 主張은 根據가 없다.
  6. 김영광議員 外 54人 (1983年 9月 16日). “白頭山 領有權 確認에 關한 決議案” . 大韓民國 國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