沃川府院君 조원길 墓 및 墓表
(玉川府院君 趙元吉 墓 및 墓表)는
全北特別自治道
淳昌郡
유등면
에 있는, 高麗 末의 文身 조원길(趙元吉)의 墓와 墓表이다. 2005年 12月 16日
全羅北道의 記念物
第124號로 指定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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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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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길
文書를 參考하십시오.
高麗 末의 文身 조원길(趙元吉)은 本貫은 沃川(玉川: 淳昌의 옛 地名), 字는 성중(聖中), 號는 농은(農隱)이다. 1369年(恭愍王 18)에 文科에 及第하여 檢校, 시중 等 여러 官職을 지냈다. 정몽주·설장수와 함께 恭讓王을 王으로 받든 공으로 1等功臣이 되고 沃川府院君에 封해졌다. 高麗가 亡한 뒤 朝鮮에 벼슬하지 않고 節義를 지켜 李穡 等과 함께
5은
(五隱)
[A]
으로 불렸다.
[2]
墓 및 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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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는 이乾谷마을에 沃川조氏 時調의 설단(設壇)과 함께 있다. 조원길과 沃川郡夫人 조氏를 함께 장사韓 封土墳으로 墓域의 形態와 配置가 高麗時代의 陵墓와 매우 類似하다. 風水學에서는 ‘게[蟹]型’ 明堂으로 불리고 있다.
[2]
墓碑는 1391年 조원길 藝場 當時 아들 兆油가 세운 것으로, 發見 當時 墓 앞 築臺 둘레石으로 놓여 있었다. 碑石의 規模는 길이 2m, 幅 50cm, 두께 30cm 程度이다. 墓表 윗部分에만 文字가 새겨져 있어 碑臺石이나 加檐石 없이 碑身石만 땅 속에 折半쯤 묻어 세운 것으로 推定된다.
[2]
磨滅이 甚해 碑文을 識別하기 어려우나 精密拓本을 통해 42者의 글씨를 밝혀냈다. 碑文 內容은 ‘1391年(紅무 24) 辛未 新軸索 三十日 壬午에 前公判서 조원길과 沃川郡夫人 조氏를 함께 장사韓 墓이며, 孝子(孝子: 父母의 祭祀 때 子息을 가리키는 말) 前(前) 否定(副正 : 高麗의 官職) 詔諭(趙瑜) 贊庶子’로 되어 있다. 高麗時代 墓域과 金石文 硏究에 重要한 資料로 評價된다.
[2]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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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內容
- ↑
오은(五隱) : 圃隱(圃隱)
정몽주
, 목은(牧隱)
異色
, 冶隱(冶隱)
吉再
, 陶隱(陶隱)
이숭인
, 弄은(農隱)
조원길
- 出處
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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