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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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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 에스페란토 :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 英語 : Korean Artist Proletarian Federation ) 또는 單純히 通稱 카프 (KAPF)는 1925年 8月에 結成된 社會主義 文學團體이다. 階級 意識에 立脚한 組織的인 프롤레타리아 文學과 階級革命運動을 目的으로 삼았다. 代表作家로 崔曙海, 조명희, 李箕永, 韓雪野 等이 있다.

組織과 文學 [ 編輯 ]

1925年 카프의 結成과 함께 1934年까지 約 10年間 文段을 風靡한 프로 文學은 政治意識과 階級意識을 內包한 目的意識의 文學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文學의 求心點(求心點)인 '朝鮮 프롤레타리아 藝術家 同盟' 卽 '카프'는 一般的인 文學 團體와는 달리 政治性이 濃厚한 組織的인 團體로, 프로文學의 政治性은 이 組織에서 비롯되었다. 新傾向派 文學과 프로文學이 같은 社會意識에서 出發하면서 서로 區別되는 것은, 電子가 自然 發生的인 漠然한 貧窮과 反抗의 文學인 데 對하여 後者는 組織的인 政治鬪爭을 意識한 目的意識의 文學이란 點이다. 프로文學이 카프의 指導原理에 따라 움직이고, 1926年 氣管支 《文藝運動》을 통해 組織的인 文學運動을 展開한 것은 프로文學의 政治性을 잘 말해 준다. 또 1927年 朴英熙가 《文藝 運動의 方向轉換論》에서 "自然生長적 小說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文藝運動은 階級的 革命을 위한 目的意識을 갖게 되어야 한다"고 主張, 프로文學은 階級鬪爭의 한 部門이라 한 것은 프로文學이 目的意識의 文學임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1]

따라서 文學이란 獨自的 藝術의 領域이 아니라 大衆에게 階級意識을 啓蒙·宣傳하는, 卽 政治運動을 實現하기 위한 手段으로 認定되었다. 1926年 金基鎭이 《朝鮮之光》에서 "新小說이란 한 個의 建築이다. 기둥도 없이 서까래에 붉은 지붕만 입혀 놓은 建築이 있는가" 라고 하며 프로文學이 너무 形式을 無視하고 政治鬪爭의 槪念에 沒頭한 데 對한 批評을 加했다. 이 때 過激派이던 朴英熙는 1927年 《鬪爭記에 있는 文藝批評家의 態度》(《朝鮮之光》)에서 "프로 作品은 君(君)의 말과 같이 獨立된 建築物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큰 機械의 한 齒輪(齒輪)인 것"이라고 猛烈한 反駁과 攻擊을 加해 왔다. 이것이 自體 內의 第1次 카프 論爭인데, 여기서 金基鎭이 敗北했다는 것은 當時 프로文學의 公式主義(公式主義)的 傾向을 그대로 反證한 것이다. 또한 이 무렵 윤기정·이북만 等이 目的意識論에 對한 理論을 展開하여 이 時期의 機械主義的 文學觀은 絶頂에 達했다. 이러한 形式을 度外視한 內容 偏重의 文學觀과 關聯하여 1929年에는 프로文學派와 양주동 사이에 內容과 形式의 論爭이 있었는데, 프로文學의 內容 偏重에 對하여 梁柱東은 藝術派的인 立場에서 文學作品은 內容보다 形式美(形式美)가 더 本質的이라는 것을 主張했다. [1]

이러한 過程을 거치는 동안에 프로文學은 作品活動의 强調와 形式의 重要性을 反省하게 되어, 1928年 朴英熙는 "藝術 運動이 大衆을 獲得하려면 作品 없이는 可能한 일이 아니다"(《최근 文藝時感》)라 하여 作品活動을 强調했고, 따라서 作品形式의 問題도 프로文學의 大衆化와 關聯해서 强調되었다. 1929年 金基鎭에 依해 提起된 形式論은 그 代表的인 것으로, 프로文學이 階級鬪爭을 위해 大衆에게 啓蒙·宣傳을 하기 위해서는 作品을 一般 下層 庶民들이 親近味를 느낄 수 있도록 平易한 文體와 大衆的인 文學形式이 要求된다고 하여, 作品의 大衆化를 前提로 한 文學形式의 必要性을 밝혔다. 1928年 11月 金基鎭이 《春香傳》式 家庭·通俗小說의 形式을 그대로 利用하자고 한 것이 그 例로, 한때 카프 內의 少壯派들에 依해 論爭이 있었는데, 作品 形式은 單純히 平易한 것, 通俗的인 것이 아니고 그들의 世界觀에 依한 新리얼리즘 手法이며, 이에 附隨되는 신형식이어야 한다고 結論을 맺었다. [1]

內容과 形式問題와 關聯해서 創作方法에 對한 再檢討도 要請되었는데, 1928年 金基鎭이 《辨證法的 寫實主義》를 發表한 것을 비롯하여 1932年 以後에는 舊蘇聯의 文學論에서 影響받은 社會主義的 리얼리즘論 等으로 發展되었다. 이 創作 方法論에 對한 論議는 金基鎭·朴英熙를 비롯하여 신유인 의 《創作의 固定化에 對하여》, 白鐵 의 《創作 方法論第》, 林和·안함광(安含光)·김두용·한효(韓曉)의 《社會主義 리얼리즘의 再檢討》, 金南天의 《創作 方法의 轉換 問題》 外에 많은 사람들이 參加했다. 當時 創作方法을 中心으로 檢討된 것은 過去 프로文學의 公式的인 機械主義 文學觀에 對한 批判意識에서 擡頭된 것이며, 또 이것이 動機가 되어 프로文學은 차츰 弱化·分裂되어 갔다. [1]

作品과 作家 [ 編輯 ]

1926年 1月 카프의 準機關誌로 發刊된 《文藝運動》은 3號를 내고 廢刊되었으나 프로文學 第1期에 있어서 過渡期的인 役割을 한 雜誌였다. 여기 發表된 金基鎭 의 《本能의 復讐》, 이익상 의 《威脅의 채찍》, 이기영 의 《쥐 이야기》, 《팔아먹은 딸》, 최서해 의 《醫師》(醫師) 等은 아직 新傾向派의 自然發生的 要素가 그대로 남아 있고, 1927年 自體 內의 理論 鬪爭을 거쳐 박영희 의 《文藝運動의 方向》李 發表된 以後 目的意識器의 프로文學運動은 그 理論과 함께 作品에도 方向 轉換이 反映되었다. [1]

프로文學의 이러한 轉換期의 代表的인 作品은 조명희의 《洛東江》(洛東江)이었다. 《洛東江》은 이른바 第2基의 作品으로, 從前의 新傾向派 文學이 貧窮에 抗拒하는 反抗的인 特色이 自然發生的인 데 對하여, 이 作品은 그 貧窮의 原因을 民族的·階級的 事情과 環境으로 提示했다. 卽 《洛東江》에서 作家는 洛東江邊의 貧窮한 住民의 生活이 資本階級과 日帝의 收奪에 依한 것이라 보고, 自覺的인 階級意識에 依한 反抗을 試圖했다. 또 作家는 이 作品에서 目的意識이 透徹한 한 主人公을 등장시켜 階級鬪爭의 必要性을 說明하고, 具體的으로 中農의 沒落, 小農의 貧農化를 强調했다. 따라서 新傾向派 文學에서 自覺的인 階級意識을 내세움으로써 目的意識에 立脚한 프로文學으로 方向을 轉換하는 데 重要한 役割을 했다. 이 作家의 作品으로는 《低氣壓》(低氣壓, 1926) 《同志》(同志, 1927) 《한여름의 밤》 等이 있으나 亦是 《洛東江》李 가장 有名하다. 그 밖에 박영희 의 《地獄巡禮》(地獄巡禮), 이기영 의 《天癡의 倫理》, 최서해 의 《홍염》(紅焰), 《가난한 아내》, 주요섭 의 《개밥》, 송영 의 《石工組合 代表》(石工組合代表) 等이 있으나 이른바 目的意識器의 作品으로서는 그 理論에 못 미친 作品들이며, 作品으로서의 形象化에도 많은 未熟性이 發見된다. [1]

한便 1929年 文學의 大衆化가 强調된 後 1932年까지는 프로文學의 볼셰비키化 過程을 통해 作品活動이 크게 强調된 時期였다. 1929年을 전후해서 發表된 作品으로는 崔曙海의 《먼동이 틀 때》, 한설야 의 《過渡期》(過渡期), 이기영 의 《故鄕》(故鄕, 1933), 《書畫》(鼠火), 《洪水》(洪水) 等이 當時의 評判을 받은 作品들이다. 한便 詩人으로서는 유완희 ·김창술· 홍양명 (洪陽明)· 林和 · 박팔양 等이 活動했고, 프로 詩로서 評判을 받은 것은 1929年 林和의 《우리 오빠와 火爐》가 있을 程度이다. 유완희 의 《우리들의 詩》(1930), 이북명 (李北鳴)의 《窒素肥料工場》(窒素肥料工場, 1933) 等도 典型的인 프로文學作品이었다. 그러나 1934年 프로文學의 指導的 理論家였던 朴英熙가 "얻은 것은 이데롤로기요, 잃은 것은 藝術이었다"고 自己批判의 結論을 내렸던 것처럼, 當時 프로文學은 大部分 圖式的(圖式的)인 目的意識의 善行으로 作家의 創造性을 위축시킨 結果 참다운 作品의 生産이 이룩될 수 없었다. [1]

發刊 機關紙 [ 編輯 ]

프로文學氣를 통해 無數한 氣管支가 發刊되었으나 그 中 重要한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文藝運動》(文藝運動)

1926年 1月에 創刊된 文藝誌. 프로文學派의 最初의 機關紙로 朴英熙가 主宰했다. 創刊號에 박영희·金基鎭·洪命憙(洪命憙)·金復鎭·李相和·조명희·李益相·崔鶴松·李箕永 等이 中心이 되어 執筆 活動을 했고, 3號까지 發刊되었다.

《藝術運動》(藝術運動)

1927年 11月 創刊된 카프의 本格的인 機關紙. 카프 全國大會 後 發刊되어, 이른바 第1次 方向轉換의 契機를 이루었다. 1928年에 2號까지 나오고 《無産者》(無産者)로 改稱되었다.

《第3戰線》(第三戰線)

1927年 2月 도쿄에서 發刊한 순문예지. 카프派의 조중곤·김두용·韓食·洪曉民 等이 1927年 7月 YMCA 會館에서 講演 後 이 雜誌를 配付하다가 押守당했다.

《朝鮮之光》(朝鮮之光)

1922年 發刊된 綜合誌. 學術論文 및 文學作品의 發表로 큰 役割을 했다. 《 開闢 》과 함께 프로文學의 活動舞臺였고, M·L當 機關誌로 이성태(李星泰)가 週間.

《朝鮮文藝》(朝鮮文藝)

1929年 5月 고병돈(高丙敦)이 發行한 文藝誌. 박영희 週間으로 카프 準機關誌로 2號까지 發行했고, 思想的 根據는 階級主義에 두었다.

《朝鮮文學》(朝鮮文學)

1936年 4月에 創刊한 순문예지. 카프 解散 以後 이갑기(李甲基)·韓食·韓濩 等 所藏 改良主義派(改良主義派)가 主로 活動했다.

中心 人物 [ 編輯 ]

各州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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