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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民軍의 서울 占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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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民軍의 서울 占領 以後 3日間의 行跡에 對한 論難은 1950年 6月 28日 새벽 朝鮮人民軍 의 탱크가 서울 中心部에서 目擊되었으나, 戰勢가 유리함에도 不拘하고 朝鮮人民軍은 6月 30日 이 될 때까지 漢江 을 건너지 않았다는 點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對한 解釋으로 다음과 같은 假說이 提起되었다.

假說 [ 編輯 ]

制限戰爭설 [ 編輯 ]

北韓은 戰爭計劃이 南韓 全域을 占領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解釋하는 假說이 있다. 卽 朝鮮人民軍 大韓民國 의 首都인 서울 萬 占領함으로써 戰爭 을 끝내려 했다는 것이다. 朝鮮人民軍의 目標가 統一政府 樹立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制限戰爭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1]

서울에 進駐한 朝鮮人民軍 第1軍團은 大規模 渡河作戰을 遂行할 渡河裝備조차 全혀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自身들의 目標가 統一政府 樹立이었던 만큼 이들은 서울 晉州 後 國會召集을 통해 統一政府를 樹立하기 위해 더 以上 南下하지 않고 서울에 滯留하고 있었다. 그러나 李承晩 政權의 迅速한 南下로 이것이 不可能해지자 朝鮮人民軍은 結局 李承晩 政權을 붕괴시키기 위한 追擊戰을 展開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民衆蜂起 大氣說 [ 編輯 ]

하지만, 朝鮮人民軍이 서울에서 3日間 머무른 事實에 對해서 共産主義 에 同調하는 民衆蜂起 가 일어날 것을 期待했기 때문이라는 說도 있다. 卽, 民衆 들이 共産主義 運動을 일으키면, 이를 基盤으로 南朝鮮을 '解放'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民衆蜂起 大氣說을 主張하는 學者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副首相인 박헌영 라디오 放送을 통해, 産業을 마비시키기 위한 罷業 을 煽動한 것이 그 狀況證據로 본다.

무엇보다도 南韓에서 朝鮮共産黨 남로당 共産主義 運動이 活潑했던 點과 地主와 小作人 間의 對立이 甚했다는 點도 共産主義 蜂起가 民衆 들에 依해 일어날 것이라고 期待하게 했다. 그래서 朝鮮人民軍이 3日間 서울에서 기다렸다는 說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有償沒收, 有償分配라는 短點에도 不拘, 土地改革으로 階級葛藤은 어느 程度 解消된 後였고 여러 改革으로 共産主義 勢力은 弱化되었으며, 北韓의 指導部가 期待한 民衆蜂起는 일어나지 않았다. [3]

스탈린 또는 마오쩌둥 介入說 [ 編輯 ]

러시아 國防部의 軍事硏究所 硏究員 이고르 派포프는 立證 文書는 없다는 걸 前提하면서도 " 스탈린 은 美國이 屈辱的인 敗北를 當하면 原子爆彈 을 使用할지 모른다고 憂慮해서 金日成 의 釜山 突進을 沮止시켰다"는 見解를 提示한다. [4]

또한 마오쩌둥 이 "戰爭은 補給路와 退路를 準備해야 한다"며 急한 追擊戰을 하지 않도록 여러番 警告했고 美軍 介入과 이에 따른 中國軍의 介入을 憂慮했기 때문이라는 說도 있다. [5]

春川 戰鬪 [ 編輯 ]

最近 蘇聯의 祕密 文書가 公開되면서 朝鮮人民軍이 서울에서 3日間 遲滯할 수밖에 없었던 새로운 理由가 提示되었다( KBS1 역사스페셜 放映). 朝鮮人民軍의 作戰計劃에 蹉跌이 생겨 作戰樹立 및 渡河裝備 不足 때문에 3日을 虛費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朝鮮人民軍은 主攻擊을 當時 蘇聯 軍事顧問團作成한 南侵 作戰 計劃書 [6] 에는 朝鮮人民軍 1師團, 3 師團, 4 師團, 6師團과 朝鮮人民軍 105 탱크旅團으로 서울을 攻略하고, 朝鮮人民軍 2師團과 12 師團은 春川 洪川 을 6月 25日 當日에 占領한 뒤, 6月 28日에 水原 을 占領하여 漢江 以南으로 撤收하였던 韓國軍 을 包圍하도록 되어 있었다. 實際로 6月 28日 當日 西部 戰線에서 韓國軍의 可用 兵力은 서울이 占領된 뒤에 南下하여 漢江 防禦線을 形成한 狀態였다.

그러나, 春川 戰鬪 에서 朝鮮人民軍은 韓國軍 6師團의 抵抗에 부딪혀 敗北하였다. 朝鮮人民軍은 側 後方이 露出되는 狀況이 되어 均衡이 맞지 않게 되고 北韓의 駐攻擊軍은 3日間을 서울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春川地球의 韓國軍 6師團(師團長 김종오 大領) 7聯隊는 6月 22日부터 警戒態勢를 强化하며 同時에 前將兵의 外出을 禁止시켰다. 그 때문에 朝鮮人民軍의 奇襲攻擊에도 朝鮮人民軍의 前歷을 40% 以上 擊破하는 戰果를 세웠다. 結局에 朝鮮人民軍 2萬4千 名은 6月 25日 새벽 春川을 奇襲攻擊했지만 40% 以上의 電力을 喪失한 채 失敗하고 만것이다. 韓國軍 6師團은 3日間 朝鮮人民軍과 對峙하며 春川을 確保했으나 陸軍本部 命令에 따라 忠州로 撤收하면서 朝鮮人民軍은 애初 作戰 計劃보다 2日 뒤인(3일만에) 6月 27日 저녁 10時에야 겨우 春川을 占領했고, 7月 1日에야 겨우 楊平쪽의 漢江을 건넌 뒤에 7月 5日에 利川,龍仁에 이르게 되어 서울에서 내려와 水原,烏山을 占領한 朝鮮人民軍과 合流하였다. 이 結果로, 韓國軍을 水原 以北에서 包圍,殲滅하겠다는 朝鮮人民軍의 作戰 計劃은 水泡로 돌아갔고, 韓國軍은 急히 始興地區戰鬪司令部를 設置하여 6月 28日 以後 盜講한 個別的으로 後退한 敗殘兵들과 落伍兵들을 긁어모아 編制를 維持하고 있던 一部 部隊와 합치는 式으로 防禦線을 펼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朝鮮人民軍은 3日間 漢江을 건너지 못했다는 主張이다. 實際로 春川 戰鬪 以後에 朝鮮人民軍은 戰爭을 遂行했던 朝鮮人民軍 2師團과 12師團의 責任者들을 一齊히 解任措置하였다. [7] [8] [9] 또한 朝鮮人民軍은 決戰 試圖해야 할 場所와 時期 分別 못해 成果를 거두지 못한 戰鬪의 失敗를 言及하며 反面 韓國軍은 時間的 精神的 餘裕를 찾아 유엔軍이 增員될 수 있는 時間 갖고 仁川上陸作戰과 洛東江에서의 反擊作戰度 可能하게 되었다.

關聯 圖書 [ 編輯 ]

  • 김성칠 . 《 歷史 앞에서 》. 創批 . 1993年. ISBN   978-89-3647-596-3

各州 [ 編輯 ]

  1. 박태균 ( 2005年 ). 《《韓國戰爭》》. 冊과함께. 朝鮮朝鮮人民軍은 傳貰價~  
  2. 한국정치연구회 (1990年). 《《韓國政治史》》. 백산서당. 220~221쪽쪽.  
  3. 이덕일,이희근 ( 1999年 ). 《《우리歷史의 수수께끼》 2卷》. 김영사.  
  4. 장행훈, 〈蘇, 美核(美核)意識 '釜山攻擊'沮止:'6·25' 42週 … 러시아 軍事年 派포프 硏究員 特別인터뷰〉《 東亞日報 》(1992.6.26.)
  5. 정일화. “〈40年 만에 다시 풀어보는 6ㆍ25의 수수께끼:3〉”. 韓國日報 . 05面面.   다음 글字 無視됨: ‘作成日子1990-06-17 ’ ( 도움말 )
  6. 코리아스코프, <韓國戰爭의 展開過程에 對한 向後 硏究 課題>
  7. 김종오, 《變質되어가는 韓國現代史의 實相 上》(鐘소리, 1989), 249쪽.
  8. 金映豪, 〈韓國戰爭 硏究의 向後 課題와 展望〉
  9. 韓國戰爭硏究會 篇, 《脫冷戰時代 韓國戰爭의 再照明》(백산서당, 2000), 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