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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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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陵
유네스코 世界遺産
東九陵 顯陵 , 健元陵 (왼쪽), 穆陵 (오른쪽)
英語 名*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프랑스語 名* Tombes royales de la dynastie Joseon
登錄 區分 文化遺産
基準 III, IV, VI
指定番號 1319
地域 ** 아시아·太平洋
指定 歷史
2009年   (33次 政府間委員會 )
웹사이트 文化財廳 世界文化遺産 페이지
* 世界遺産目錄에 따른 正式名稱.
** 유네스코에 依해 區分된 地域.

朝鮮王陵 (朝鮮王陵)은 朝鮮 의 歷代 王과 王妃, 追尊王 들의 무덤을 總稱하는 말로, 一般的으로 1897年 에 樹立된 大韓帝國 의 歷代 皇帝와 皇后의 무덤도 包含된다. 朝鮮王陵은 三國 時代 高麗 時代 의 王陵 制度의 影響을 받았는데, 高句麗 의 호석(護石)制度는 新羅 高麗 를 거쳐 朝鮮王陵에 그대로 傳해졌고, [1] 朝鮮王陵의 全體的인 形態는 공민왕 의 무덤인 現정릉 의 影響을 直接的으로 받았다. [2] 朝鮮王陵은 韓國 歷代 王朝의 王陵들 中 保存 狀態가 가장 良好하다. 王과 王妃들의 陵이 모두 完全한 保存性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朝鮮 時代의 王子와 公主, 後宮들의 무덤까지 함께 保存되어 있으며, 國朝五禮儀 , 經國大典 , 儀軌 와 같은 朝鮮王陵에 對한 具體的인 規定과 各 王陵들의 造成過程에 들었던 人力, 그리고 道具에 對한 詳細한 記錄까지 保存되어 있어 朝鮮 時代의 葬禮 文化와 朝鮮王陵의 規定 및 歷史, 朝鮮王陵의 祭禮 過程 等을 알 수 있다. [3] 또한, 이러한 記錄을 바탕으로 朝鮮王陵에서는 때마다 祭禮 儀式을 치르고 있어 朝鮮 時代의 無形的인 文化와 傳統을 이어오고 있다. [4]

槪要 [ 編輯 ]

朝鮮 王朝 歷代 27名의 임금과 王妃, 追尊王의 무덤들이 있으며 이 中 反正으로 逐出된 賃金인 燕山君과 光海君은 陵 地位가 아닌 墓(墓) 地位에 있어서 王陵으로 불리지 않고 墓로 分類되었다. 또한 이들 두 임금은 反正으로 쫓겨난 戰績이 있어서 서울 宗廟에도 모셔지지 않았으며 朝鮮 王朝가 滅亡하는 時期까지 卯 地位를 維持하고 있다.

首都를 漢陽으로 定하였기 때문에 大部分의 朝鮮王陵은 特히 서울 一部와 京畿道 地域에 分布되어 있다. 以前까지는 經國大典에 따라 漢陽都城 外에도 가까운 京畿道 地域에 王陵을 造成하게 되었기 때문에 大部分의 王陵들은 京畿道에 分布되어 있다. 이 中 選定陵, 정릉, 헌인릉 等 一部 王陵은 元來 京畿道 地域에 있다가 1945年 解放 以後 京畿道에서 서울特別市 圈域에 編入된 王陵들이었다.

6代 임금인 端宗이 安葬된 長陵은 元來 魯山君墓로 分類되어서 唯一하게 江原道 寧越郡에 安葬되었으나 19代 賃金 肅宗이 端宗을 復位시키고 魯山君墓를 章陵으로 昇格하면서 非首都圈 地域 中 唯一한 朝鮮王陵이 되었다. 2代 임금인 定宗은 元來 開豐郡에 王陵이 있기 때문에 追尊王人 木造, 翼祖, 度祖, 桓祖의 陵과 함께 北韓 地域에 있는 王陵이 되었다.

構造와 分類 [ 編輯 ]

救助 [ 編輯 ]

朝鮮王陵의 構造는 크게 齋室과 進入 空間, 祭享 空間, 前이 空間, 陵寢 空間으로 나눌 수 있다.

齋室과 進入 空間 [ 編輯 ]

광릉 內 齋室
健元陵 內 收復房

齋室 (齋室)은 陵이나 宗廟 祭祀 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建物로 祭祀器具를 保管하고, 祭祀에 參與하는 사람들의 宿食提供과 祭祀에 쓰는 飮食을 장만하는 用途로 쓰여졌다.

進入 空間에는 禁川橋와 紅살門 , 配位가 있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禁川橋(禁川橋)는 俗世와 神聖한 空間(王陵)을 區分하는 役割을 하는 다리다.

禁川橋 앞에 있는 紅살門(紅살門, 紅箭門)은 붉은 물감을 漆한 나무 聞으로, 둥근 기둥 두 個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 없이 화살模樣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는데, 그 中央에는 삼태극 文樣이 있다. 陵·元·卯·宮殿 앞에 세웠는데, 該當 場所의 神聖함을 알리는 役割을 했다. 王陵 入口뿐만 아니라 王陵軍의 入口에도 紅살門을 세워놓는다. 紅살門 바로 옆에는 背違(拜位)가 있는데, 한坪 程度 되는 空間에 돌을 깔아 놓았다. 여기서 王이 절을 하는데, 판위 또는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한다. [5]

祭享 空間 [ 編輯 ]

健元陵의 丁字閣
健元陵의 祭具

祭享 空間에는 丁字閣과 참도, 水剌間, 收復房이 있다. 紅살門과 丁字閣을 잇는 길인 참도(參道)는 魂靈이 다니는 信徒와 賃金이 다니는 魚道로 나뉜다. 皇帝陵의 形式으로 造成된 홍유릉 의 참도는 세 個로 이루어져 있다. 참도는 大槪 丁字閣 앞까지 가다가 東쪽으로 方向을 바꿔서 丁字閣의 側面으로 連結된다. 참도 兩 쪽 옆에는 祭祀를 準備하는 水剌間(水刺間)과 陵參奉(王陵 管理職)李 居處하는 收復房(守僕房)이 있는데 大部分은 亂離로 인해 破壞되어 그 터만이 남아있었다. 現在는 朝鮮王陵 復元整備事業으로 여러 朝鮮王陵의 水剌間 收復房 等이 復元되고 있다.

丁字閣 [ 編輯 ]

丁字閣(丁字閣)은 鄭(丁)字 模樣의 建物로 祭禮 時 丁字閣 內部에 있는 祭具 에 祭物을 陳設하고 祭祀를 지낸다. 朝鮮王陵에서는 必須的인 建築物이다. 朝鮮王陵의 丁字閣은 大槪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지만, 東九陵 內에 있는 崇陵 은 八作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는 當時 丙子胡亂 明나라 의 滅亡 直後인 17世紀 末에 불던 中國火의 流行 에 따른 것으로 推測하고 있다. 또한, 崇陵의 丁字閣에는 左右에 翼廊(翼廊)이 붙어 있는데, 이는 後代의 丁字閣으로 繼承되어 徽陵 義陵 等의 丁字閣에도 翼廊이 追加되었다. [6] 2011年 12月에는 文化財廳 銀 東九陵에 位置한 健元陵 崇陵 , 穆陵 의 丁字閣을 歷史的·藝術的·學術的 價値가 큰 곳으로 밝혀 國家指定文化財인 寶物 로 指定했다.

丁字閣 內部에는 祭祀를 지내는데 쓰이는 祭具(祭具)가 있다. 諸侯國이었던 朝鮮 에서는 祭具들을 붉은色으로 漆해놓았으며, 大韓帝國 때는 皇陵과 皇帝로 追崇된 陵의 祭具들에 皇帝를 象徵하는 노란色으로 漆했다. 皇陵人 홍유릉 과 皇帝로 追崇된 太祖 의 陵인 健元陵 의 祭具가 代表的인 例이다.

前이 空間 [ 編輯 ]

前이 空間에는 王陵의 主人을 說明하는 碑石이 있는 비각(碑閣)이 있고 祝文(祝文)을 태우는 豫感(小全代 또는 望燎位)과 陵이 位置한 山의 山神에게 祭祀를 지내는 山新釋이 있다. 初期 朝鮮王陵 樣式에는 碑石과 함께 王의 私的(事蹟)을 기리는 神道碑(神道碑)가 있었는데, 文宗 때 王陵에 神道碑를 세우는 것을 禁하게 하였다. [7] 그러한 까닭에 朝鮮王陵 中 神道碑가 있는 王陵은 太祖의 健元陵 太宗 獻陵 뿐이다.

陵寢 空間 [ 編輯 ]

健元陵 陵寢
1. 曲牆 2. 潟湖 3. 夕陽 4. 望柱石 5. 封墳 6. 欄干席 7. 魂遊石 8. 文人石 9. 長明燈 10. 石馬 11. 武人石 12. 豫感 13. 비각 14. 丁字閣 15. 참도 16. 水剌間 17. 收復房 18. 背違 19. 紅살門

聖域空間이라고도 하며, 傾斜面이 緩慢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언덕은 高麗王陵에서 由來되었다. 長臺石(長臺石)에 依해 陵寢 空間은 下溪, 中繼, 相計로 나뉘는데, 夏季에는 封墳 을 지키는 武人石과 石馬 한 雙이 있고, 中繼에는 陵 主人의 命을 받드는 文人石과 石馬 한 雙, 長明燈(長明燈)이 있다. 상계에는 封墳(封墳)을 中心으로 魂이 쉬는 空間인 魂遊石(魂遊石)李 封墳 앞에 있고, 封墳의 兩 쪽에는 望柱石 (望柱石)이 하나씩 있다. 望柱石에 對해서는 魂靈이 封墳 을 찾는 表紙說과 陰陽의 調和說, 風水的 機能說 等의 主張들이 있다.

封墳 周圍로는 潟湖와 夕陽이 封墳을 둘러싸 陵寢 空間의 밖을 지켜보는 形象으로 封墳을 保護하고 있다. 夕陽은 惡鬼를 除去하고, 석호는 山川의 猛獸로부터 封墳을 守護하는 役割로써의 意味를 담고 있다. 그리고 門武人石의 옆에 있는 石馬는 犧牲수(犧牲獸)로 靈魂의 運送者로서 性格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古代 中國의 陵墓制度에서 由來하였다. [8]

封墳 밑部分을 둘러 싼 屛風石(屛風石)에는 12個의 防衛를 擔當하는 12支神 賞을 該當 防衛에 陽刻하였는데, 封墳을 侵犯하는 不正과 雜鬼를 쫓아내는 意味를 가지고 있다. 屛風石과 함께 欄干席(欄干石)李 封墳을 둘러싸는데 後期의 朝鮮王陵에는 欄干石만이 封墳을 둘러싸는 樣式으로 變貌하였다. 3面의 담牆으로 陵寢 空間을 둘러싼 曲牆(曲牆/曲墻)은 朝鮮王陵에 처음으로 導入되었다. 陵寢 空間의 東, 西, 北의 三面을 둘러싸 封墳을 保護한다. [9]

陵室 (陵室)은 梓宮 이 들어가는 곳인데, 健元陵 造成 當時 石室과 灰隔 中 무엇을 使用할 지에 對해 論議 끝에 石室로 造成하게 되었고, 그 뒤 朝鮮 初期의 王陵에는 石室로 造成하게 되었는데, 世祖 광릉 을 造成할 때는 광릉의 陵室을 灰隔(棺을 壙中에 내려 놓고, 그 사이를 石灰로 메워서 다지는 方式)으로 造成하면서 朝鮮王陵의 陵室은 크게 石室과 灰隔으로 造成하는 方式으로 나뉘게 되었다.

封墳과 陵寢 空間에 따른 分類 [ 編輯 ]

같은 陵寢 空間에 造成된 境遇 [ 編輯 ]

單陵 (單陵)은 王이나 王妃 둘 中 한 사람의 封墳 萬 있는 일봉逸失(一封一室)의 陵으로 朝鮮王陵 中 王의 單陵은 3個의 陵이 있고, 王妃의 單陵으로는 11個의 陵이 있다.

雙陵 (雙陵)은 王과 王妃의 封墳을 나란하게 配置한 이봉이실(二封二室)의 陵으로 獻陵 , 江陵 等이 있고, 三연릉 (三連陵)은 한 언덕에 王과 王妃, 繼妃의 세 封墳을 나란히 配置한 三峯삼실(三封三室)의 陵으로 朝鮮王陵에서는 憲宗 景陵 이 唯一하다.

合掌陵 (合葬陵)은 하나의 封墳에 모두 合掌한 同封이실(同封異室) 또는 同封삼실(同封三室)의 陵으로 世宗 영릉 , 高宗皇帝 홍릉 等은 同封이실(同封二室)의 合掌릉이고, 純宗皇帝 의 裕陵은 唯一한 同封삼실(同封三室)의 合掌陵이다.

다른 陵寢 空間에 造成된 境遇 [ 編輯 ]

동원이江陵 (同原異岡陵)은 한 陵 內에 있지만, 서로 다른 언덕에 封墳과 石物을 配置한 이봉이실(二封二室)의 陵으로 總 6個의 陵( 顯陵 , 광릉 , 景陵 , 昌陵 , 宣陵 , 穆陵 )이 있다. 單 顯陵의 境遇는 1513年(中宗 8年)에서야 현덕왕후 의 陵을 天藏하면서 造成된 동원이江陵 形式으로 [10] , 最初로 造成된 동원이江陵 形式의 陵은 광릉이다.

動員上下陵 (同原上下陵)은 한 언덕 위와 아래에 王과 王妃의 封墳과 石物을 配置한 이봉이실(二封二室)의 陵으로 孝宗 영릉 警鐘 義陵 李 代表的이다. [11]

葬禮와 王陵 造成 過程 [ 編輯 ]

朝鮮 儒敎 를 國是로 하는 國家로 王이 直接 宗廟 에 祭祀를 지내는 祭政一致 社會였다. 그만큼 王의 權限이 强하였고, 王의 永遠한 安息을 위한 王陵을 造成하는 일은 朝鮮의 重要한 國家事業 中 하나였다.

승하 直後 [ 編輯 ]

王이나 王妃가 죽은 것을 確認하는 初終(初終) 뒤에 內侍가 王이 입던 옷을 가지고, 昇遐한 곳의 지붕 위로 올라가 北쪽을 向해 ‘上位服’ (上位復, 王妃의 境遇는 '重弓福'(中宮復)이라 외침) 이라 세 番 외치는 福(復) 意識을 한다. '上位服'은 '上監은 돌아오소서'의 뜻을 담고 있다. 福을 하고난 直後에 內侍가 王이 입고 있던 옷을 재빨리 지붕 아래로 던지면, 밑에서 待機하고 있던 內侍가 얼른 옷을 받아 建物 안으로 들어간 다음 王의 몸 위에 그 옷을 덮고 5日間 살아나기를 기다렸다. 5日이 지나면 卽時 入棺 準備를 始作하였다. 그 뒤 王世子 (先王의 뒤를 잇는 사람)를 除外하고 大軍과 翁主들은 모두 素服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풀어 헤치며, 3日 程度 禁食을 한다. 그 뒤 戒令(戒令)을 통해 葬禮 와 王陵造成에 關한 일을 分擔하는데, 이는 六曹 에서 擔當한다. 兵曹 에서는 여러 곳을 護衛하고, 禮曹 는 喪禮에 關聯된 일을 議政府에 報告하고, 李朝 에서는 殯殿都監, 國葬都監, 山陵都監이라는 臨時機構(도감)를 設置하여 各自 맡은 일을 하게 하였다. [12]

도감(臨時 機構) 設置 [ 編輯 ]

臨時機構의 設置는 魯國公主 의 國葬 過程에서 影響을 받았다. 魯國公主의 葬禮를 치르기 위해 4가지의 圖鑑과 13個의 色이 設置되었는데, 이러한 臨時機構들은 各各의 이름들이 조금씩 바뀌면서 朝鮮 時代에 그대로 繼承되었다. [13]

健元陵 을 造成할 當時에는 頻傳(殯殿)·局長(國葬)·조묘(造墓)·再(齋)等 4가지의 圖鑑과 賞福(喪服), 玉冊(玉冊), 복완(服玩), 棺槨(棺槨), 提起(祭器), 柳車(柳車), 法위의(法威儀), 上유소조(喪?小造), 酸素(山所), 靈飯(靈飯), 議長(儀仗), 墓所布陣(墓所鋪陳), 返魂(返魂) 等 局長에 必要한 第구나 飮食, 儀式節次와 王陵을 造成하는데 必要한 일들을 擔當하는 13個의 色(色)이 設置되었다. 그러다 世宗 때 와서는 원경왕후 의 葬禮를 지낼 때 局長·頻傳·山陵을 除外한 나머지 圖鑑은 革罷하게 하였고, 이 後 國朝五禮儀 를 통해 3圖鑑의 制度는 굳어지게 되었다. [14]

殯殿都監 [ 編輯 ]

殯殿都監(殯殿都監)은 昇遐한 임금이나 王妃의 屍身에 關한 業務를 擔當하는데, 屍身을 여러 옷가지로 감싸는 過程인 小殮과 大殮 節次에 使用되는 壽衣나 홑이불 等 各種 物品準備와 殯殿을 차리는 節次를 擔當하였다. 王과 王妃 以外에도 王子(王世子와 大君 以下)와 왕세자빈, 내외명부, 宗親과 百官에 對한 喪服의 準備도 殯殿都監에서 擔當한다. 殯殿都監에서는 製造(提調) 3名, 盜聽(都廳) 1名, 郎廳(?廳) 6名 等을 두는데, 製造 3名 中 1名은 禮曹 判書가 맡고, 郎廳 6名 中에 1名은 禮曹 郎廳으로 임명하여 充當하였다.

國葬都監 [ 編輯 ]

國葬都監(國葬都監)은 昇遐한 當日에 組織하고, 葬禮 뒤 虞祭가 끝날 때까지 約 5달동안 存續하며 國葬 進行에 必要한 物品과 文書들을 總括 製作하였다. 國葬都監 아래로는 一方, 이房, 三防이 있었는데, 一方은 屍身과 副葬品 等 다양한 物品을 運搬하는 다양한 物品을 運搬하는 가마와 그에 따른 附屬品, 第拘留를 主로 製作하였다. 吏房은 吉凶議長, 屍身의 衣服과 裝身具, 名妓 等을 製作하였다. 三防은 施策, 時報, 애冊 等과 萬張, 提起를 製作하였다. 總護使 1名, 製造 3名, 盜聽 2名, 郎廳 6名, 減潮館 6名 內外 等을 임명하여 業務를 遂行하게 하였다. 製造 3名은 好調 判書, 禮曹 判書, 繕工監製造로 構成하였으며, 郎廳은 禮曹郎廳, 共助 郎廳, 繕工監, 濟用監의 官員으로 임명하여 充當하였다.

山陵都監 [ 編輯 ]

山陵都監(山陵都監)은 王陵을 造成하는 일을 맡은 機關으로 昇遐한 날로부터 大略 5個月 後에 있을 葬禮 意識 前까지 王陵 造成을 마무리해야 했다. 山陵 圖鑑이 設置되면 宅地를 통해 地官이나 大臣이 陵을 組成할 地域을 定한다. 風水地理를 重要視했던 朝鮮社會에서는 매우 重要한 事案이었고, 이는 政治的인 事案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山陵都監의 堂上官, 觀象監의 領事, 製造, 禮曹의 堂上官 等은 愼重하게 凌遲를 決定하고, 會議를 거쳐 工事日程과 必要 人力을 定한 뒤 王陵의 造成을 始作하였다. 陵을 造成할 때는 石物 製作에서부터 凌遲를 다지는 일, 丁字閣이나 비각 等의 建物을 만드는 일 等이 있었다. 朝鮮 初期에는 百姓들에게 賦役의 形態로 給料가 없는 義務였으나, 17世紀 以後 人力을 雇用하는 形態로 바뀌게 된다. [15]

齋宮과 欑宮 [ 編輯 ]

王이 卽位하는 해에 梓宮(梓宮:屍身을 넣을 管)을 만들고, 1年에 한 番씩 옻漆을 한다. 그 뒤 王이 죽으면 붉은 緋緞을 四方에 붙이고, 네 모퉁이에 綠色 緋緞을 붙인다. 梓宮 바닥에는 쌀을 태운 재를 깔고, 그 위에 七星板(北斗七星의 模樣으로 구멍을 뚫은 나무板)을 놓는다. 그 위에 붉은 緋緞 요를 깔고 屍身을 모신다. 그 뒤 梓宮을 欑宮(?宮)에 모시게 되는데, 안에는 四方神 이 各 方位에 따라 位置하고 있다. 머리가 南쪽으로 가도록 모신 後 도끼 模樣이 그려진 붉은 緋緞으로 덮는다. 梓宮을 欑宮에 모신 뒤 屛風을 設置하고 祭祀를 올린다. [16]

宅地 [ 編輯 ]

宅地(擇地)란, 昇遐한 王이 묻힐 곳을 定하는 過程으로 大部分은 地官이나 大臣들이 定하지만, 王이 直接 定하는 境遇도 있다. 朝鮮王陵은 朝鮮 時代 法典인 經國大典 의 “陵域은 한양성 四大門 밖 100里 안에 두어야 한다.”라는 立地 條件에 따라 選定되었다. 實際로 經國大典이 編纂되기 以前의 太祖의 祖上들의 陵, 신의왕후 의 陵인 帝陵 , 定宗 의 陵인 厚陵 驪州 世宗 孝宗 의 陵인 영·녕陵 , 寧越 에서 客死한 斷種 章陵 을 除外하면 서울 四大門에서 100里 以內에 位置하고 있다. 王陵은 風水地理的인 要素를 考慮해 位置를 選定하였으며, 바람, 물, 불, 나무, 흙에 依해 發生할 수 있는 災害의 發生이 없어야 하고, 背山臨水 地形을 갖추어야 했다. [17]

造成 [ 編輯 ]

王陵의 조성은 山陵都監에서 擔當하였으며, 많은 時間과 人員을 必要로 하였는데, 太祖의 健元陵 을 造成할 때는 大略 3~5個月의 時間이 所要되었고, 大略 6000名~9000名의 人員이 動員되었다. [18]

때로는 王이 生前에 自身이 直接 묻힐 곳을 찾아 미리 무덤을 만드는 境遇도 있는데, 이를 首陵(壽陵)이라고 한다. 巨大한 무덤을 造成하는 中國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나, 韓國에서는 王陵을 미리 造成하는 境遇는 공민왕 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以後에 朝鮮王陵에서는 種種 首陵을 造成하였는데 이러한 代表的인 王陵은 世宗 의 舊英陵과 英祖 가 묻히려 했던 정성왕후 홍릉 等이 있다.

王陵 造成 作業은 石物을 만들어서 封墳 周邊에 配置하고, 丁字閣과 碑閣 等을 造成하는 面에서는 大部分 다 비슷하지만, 陵室을 造成하는데 있어서는 國朝五禮儀에 記錄된 石室을 利用한 方式과 國朝喪禮補編에 記錄되어 있는 灰隔을 利用한 方式에 있어 差異를 보이고 있다.

石室 을 利用한 方式 [ 編輯 ]

合掌陵 形式의 石室

國朝五禮儀 에는 두 名을 安葬하는 合掌陵 形式의 石室 構造가 記錄되어 있는데, 石室 內部에는 辭神도 가 그려져 있다. 石室님을 組立하고, 안에 梓宮 을 넣은 다음, 石室을 三物(石灰와 세사 黃土를 席은 것)과 으로 감싸서 땅에 묻고, 屛風石과 欄干石을 設置한다. 15世紀 前半까지 大部分의 王陵 內部에는 石室로 造成되었다. [19]

灰隔 을 利用한 方式 [ 編輯 ]

“죽으면 速히 썩어야 하니 石室을 쓰지말라.”라는 世祖의 遺言으로 광릉 은 朝鮮王陵 中 最初로 灰隔을 利用한 方式으로 造成되었는데, 以後 英祖 때 喪葬禮 過程을 整理한 國朝喪禮補編에는 灰隔을 利用한 方式이 記錄되었다. 灰隔을 利用한 方式은 石室을 만드는 代身 梓宮 위에 덮을 外梓宮을 따로 만들고 그 위에 三物을 채우고, 南쪽으로 退壙을 만들어 그 밑으로 梓宮을 넣는 方式이다. [19]

記錄 [ 編輯 ]

肅宗明陵殯殿都監의궤

王陵 造成이 끝난 뒤 各 圖鑑마다 自身들이 했던 일들을 儀軌 에 記錄하였다. 各 圖鑑마다 記錄한 儀軌에서는 局長 過程과 期間, 宅地에 對한 主管者와 意圖, 山陵 造成에 必要한 經費와 資材, 王陵 造成 過程 等을 글과 그림으로 仔細히 記錄하여 놓았다.

이러한 記錄 德分에 朝鮮 王室의 葬禮 節次가 어떻게 進行되었는지에 對해 參考할 수 있고, 王陵이 不得已하게 毁損되어도 그대로 復舊할 수 있다.

또한, 各 朝鮮王陵에서는 陵에 對한 管理나 主要 事項을 記錄한 ‘凌遲’를 記錄하였다. 以外에 王陵造成에 對한 規定과 過程이 記錄된 國朝五禮儀 , 經國大典 , 續五禮儀, 國朝喪禮補編 等이 있어 朝鮮王陵의 菱堤와 石物이 歷史的으로 어떠한 變化가 있었는 지에 對해서도 알 수 있다. [20]

菱堤와 石物의 變化에 따른 歷史 [ 編輯 ]

健元陵의 神道碑

麗末鮮初 [ 編輯 ]

初期의 朝鮮王陵은 高句麗와 新羅 王陵의 樣式을 繼承한 高麗 王陵에서 由來하였다. 그 中에서도 공민왕 魯國公主 의 王陵인 現정릉 의 樣式을 繼承하였는데, 現정릉은 以前時期의 考慮 王陵에 비해 王陵의 樣式 以外에도 當時에 널리 퍼져있던 石彫 技術을 綜合的으로 集大成하여 뛰어난 藝術性을 가지게 되었다. 朝鮮王陵은 이러한 現정릉의 制度에서 佛敎的인 特性이나 지나치게 華麗한 面을 除外하는 等 簡素化된 樣式으로 繼承하였던 것이다. [21]

葬禮 臨時機構와 한 언덕에 王陵을 같이 조성한 動員雙陵의 形式도 現정릉 에서 始作되어 朝鮮王陵에 그대로 繼承되었다. 現정릉 以前의 高麗王陵은 王陵과 王妃陵을 따로 造成하였으나, 現정릉은 各 陵의 이름은 달리하였어도 高麗王陵 中 처음으로 같은 陵寢 空間에 造成하였다. 이러한 樣式은 太祖 先代 王陵들에까지 適用되었다가 그 以後에는 한 王陵 內에 한 陵號를 쓰게 되었다. 한 陵寢 空間에 王과 王妃陵을 같이 造成하게 되면서 雙陵이나 三연릉, 合長陵의 形態가 나타나게 되었다. [22]

現정릉의 樣式을 直接的으로 繼承한 朝鮮王陵은 정릉 健元陵 이다. 그 中 정릉은 現정릉의 歷史에 크게 關與했던 김사행이 主管하여 造成되었기 때문에 現정릉의 死角長明燈과 같이 現정릉의 特性이 잘 나타나 있는 王陵이었다. 朝鮮 初期의 樣式에는 封墳 周圍를 둘러싸는 曲牆이 朝鮮 王陵의 養殖에 처음으로 登場하였고, 長明燈과 石物의 配置도 朝鮮時代만의 樣式으로 變하였다. 石物들은 中國 南宋 末期의 樣式을 繼承하였다.

하지만, 高麗時代의 佛敎的인 特性을 가진 樣式도 一部 가지고 있었다. 代表的인 高麗時代의 樣式으로는 정릉에 있는 死角 長明燈과 王陵의 祭祀를 돕는 절인 願刹, 小全代 等이 있다. 이 外에 朝鮮 初期의 樣式으로는 神道碑, 魂遊石을 떠받치는 5個의 고석, 梓宮 을 넣었던 石室 等이 있다. [23] 健元陵 造成 當時 書雲觀(書雲觀)에서 陵室을 石室(石室/突放)로 만들자는 上書를 올렸고, [24] 여러 論議 끝에 宗廟에서 點을 쳐서 決定하였고, 石室을 만들게 되었다. [25]

朝鮮 前期 [ 編輯 ]

菱堤가 簡素化 된 광릉

世宗 때 國朝五禮儀 의 內容이 整理되면서 佛敎 樣式이 一部 섞여 있었던 初期 朝鮮王陵의 陵制度 國朝五禮儀를 통해 朝鮮時代만의 樣式으로 變하게 되었다. 屛風石의 文樣에 방물과 防牌무늬가 除外되었고, 고석이 4個로 減少하였으며, 祝文을 불태우던 小全代가 豫感으로 代替되었다. [26] 그리고 國朝五禮儀로 變한 것은 아니었지만, 文宗 때 王陵에 神道碑를 세우는 것을 禁하였다. [27]

광릉 을 造成할 當時, “죽으면 速히 썩어야 하니 石室을 使用하지 말고, 屛風石을 세우지 말라.”라는 世祖 의 遺言에 따라 灰隔으로 陵室을 造成하고, 屛風石에 있던 十二支神像 文樣을 欄干席으로 옮겨 새기게 되었다. 이 때 王陵 造成에 드는 人力과 費用이 크게 節減되어 後代 王陵의 模範이 되었다. [28] 또한, 처음으로 서로 다른 언덕에 造成하는 동원이江陵의 樣式으로 造成하는 等 광릉은 初期 朝鮮王陵의 樣式에 많은 變化를 가져왔다. [29]

成宗 의 父親 義警世子가 德宗 으로 追崇됨에 따라 그의 무덤도 追封되었는데, 石物을 王陵의 樣式으로 갖춰야 할지 論爭이 있었으나, 先王( 木造 , 翼祖 , 賭租 , 桓祖 )의 前例에 따라 旣存의 樣式으로 保存되었다. 이 後 德宗의 景陵 은 追尊王의 王陵의 標本이 되었다. [30]

朝鮮 中期 [ 編輯 ]

穆陵의 望柱石

以後 朝鮮 中後期 때는 世祖의 광릉 때 簡素化 된 樣式 以外에도 國朝五禮儀 의 樣式이나 健元陵·獻陵의 朝鮮 初期 樣式이 使用되는 等 크게 세 가지의 樣式이 混在되었다. [31]

宣祖 의 王陵인 穆陵의 인목왕후 陵에서 처음으로 望柱石과 長明燈의 臺石에 火門(꽃무늬)李 새겨졌는데, 이 後 人組 章陵 을 天藏하면서 옛 陵의 石物들이 새로운 凌遲에 脊髓가 맞지 않아 새로 만들게 되었는데, 이 때 屛風石에 旣存의 韻文과 十二支神像에 花紋을 새기게 되었던 것이다. 以後 花紋을 새기는 樣式은 홍유릉 에 이르기까지 쓰이게 되었다. [32]

그리고 健元陵 近處에 있던 孝宗 영릉 이 驪州로 天障되면서 屛風石을 設置하는 制度를 完全히 廢止해 隆陵 홍유릉 을 除外하고서는 屛風石을 設置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灰隔의 바닥에는 支會(地灰)를 깔기 始作했다. [33]

朝鮮 後期 [ 編輯 ]

裕陵의 金冠朝服 文人石

肅宗 明陵 은 肅宗의 名으로 定宗 의 厚陵의 制度에 따라 副葬品의 數를 줄이고, 石物의 크기가 實物에 가깝게 하는 等 簡素하게 꾸민다. 그리고 大軍*翁主의 원과 王陵에 쓰이던 死角屋蓋型의 長明燈을 制度化하였다. 後日 明陵은 《續五禮儀》〈山稜의〉의 基本 菱堤가 되었고, 《國朝喪禮補編》〈山稜의〉의 基礎가 되어 朝鮮 後期 王陵 制度의 分岐點이 되었다. [34]

正祖 의 아버지인 思悼世子 의 隆陵은 다른 王陵에 비해 華麗한 面이 있다. 이 때 朝鮮 電氣의 樣式과 朝鮮 後期의 樣式이 調和되어 上段에는 基本의 八角 長明燈에 큰 꽃을 올린 模樣의 지붕과 中斷에는 花紋을 새기고, 下段에는 雲足을 세운 새로운 長明燈의 樣式이 登場하였다. 또한, 이때 文人石이 幞頭를 쓴 宋나라 樣式에서 金冠朝服을 입은 文人石으로 變貌하였다. [35] 이때의 樣式은 後代의 王陵에 이어지게 되었고, 特히 金冠朝服을 입은 文人石은 仁陵과 睿陵을 除外하고서는 朝鮮黃菱仁 홍유릉에까지도 繼承되었다.

그리고 景陵 을 造成할 當時 陵寢 空間의 夏季와 中繼를 합치면서 景陵과 首陵 , 睿陵 의 文·武人石은 한 空間에 있게 되었다. [36]

大韓帝國期 [ 編輯 ]

石物이 밖으로 配置된 裕陵

1897年에 成立된 大韓帝國 의 陵 形式은 明나라 太祖의 皇陵人 孝陵을 모델로 하였다.

丁字閣 代身 일(一)字形의 沈澱이 設置되었고, 武人石과 金冠朝服 을 입은 文人石, 石手들은 沈澱 앞에 配置되고, 石水는 麒麟과 코끼리, 獅子, 해태, 駱駝, 말이 1雙씩 追加되었다. 紅살門 에서 沈澱까지 가는 참도는 3個이고, 制球는 皇帝 의 索引 노란色 으로 하였다. 이 때, 一部 朝鮮時代의 王들도 皇帝로 追崇되어 該當 王陵 丁字閣에는 노란色의 祭具가 配置되었다. 陵寢 空間에는 文武人石과 石手들을 除外하고, 孝宗 때 廢止되었던 屛風石을 만들었다. [37] 그리고 皇陵의 入口는 담牆 形式의 門이 아닌 宮闕에 使用되는 三門이 設置되었다.

天障 [ 編輯 ]

朝鮮 王陵의 歷史에서 王陵이 天障(遷葬)된 事例가 적지 않은데, 이는 朝廷 內에서 提起된 다양한 問題들로 인해 天障되었다.

風水地理上의 問題 [ 編輯 ]

風水地理가 모두 正確한 것은 아니었지만, 風水地理를 重要視 했던 朝鮮時代에는 風水地理上의 問題로 王陵을 天障하기도 하였다.

風水地理上의 問題가 처음으로 提起되었던 것은 世宗의 영릉 이었다. 世宗이 처음으로 묻혔던 곳은 獻陵 西쪽에 位置하였다. 問題는 當時에 風水가 최양선이 ‘이곳은 節祀손長子(絶嗣損長子:後孫이 끊기고 長子를 잃는다.)할 땅이다.’라고 하여 많은 論難을 일으켰었다. 議政府 禮曹 에서 최양선을 벌줄 것을 要請하였으나 世宗은 罰을 주지 않는 代身, 나라의 大使에는 쓰지 않도록 하였다. [38] 하지만, 文宗 이 일찍 죽고 斷種 을 마지막으로 後孫이 끊겼으며, 世祖 의 長子인 義警世子 睿宗 의 長子인 인성대군 이 일찍 죽는 等 여러 不幸들이 닥쳐 왔기에 睿宗 때 世宗의 王陵을 오늘날의 자리인 驪州로 이장하였다. [39]

이 外에 哲宗 翼宗 首陵 도 風水地理 上 不吉하다는 議論으로 洋酒 용마산의 길지로 天障했다가, 1855年 8月 26日에 現在 位置인 健元陵 왼쪽의 언덕으로 天障되었다. [40] 같은 時期에 順調 仁陵 은 坡州의 章陵 의 왼쪽 山줄기에 初場되었으나 그 곳 亦是 風水地理上 不吉하다는 論議가 있어 1856年 10月 11日에 獻陵 옆의 언덕으로 天障되었다. [40] [41]

政治的·個人的인 問題 [ 編輯 ]

風水的인 問題 以外에 間或 한 사람의 뜻으로 인해 天障된 事例도 있었는데, 中宗 김안로 가 自身의 政敵이었던 정광필 을 除去하기 위하여 장경왕후 禧陵 에 對해 問題를 提起하였다. 內容인 즉슨, ‘山陵 造成 作業 途中에 巖盤이 나왔는데, 巖盤을 파낸 자리에 國母를 安葬한 것은 知己가 끊어진다.’하였던 것이다. 實際로 巖盤이 나왔으나, 中宗은 當時 吉凶을 점쳐서 괜찮다 하였기에 巖盤이 나온 자리에서 몇 字 아래로 옮겨 썼던 것이다. 김안로 는 天障을 强力히 要求하였고, 그의 뜻대로 天障을 하게 되었다. 그 뒤 김안로 側에서는 關聯者였던 정광필 에 對한 處罰을 上訴하였고, 結局 정광필은 流配 兄에 處해졌다. [42]

그 뒤 中宗의 두 番째 繼妃였던 文定王后 장경왕후 와 나란히 묻혀 있는 中宗을 成宗 宣陵 옆으로 天障하였는데, 이는 自身이 그 옆에 묻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새로 天障된 정릉 에서는 장마 때면 물에 잠기곤 해서 文定王后는 自身의 바람과는 다르게 정릉과 멀리 떨어진 태릉 에 묻히게 되었다. [43]

祭禮 意識 [ 編輯 ]

朝鮮 王室에서 지내는 歷代 王과 王妃들에 對한 祭祀 意識은 크게 王과 王妃의 神主를 모신 宗廟 에서 치르는 宗廟 祭禮 와 直接 陵으로 行次하여, 치르는 山陵 祭禮가 있다. 理를 基新親향례(忌辰親享禮)라고도 하는데, 기신친향례는 歷代 王과 王后에 對한 意識을 뜻하는 것으로 朝鮮時代의 五禮儀 中 吉禮에 該當된다. [44] 國朝五禮儀 에서는 山陵 祭禮로 斜視(1月, 4月, 7月, 10月의 初旬), 臘日(年末), 俗節(風俗에 따라 지키는 節氣), 朔望(陰曆 初하루와 보름)에 치르는 定期 祭禮와 임금이 直接 치르는 親弟로 나누었고, 이를 消詳히 規定해 놓았다.

祭禮 節次를 大略的으로 說明하자면 다음과 같다. 왕이 소여를 타고 와서 紅살門 앞에 拜位에 서서 陵을 한 番 바라본다. 그리고 魚道를 따라 걸어 미리 設置해둔 小車로 들어가서 손을 씻고 洞입庶出의 禮에 따라 丁字閣 洞契에 오른다. 그리고 神을 맞이하기 위해 네 番 절을 한 뒤 濟州 따르는 모습을 살펴본다. 세 番 香을 피우고, 王이 먼저 첫 盞을 올린 다음 祝文을 읽는다. 그 다음 領議政이 두 番째 盞을 올린다. 祝文을 읽음으로써 祖上의 偉業을 다시 한 番 기리고, 香을 피우고 술盞을 바침으로써 祖上에 對한 尊敬을 表現한다. 그 뒤 절을 네 番 하면서 神을 보내고 祝文을 태움으로써 祭禮를 끝낸다. 山陵 祭禮를 통해 王의 存在가 但只 그 自身만의 것이 아니고 먼 祖上의 임금으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을 다시 認識한다고 하였다.

倍陵(拜陵) 意識이라고 하여 朝鮮 時代의 王은 王位에 올랐을 때 健元陵 과 父王과 母后의 山陵에 반드시 參拜해야 했다. [45]

世界文化遺産 登載 [ 編輯 ]

처음에는 東九陵 이 있는 九里市 에서 王陵 觀光地 開發을 위해 2003年에 東九陵 의 登載를 推進하다가 2004年에 文化財廳 이 朝鮮王陵 40期에 對한 一括 登載를 推進하기로 決定하였다. 2008年 1月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申請書를 提出하였고, 그 해 9月에 ICOMOS(國際記念物遺跡協議會)의 現地 調査가 이뤄졌고, 2009年 1月에 ICOMOS는 一部 朝鮮王陵 周邊地帶의 分類와 周邊 施設에 對한 撤去에 對한 問題 解決을 文化財廳과 韓國政府에 要請하였고, 이에 對한 答辯을 確認하고서 그 해 5月에 ‘登載 勸告’가 적힌 評價報告書를 유네스코에 提出하였다. [46] 그리고 2009年 6月 27日 , 유네스코 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第33次 세계유산위원회에서 朝鮮王陵 40基를 世界遺産 으로 登載하였다. [47]

朝鮮王陵은 유네스코 에서 定한 10가지의 價値 基準 中에서 ‘600年을 이어온 王室制禮’와 ‘朝鮮王陵의 造形 藝術的 價値’, ‘風水理論에 對한 朝鮮時代의 固有한 解釋’ 等 3가지를 充足했다는 點에서 世界遺産 으로 認定받았다. [48] 單,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領域에 있는 帝陵 ( 太祖 의 整備 신의왕후 의 陵)과 厚陵 ( 定宗 과 그의 王妃 정안왕후 의 陵), 太祖의 高祖父母, 曾祖父母, 祖父母, 兩親의 陵, 그리고 大韓民國 의 領域에 있지만 廢位된 연산군 광해군 의 墓는 여기서 除外되었다. [49] 以後, 文化財廳에서는 朝鮮王陵이 世界遺産이 된 것을 記念하여, 2010年 6月 27日부터 7月 12日까지 無料開放을 하였다. [50]

關聯 祝祭 [ 編輯 ]

御駕行列의 御駕
東九陵 齋室 앞마당
광릉 植木日 行事

구리동구릉건원문화제 [ 編輯 ]

朝鮮王陵 中에서 가장 큰 王陵軍을 이루고 있는 東九陵 이 있는 九里市 에서 主管하는 祝祭로 太祖와 文宗, 英祖의 王陵이 있는 東九陵의 歷史的 價値를 되새기고 널리 알리고자 만들어진 祝祭이다. 2003年까지 全州李氏대동종약원 의 主管으로 ‘健元陵親享忌晨祭’가 열리다가 2004年부터 구리시가 主管하면서 ‘구리동구릉건원문화제’로 바꾸고, 文化祝祭를 追加하였다. 每年 5月 中에 祝祭가 열리는데, 行事 主要 內容으로는 御駕行列과 民俗公演, 市民 白日場 等이 있다.

御駕行列 은 새로운 王이 登極했을 때 健元陵 에 參拜하러 가는 朝鮮 時代의 御駕行列을 再現한 行事로 九里市 內에 居住하는 市民과 學生들이 參與한다. 이 中 王과 世子는 나이와 風貌 等의 特別 條件을 提示하는데, 이때 뽑힌 王과 世子는 새로운 사람이 選拔되기 前까지 御駕行列 및 關聯 行事에 王과 王世子 參加 機會나 九里市 弘報大使 資格 等 몇 가지의 惠澤이 주어진다.

御駕 行列은 朝鮮 初期의 服裝을 再現하였으며, 行事에는 約 400名, 2마리의 말이 動員된다. 御駕行列에는 크게 臺駕鹵簿(大駕鹵簿)와 法家老父(法駕鹵簿), 소가노部(小駕鹵簿)의 形式이 있는데, 陵幸 御駕行列에는 소가노富의 形式이 適用된다. 御駕行列은 아침에 九里市립體育公園에서 出發하여 東九陵 內에 있는 惠陵 까지 行列한다. 御駕行列 直後에는 健元陵 에서 全州李氏대동종약원 의 主管으로 ‘健元陵親享忌晨祭’를 지내며, 그 뒤 원릉 에서 市民白日場이, 齋室 앞마당에서는 山臺公演과 大笒散調, 宮中軍樂, 太平舞, 現代 國樂 等 各種 民俗 公演이 열린다. 行事 하루 前에는 滿 20歲가 되는 成年을 對象으로 成年禮 再現을 한다. [51]

正祖 孝 文化祭 [ 編輯 ]

2011年 前까지는 ‘水原華城文化祭’를 통한 융乾陵 御駕行列과 祭禮, 孝行關聯 行事 等을 하다가 2011年에 ‘2011 正조효행文化祭’이란 이름으로 分離되었다. 2012年에 와서는 ‘2012 正祖 孝 文化祭’라는 이름으로 祝祭를 하였다. ‘2012 正祖 孝 文化祭’에서는 御駕行列과 祭禮行事 以外에도 移轉 孝行關聯 行事보다 深化된 ‘王世子 敎育體驗’ 等으로 아버지에 對한 正祖의 孝行에 對해 기리고자 하였다. [52] [53] [54]

朝鮮王陵 소나무心氣 體驗行事 [ 編輯 ]

文化財廳이 主催하는 小規模 行使로 每年 봄에 植木日을 맞아 王陵 周邊의 숲에 소나무를 심는 行事로 文化財廳이 管理하는 사릉 養苗場에서 키운 金剛松 (金剛松) 7,000餘 株를 市民들의 自發的인 參與를 통해 모든 朝鮮王陵의 숲에 심음으로써 世界文化遺産과 自然에 對한 價値를 되새기고자 한 行事이다. [55]

毁損과 復元 [ 編輯 ]

毁損 [ 編輯 ]

朝鮮王陵은 500年이 넘는 期間동안 여러가지의 問題로 인해 旣存 王陵 制度와 價値를 毁損당하는 事例들이 있었다. 朝鮮時代에 政治的인 問題로 王陵이 원·墓로 格下되는가 하면, 壬辰倭亂 때, 倭軍 에 依해 破壞된 事例가 있었다. 또한, 日帝强占期 와 急激한 現代化를 겪으면서 周邊의 숲들이 파헤쳐지고, 陵域 안까지 侵犯당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朝鮮王陵의 歷史的·自然的 價値가 毁損되었다는 批判이 있었다. 世界文化遺産 으로 指定된 以後로는 朝鮮王陵에 符合되지 않는 周邊 施設들을 撤去하고, 破壞된 陵域을 基本 菱堤로 復舊하는 等 世界文化遺産 으로써의 價値를 保存하기 위해 朝鮮王陵을 復元해나가고 있다.

李芳遠 (太宗)에 依한 정릉 毁損 事例 [ 編輯 ]

李芳遠 (太宗)은 大君 時節 當時, 繼母 신덕왕후 가 父王 太祖 를 꼬드겨 방원을 제치고, 신덕왕후 의 어린 아들인 方席 을 世子로 내세운 것에 對한 怨恨을 가지고 있었다. 以後 王子의 亂 으로 李芳遠은 王位에 오른 뒤 1405年 정릉 이 都城 안에 있어 陵域이 廣大하다는 論難을 내세워 100報(180m) 밖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許可했다고 한다. 그 뒤 權勢家들이 정릉 周邊의 땅을 차지했는데, 河崙 은 사위들까지 動員했다. [56] 王位에서 물러난 太上王 (太祖)은 周邊에 權勢家들의 집이 들어서가는 정릉 에서 남몰래 울었다고 한다. [57] 太祖 가 昇遐한 뒤에는 太宗은 신덕王后 姜氏 를 王后에서 妾으로 格下시켰다. 이에 따라 정릉度 陵에서 墓로 降等된 뒤 都城 밖 洋酒(現 城北區 )로 弛張되었으며, 石物들은 광통교 工事에 쓰이게 되었다. [58] 그 뒤 顯宗 때 宋時烈의 請으로 신덕王后는 다시 王后로 追崇하였고, 이에 따라 정릉度 다시 追封되어 石物들이 設置되었는데, 이러한 까닭에 정릉 에는 朝鮮 初期의 死角長明燈과 朝鮮 後期의 石物들이 共存하게 되었다. [59]

壬辰倭亂 當時 倭軍 에 依한 毁損 事例 [ 編輯 ]

壬辰倭亂 當時 倭軍 들이 選定陵 의 封墳들을 파헤치고, 丁字閣과 梓宮을 불태웠었다. 陵을 파헤쳤다는 記錄은 1593年 4月 京畿 監査 성영(成泳)의 雉鷄에 있었으나 毁損된 時期가 正確히 언제였는지는 記錄되어 있지 않았다. [60] 朝鮮王朝實錄 에서는 宣陵과 정릉의 세 個의 梓宮이 모두 잿더미로 變해 있었으며, 처음에는 王의 屍身이 옮겨졌던 것으로 推測하고 있었으나, 얼마 뒤 宣陵의 梓宮의 잿더미에서 불에 탄 뼈가 분명한 것을 發見하였고, 近處 松山에서 發見한 屍體도 中宗의 것이 아닐 可能性이 높다는 것으로 確認되면서 王의 屍身이 불타버린 것이 아니냐는 推測을 하였다. [61] 이 때 梓宮이 불탄 것 以外에도 丁字閣이 불타거나 石物이 갈라지고, 封墳의 四秒 等이 크게 毁損되는 等 宣祖 의 直系 祖上인 成宗 中宗 이 묻힌 選定陵 은 倭軍에 依해 梓宮이 불태워지는 受難을 當했다. [62] 이는 壬辰倭亂 以後 宗廟社稷이 破壞된 일과 더불어 日本 에 對한 斥和論의 主要 根據가 되었으며, 丁酉再亂 以後 日本이 和親을 請할 때, 朝廷에서는 選定陵을 파헤친 犯人들을 朝鮮 으로 押送할 것을 要求하였다. [63] 하지만, 日本 側에서는 壬辰倭亂 當時 서울에는 간 적도 없었던 對馬島의 罪人들을 脅迫하여 半强制的으로 데려왔고, 이들을 供招하는 過程에서 이러한 事實이 밝혀졌다. [64] [65] 調整은 空超 過程에서 烙刑을 加하는 等 여러 顧問들을 加했으나, 두 對馬島人들은 日本 側의 脅迫과 懷柔를 통해 押送되었다는 點을 얘기하면서 自身들의 범능罪에 對한 無辜함을 呼訴하였다. [66] 以後 朝廷에서는 이들의 眞僞論難이 벌어졌으나, 두 罪人들을 목베는 것으로 結論을 내렸다. [67] 壬辰倭亂 以後 選定陵 의 陵室에는 불타버린 成宗과 中宗의 屍身 代身 불타버린 梓宮의 재와 副葬品을 넣었다고 한다.

大韓民國 政府에 依한 毁損 事例 [ 編輯 ]

1970年代 朴正熙 政府 때 ‘ 世宗大王 聖域化 事業’이란 이름으로 영릉 의 旣存 菱堤를 毁損했다는 批判이 있다. 本來 2個의 길로 되어 있던 英陵의 참도가 1個 더 追加되었는데, 朝鮮王陵에서 3個로 이루어진 참도는 皇帝陵의 形式으로 造成된 홍유릉 에만 存在했던 樣式이었다. 또한 旣存 참도에 使用하던 薄石 代身 花崗巖을 깔았고, 丁字閣의 洞契에는 임금이 올라가는 語系와 魂이 올라가는 神界 以外에 階段이 하나 더 追加되었다. 그리고 周邊에 있던 소나무 숲을 베어내고 잔디 를 심어 旣存 朝鮮王陵들과는 달리 周邊에 鬱蒼한 숲이 없다는 點 等이 있다. 이러한 點에서 朴正熙 政府 가 朝鮮王陵이 가진 自然調和的인 價値에 對한 認識이 不足했다는 指摘이 있다. [68]

그리고 中央情報部 (現 國家情報院 )가 義陵 內에 자리잡았는데 佛敎를 排斥했던 朝鮮의 王陵인 義陵 內에 石塔 한 雙이 세워져 있고, 그 사이에는 큰 蓮못이 있으며, 境內에는 外來種의 植物들이 있어 醫陵이 가지고 있었던 朝鮮王陵의 基本 菱堤를 毁損하고 中央情報部의 休息 空間으로 바꾼 것이 아니냐는 批判이 있었다. 中央情報部가 들어선 뒤에는 中央情報部가 義陵을 管理해왔기 때문이다. 中央情報部와 그 後身이었던 安企部( 國家安全企劃部 )가 있는 동안에는 一般人의 出入은 統制되었고, 以後 安企部가 瑞草區 로 移轉한 1995年 9月 以後에 市民들에게 開放되었다. [69]

亂開發로 인한 毁損 事例 [ 編輯 ]

急激한 現代化를 通한 亂開發이 이루어지면서 王陵 周邊의 숲들이 私有化되었고, 各種 施設들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를 法的으로 禁止하여도 不法으로 들어서거나 該當 機關, 사람들의 補償 問題로 많은 葛藤을 겪기도 하였다.

西五陵 은 100餘곳의 食堂들이 不法 假建物이나 비닐하우스로 僞裝하는 等 不法的으로 亂立하여, 區廳에서 團束에 나서기도 하였다. [70] 또한, 周邊의 牧場 施設에 關해서도 問題가 提起되었던 적이 있었다. 韓國 最大의 王陵軍人 東九陵 옆에는 골프場이 들어서 景觀에 毁損이 되었었다. 한 때 補償 問題로 많은 葛藤이 있었다. 이 外에도 金浦市 寧越郡 章陵 近處에 軍部隊 施設이 들어서 問題가 되었고, 홍유릉 의 바로 앞에는 王陵의 景觀과는 들어맞지 않는 形式의 大型 結婚式場이 들어서고 河川이 覆蓋되어 錦川橋가 甚하게 毁損되었다. [71] 正祖 의 王陵이 있는 융乾陵 도 京畿 華城 泰安3地區 宅地開發地區事業과 關聯하여 毁損 論難이 있었다. [72]

朝鮮王陵 復元整備事業 [ 編輯 ]

朝鮮王陵이 世界文化遺産 으로 指定된 以後, 文化財廳 에서는 2025年까지 4900億원을 投入하여, 朝鮮王陵의 復元과 再整備를 하겠다고 發表하였다. 이는 유네스코 勸告事項을 위한 短期事業과 基本 菱堤로 再整備하는 長期事業으로 構成되어 있다. 牧場 이 들어서 있는 西三陵 中央情報部 가 있었던 義陵 , 태릉選手村 이 있는 태강릉 等 陵域 範圍까지 들어와있는 施設物들에 對한 撤去와 復元·整備, 그리고 火災와 盜掘에 對備한 防災施設을 配置할 計劃이다. [73] 한 때 골프場과 關聯한 問題로 葛藤이 벌어졌었던 東九陵에는 골프場이 撤去되는 等 各種 난립된 施設物들에 對한 撤去도 進行되고 있다. 이 後 2007年부터 義陵 의 復元事業을 始作하여 現在는 期本能제로 復舊되었고, 世宗 영릉 에서 本來의 참도와 漁具(御溝:陵이나 宮闕을 둘러싼 개川)를 發掘하고, 2017年까지 本來의 菱堤로 復元할 計劃이다. [74] 現在도 여러 朝鮮王陵 周邊의 破壞된 收復房이나 水剌間 等에 對한 復元作業을 進行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內의 朝鮮王陵 [ 編輯 ]

木造 와 효공왕후의 德安陵

유네스코 世界遺産 에 登載된 朝鮮王陵은 總 40期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內에 있는 帝陵 厚陵 은 除外되었다. 帝陵 厚陵 開豐郡 開城直割市 에 位置한 朝鮮王陵으로 朝鮮 初期의 樣式을 띄고 있다. 太祖 의 첫 番째 夫人이었던 신의왕후 는 男便이 王이 되기 前에 開城에서 死亡하였기에 開城 近處에 묻혔던 것이고, 定宗 靖安軍 에게 王位를 넘기고 나서 開城 백龍産 기슭의 人德宮에서 餘生을 보내다가 죽었기에 開城에 묻히게 되었다. 帝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文化財 分類인 保存級(大韓民國의 寶物 級에 該當) 556號로 指定되었고, 帝陵費는 保存級 1624號로 指定되었으며, 厚陵 은 保存級 第551號로 指定되었다. 이들의 무덤은 朝鮮 初期의 樣式으로 帝陵에는 健元陵 과 類似한 6角形의 長明燈이 있다. 國立文化財硏究所에서는 朝鮮王陵을 調査할 當時 北側의 實測資料를 받아 調査하였다.

또한, 帝陵 厚陵 以外에도 太祖 의 先祖들의 王陵들은 大部分 이들이 살았던 咸吉道(오늘날 咸鏡道 )에 있다. 太祖의 4代祖의 무덤들은 朝鮮이 建國되고 난 뒤에 王陵으로 追封되었다. 1392年에 翼祖의 陵號와 함께 4代祖의 陵號를 一括하여 定했는데, 咸鏡道의 朝鮮王陵은 같은 陵寢 空間에 造成되었어도 恭愍王과 魯國公主의 現정릉과 같이 제各各 다른 陵號를 使用하였다. 이 王陵들은 모두 咸鏡道의 咸興과 安邊, 문주 等地에 있던 까닭에 통틀어서 ‘咸吉道 8陵’으로 불렀다. [75] 朝鮮王朝實錄 에는 이들의 무덤이 太祖를 거쳐 世宗 代에까지 弛張되어 王陵의 形式으로 補修되었다고 하였다. 現在 咸吉道 8陵에 對한 現況에 對해서는 알 수 없으며, 寫眞도 1930年代에 朝鮮總督府 가 찍은 寫眞 以外에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北韓地域정보넷에서는 咸吉道 8陵 中 정숙왕후 의 王陵인 淑陵만이 登錄되어 있을 뿐이고, 이마저도 北韓의 文化財로는 指定되지 않은 狀態다.

王陵 目錄 [ 編輯 ]

臺數 시호 王陵 漢字名 埋葬人 鳶島 位置 私的番號 區分
追尊王 木造 德陵
安陵
德陵
安陵
木造
효공왕후
1274年
未詳
咸南 新興
咸南 新興
北韓 所在
北韓 所在
列外
追尊王 翼祖 지릉
淑陵
智陵
淑陵
翼祖
정숙왕후
未詳
未詳
咸南 安邊
咸南 文川
北韓 所在
北韓 所在
列外
追尊王 賭租 義陵
巡陵
義陵
純陵
賭租
경순왕후
1342年
未詳
咸南 咸興
咸南 咸興
北韓 所在
北韓 所在
列外
追尊王 桓祖 정릉
和陵
定陵
和陵
桓祖
의혜왕후
1361年
未詳
咸南 咸興
咸南 咸興
北韓 所在
北韓 所在
列外
第1代 太祖 健元陵
帝陵
정릉
健元陵
齊陵
貞陵
太祖
신의왕후
신덕왕후
1408年
1391年
1396年
京畿 九里
開城 凱風
서울 城北區
193號
北韓 所在
208號
東九陵
列外
-
第2代 定宗 厚陵 厚陵 定宗 , 정안왕후 1419年 開城 凱風 北韓 所在 列外
第3代 太宗 獻陵 獻陵 太宗 , 원경왕후 1422年 서울 瑞草區 194號 헌인릉
第4代 世宗 영릉 英陵 世宗 , 소헌왕후 1450年 京畿 驪州 195號 英녕陵
第5代 文宗 顯陵 顯陵 文宗 , 현덕왕후 1452年 京畿 구리 193號 東九陵
第6代 斷種 章陵
사릉
莊陵
思陵
斷種
정순왕후
1698年 江原 寧越
京畿 南楊州
196號
209號
-
第7代 世祖 광릉 光陵 世祖 , 정희왕후 1468年
1483年
京畿 南楊州 197號 -
追尊王 德宗 景陵 敬陵 德宗 , 소혜왕후 1457年 京畿 高陽 198號 西五陵
第8代 睿宗 昌陵
孔陵
昌陵
恭陵
睿宗 , 안순왕후
장순왕후
1469年
1462年
京畿 高陽
京畿 坡州
198號
205號
西五陵
坡州三稜
第9代 成宗 宣陵
巡陵
宣陵
順陵
成宗 , 정현왕후
공혜왕후
1494年
1474년
서울 江南區
京畿 坡州
199號 選定陵
坡州三稜
第10代 연산군 燕山君墓 燕山君墓 연산군 , 居昌郡否認 1513年 서울 道峰區 362號 列外
第11代 中宗 정릉
溫陵
禧陵
태릉
靖陵
溫陵
禧陵
泰陵
中宗
단경왕후
장경왕후
文定王后
1544年
1557年
1537年
1565年
서울 江南區
京畿 洋酒
京畿 高陽
서울 蘆原區
199號
210號
200號
201號
選定陵
-
西三陵
태강릉
第12代 人種 孝陵 孝陵 人種 , 인성왕후 1545年 京畿 高陽 200號 西三陵
第13代 明宗 江陵 康陵 明宗 , 인순왕후 1567年 서울 蘆原區 201號 태강릉
第14代 宣祖 穆陵 穆陵 宣祖 , 의인왕후 , 인목왕후 1608年 京畿 구리 193號 東九陵
第15代 광해군 光海君墓 光海君墓 광해군 , 문성군否認 1643年 京畿 南楊州 363號 列外
追尊王 元宗 章陵 章陵 元宗 , 인헌왕후 1627年 京畿 金浦 202號 -
第16代 人組 章陵
徽陵
長陵
徽陵
人組 , 人렬王后
장렬왕후
1731年
1688年
京畿 坡州
京畿 구리
203號 -
東九陵
第17代 孝宗 영릉 寧陵 孝宗 , 인선왕후 1673年 京畿 驪州 195號 英녕陵
第18代 顯宗 崇陵 崇陵 顯宗 , 명성왕후 1674年 京畿 구리 193號 東九陵
第19代 肅宗 明陵
翼陵
明陵
翼陵
肅宗 , 인현왕후 , 인원왕후
인경왕후
1701年
1680年
京畿 高陽 198號 西五陵
西五陵
第20代 警鐘 義陵
惠陵
懿陵
惠陵
警鐘 , 선의왕후
단의왕후
1724年
1718年
서울 城北區
京畿 구리
204號
193號
-
東九陵
第21代 英祖 원릉
홍릉
元陵
弘陵
英祖 , 정순왕후
정성왕후
1776年
1757年
京畿 구리
京畿 高陽
193號
198號
東九陵
西五陵
追尊皇帝 晉종 영릉 永陵 晉종 , 효순왕후 1728年 京畿 坡州 205號 坡州三稜
追尊皇帝 莊祖 隆陵 隆陵 莊祖 , 헌경왕후 1762年 京畿 火星 206號 융乾陵
第22代 正祖 健陵 健陵 正祖 , 효의왕후 1800年 京畿 華城 206號 융乾陵
第23代 順調 仁陵 仁陵 順調 , 순원왕후 1834年 서울 瑞草區 194號 헌인릉
追尊皇帝 文鳥 首陵 綏陵 文鳥 , 신정왕후 1830年 京畿 구리 193號 東九陵
第24代 憲宗 景陵 景陵 憲宗 , 효현왕후 , 효정王后 1849年 京畿 구리 193號 東九陵
第25代 哲宗 睿陵 睿陵 哲宗 , 철인왕후 1863年 京畿 高陽 200號 西三陵
第26代
(大韓帝國 第1代)
高宗 홍릉 洪陵 高宗 , 명성황후 1919年 京畿 南楊州 207號 홍유릉
大韓帝國 第2代 純宗 裕陵 裕陵 純宗 , 순명효황후 , 순정효황후 1926年 京畿 南楊州 207號 홍유릉

元素 目錄 [ 編輯 ]

원(園) 또는 元素(園所)란 王世子 , 왕세자빈 또는 임금을 낳은 先王의 後宮들의 墓所에 붙이는 이름이다. 元素는 모두 世界遺産 登載에서 除外되어 있다.

元素 漢字名 埋葬人 死亡年度 鳳苑年度 位置
純昌原 順昌園 순회세자 , 公會빈 尹氏 1563年 1870年 京畿 高陽
순강원 順康園 인빈 金氏 1613年 1755年 京畿 南楊州
소경원 昭慶園 소현세자 1645年 1870年 京畿 高陽
영회원 永懷園 민회빈 姜氏 1646年 1870年 京畿 光明
소령원 昭寧園 숙빈 崔氏 1718年 1753年 京畿 坡州
수길원 綏吉園 正賓 李氏 1721年 1778年 京畿 坡州
수경원 綏慶園 迎賓 李氏 1764年 1899年 京畿 高陽
의령원 懿寧園 義疏世孫 1752年 1870年 京畿 高陽
孝昌園 孝昌園 의빈 姓氏 , 문효世子 1786年 1870年 京畿 高陽
휘경원 徽慶園 수빈 朴氏 1822年 1822年 京畿 南楊州
흥원 興園 獻議大院王 , 순목隊員非 1898年 1908年 京畿 南楊州
永徽園 永徽園 순헌황귀비 1911年 - 서울 東大門區
永遠 英園 醫민태자 , 義民太子妃 1970年 - 京畿 南楊州
숭인원 崇仁園 李瑱 1922年 - 서울 東大門區
回人員 懷仁園 회은太孫 2005年 - 京畿 南楊州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네이버 知識百科 - 호석
  2. “朝鮮王陵 展示館 - 王陵 變遷史” . 2014年 10月 2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11月 3日에 確認함 .  
  3. “朝鮮王陵이란?” . 文化財廳 . 2009年 5月 13日에 確認함 .  
  4. “世界遺産으로써의 朝鮮王陵” . 2014年 10月 2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11月 3日에 確認함 .  
  5. 이병유 (2010). 《王에게 가다》. 지오마케팅/文化財廳. 21쪽. ISBN   978-89-92158-08-4 .  
  6. 이호일 (2003). 《朝鮮의 王陵》. 圖書出版 嘉藍企劃. 298쪽. ISBN   978-89-8435-158-5 .  
  7. 神道碑에 對한 네이버 知識百科의 說明
  8. 《朝鮮王陵 綜合學術調査報告書(Ⅰ)》, 國立文化財硏究所, 2009, 24쪽.
  9. 이병유, 위의 冊, 21쪽.
  10. 《韓國民族文化大百科》〈顯陵〉項目
  11. 이병유, 위의 冊, 19쪽.
  12. “朝鮮王陵展示館-國葬節次” . 2015年 11月 1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10月 22日에 確認함 .  
  13. 國立文化財硏究所, 위의 冊, 15쪽.
  14. 頻傳·局長·조묘·再 4圖鑑에 對한 實錄의 記錄 / 革罷는 世宗實錄 參照
  15. 朝鮮王陵展示館 - 3도감 이야기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6. 東九陵 歷史文化館 映像, 《王을 모시는 齋宮과 欑宮》.
  17. “王陵과 風水” . 文化財廳 . 2009年 5月 13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8. 이호일, 위의 冊, 5쪽.
  19. 東九陵 歷史文化館 映像, 《朝鮮王陵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20. “사이버 文化財 探訪 - 朝鮮王陵” . 2015年 9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10月 23日에 確認함 .  
  21. 國立文化財硏究所, 위의 冊, 24쪽.
  22. 國立文化財硏究所, 위의 冊, 19쪽.
  23. 이호일, 위의 冊, 25 ~ 26쪽.
  24. 太宗 16卷 8年 7月 9日 (乙卯) 2番째記事 / 書雲觀에서 太上王의 陵室을 石室로 만들 것을 請하는 像序文
  25. 太宗 16卷 8年 7月 26日 (妊娠) 1番째記事 / 山稜의 期日이 가까와지자 石室을 지으라고 命하다.
  26. 이호일, 위의 冊, 79쪽
  27. 네이버 知識百科 - 神道碑
  28. 睿宗 1卷 卽位年 9月 22日 (無人) 2番째記事 / 原狀들이 陵寢에 石室을 쓸 것을 建議하였으나 允許하지 않다
  29. 이호일, 위의 冊, 111쪽.
  30. 이호일, 위의 冊, 119쪽.
  31. 이호일, 위의 冊, 154·163·182·213쪽.
  32. 이호일, 위의 冊, 243·274·313·338쪽.
  33. 이호일, 위의 冊, 290쪽.
  34. 이호일, 위의 冊, 307 ~ 308쪽.
  35. 이호일, 위의 冊, 358쪽.
  36. 이호일, 위의 冊, 385·393·401쪽.
  37. 이호일, 위의 冊, 410 ~ 412쪽.
  38. 世宗 99卷 25年 2月 2日 (戊子) 1番째記事 / 議政府와 禮曹에서 최양선을 벌할 것을 請하였으나 拒絶하다.
  39. 박시백 (2005). 《박시백의 朝鮮王朝實錄-世宗實錄》. 휴머니스트. 189 ~ 190쪽. ISBN   978-89-5862-038-9 .  
  40. 이호일, 위의 冊, 383 ~ 384쪽.
  41. 哲宗 7卷 6年 1月 18日 (壬午) 1番째記事 / 仁陵·首陵 等의 薦奉을 議論하여 決定하다.
  42. 박시백 (2006). 《박시백의 朝鮮王朝實錄-中宗實錄》. 휴머니스트. 163 ~ 166쪽. ISBN   978-89-5862-105-8 .  
  43. 박시백 (2006). 《박시백의 朝鮮王朝實錄-人種·明宗實錄》. 휴머니스트. 118쪽. ISBN   978-89-5862-143-0 .  
  44. 國立文化財硏究所, 위의 冊, 10쪽.
  45. 朝鮮王陵 展示館-山陵祭禮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6. 朝鮮王陵 世界遺産 登載 過程과 評價 - 聯合뉴스
  47. 朝鮮의 王陵 40期 世界의 流産됐다. - 京鄕新聞
  48. “朝鮮王陵 展示館 - 世界遺産 朝鮮王陵” . 2014年 10月 2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11月 3日에 確認함 .  
  49. 朝鮮王陵 世界文化遺産 登載 確定 《東亞日報》 2009年 6月 27日.
  50. 朝鮮王陵 世界文化遺産 登載 記念 '無料開放' - bntnews (韓經닷컴)
  51. 네이버 知識百科 - 구리동구릉건원문화제
  52. 水原華城文化祭 盛況裏에 마쳐 - 아시아 투데이
  53. 5月 둘째週 週間포토:正祖大王 211周忌 御駕行列이 火星 융乾陵 - 水原一步
  54. 世代共感 '2012 正祖 孝 文化祭'... 貞操를 기리다. - 日曜서울
  55. “世界遺産에 소나무 심으러 오세요 市民과 함께하는 朝鮮王陵 소나무 心氣 體驗行事 - 업코리아”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10月 28日에 確認함 .  
  56. 太宗 6年(1406年 明 零落 4年) 4月 7日 1番째記事 정릉의 領域을 定하다
  57. 太宗 11卷, 6年(1406年 明 零落 4年) 5月 2日 2番째記事 太上王이 興天寺의 계성展에 奠을 드리다
  58. 박시백 (2005). 《박시백의 朝鮮王朝實錄-世宗實錄》. 휴머니스트. 25 ~ 26쪽. ISBN   978-89-5862-038-9 .  
  59. 玄宗大王行狀
  60. 先祖修正實錄 26卷 25年 12月 1日 (定해) 1番째記事 / 倭敵이 宣陵과 정릉 두 陵을 파헤치다
  61. 宣祖 39卷 26年 6月 28日 (신해) 24番째記事 / 工曹 判書 勸懲이 두 陵을 奉審하고 意見을 아뢰다.
  62. 鑛害 58卷 4年 10月 1日 (辛酉) 4番째記事 / 李恒福이 宣陵과 貞陵을 살피고 그 修理하는 일에 對해 아뢰다.
  63. 宣祖 201卷 39年 7月 5日 (妊娠) 2番째記事 / 전계신 派遣·書契 要求·綾 盜掘犯 要求 等에 關한 備邊司의 上疏文
  64. 宣祖 205卷 39年 11月 17日 (壬午) 5番째記事 / 汎能者 倭人 마고沙丘의 空超
  65. 宣祖 205卷 39年 11月 17日 (壬午) 6番째記事 / 汎能者 倭人 마다畫紙의 空超
  66. 두 對馬島人들의 共初에 對한 實錄의 內容
  67. 宣祖 206卷 39年 12月 20日 (甲寅) 4番째記事 두 倭人을 길거리에서 悽慘하게 하다.
  68. 李炡根 (2010). 《神들의 庭園 朝鮮王陵》. 冊保稅. 46 ~ 48쪽. ISBN   978-89-369-0965-9 .  
  69. 이호일, 위의 冊, 314 ~ 315쪽.
  70. 西五陵, 不法行爲에 呻吟 - 世界日報
  71. 골프場에 막히고 牧場에 잘린 '朝鮮王陵'. 世界文化遺産 登載 不拘 18期 墓域 毁損 深刻. - 文化日報
  72. '융乾陵 毁損 論難' 華城 泰安3地區.. 監査請求 - 聯合뉴스
  73. 2025年까지 4900億원 投入 朝鮮王陵 復元·再整備한다. - 文化日報
  74. “영릉(世宗大王陵) 天障(遷葬)當時 참도, 漁具 發見 - 文化저널 21”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8月 11日에 確認함 .  
  75. 國立文化財硏究所, 위의 冊, 422쪽.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