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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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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次 平壤城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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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
의 一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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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의 《
회본태합기
》에 收錄된 2次 平壤城 戰鬪 中 日本軍의 集中 射擊을 받아 後退하는 明나라 軍隊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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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戰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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指揮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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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都元帥
김명원
순안군수
荒原
明나라
友軍 부총병
조승훈
(
WIA
)
先鋒將
事由
†
千摠
†
장국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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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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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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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軍 3000名
明나라 援軍 3000名
總兵力 6000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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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0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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被害 規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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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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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名 戰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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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年 壬辰年
- 1593年 鷄舍年
- 1594年 甲午年
- 1595年 乙未年
- 1596年 丙申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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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次 平壤城 戰鬪
(第二次平壤城戰鬪)는
壬辰倭亂
中 發生한 戰鬪이다.
平壤城
이 陷落된 後
義州
에 避亂하던
宣祖
는 여러 次例
明나라
에 使臣을 派遣해 援軍을 要請하였고 明나라 皇帝
萬曆帝
는
搖動
부총병이자 當時
中國
에서 이름난 將帥였던
조승훈
을 友軍 부총병으로 任命하고 3000名의 軍士를 주어
朝鮮
의
明나라
1次 援軍으로 派遣되게 한다.
조승훈
의 3000名 名君은
1592年
7月 初旬
鴨綠江
을 건너
朝鮮
의 都元帥
김명원
麾下의 3000名 軍士와 合流해
平壤
北方
순안군
에 集結하였다.
朝鮮
朝廷에서는 名君을 支援하였고
조승훈
은
平壤
에 到着하였다.
當時
平壤城
에는 1萬 8700名의
고니시 유키나가
와 1萬 1000名의
구로다 나가마사
가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
의 兵力은
黃海道
로 옮겨갔는데 이를 본 斥候將
巡按
郡守
荒原
이 敵의 主力 部隊가 빠져 나가는 것으로 잘못 報告하여
8月 23日
(
陰曆 7月 17日
) 아침
照明 聯合軍
은
平壤城
으로 進擊했다.
平壤城
의 門이 열려 있고 敵들이 보이지 않자 名君의 先鋒將
事由
는 功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兵力을 모두
平壤城
안으로 進擊시켰고 이것이 致命的인 敗北의 原因이 되어 길 兩便에 埋伏하고 있던 日本軍의 鳥銃 射擊으로 크게 敗해
事由
가 日本軍의 集中 射擊을 받아 戰死하고 部長
千摠
과
장국충
等도 戰死하였다.
結局 負傷까지 입은
조승훈
은 數十 基의 남은 兵力만 이끌고
8月 24日
(
陰曆 7月 18日
)
搖動
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照明 聯合軍
最初의 戰鬪이자 最初의 敗北로 끝났다. 後날
조승훈
은
1年 뒤에 다시 雪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