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2次 平壤城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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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次 平壤城 戰鬪
壬辰倭亂 의 一部

日本의 《 회본태합기 》에 收錄된 2次 平壤城 戰鬪 中 日本軍의 集中 射擊을 받아 後退하는 明나라 軍隊의 모습
날짜 1592年 8月 23日 ( 陰曆 7月 17日 )
場所
結果 日本軍 의 勝利, 照明聯合軍 의 1次 敗北
交戰國

指揮官
朝鮮
都元帥 김명원
순안군수 荒原
明나라
友軍 부총병 조승훈   ( WIA )
先鋒將 事由  
千摠  
장국충  
日本
고니시 유키나가
兵力
朝鮮軍 3000名
明나라 援軍 3000名
總兵力 6000名
17,300名
被害 規模
全滅 700名 戰死

第2次 平壤城 戰鬪 (第二次平壤城戰鬪)는 壬辰倭亂 中 發生한 戰鬪이다. 平壤城 이 陷落된 後 義州 에 避亂하던 宣祖 는 여러 次例 明나라 에 使臣을 派遣해 援軍을 要請하였고 明나라 皇帝 萬曆帝 搖動 부총병이자 當時 中國 에서 이름난 將帥였던 조승훈 을 友軍 부총병으로 任命하고 3000名의 軍士를 주어 朝鮮 明나라 1次 援軍으로 派遣되게 한다.

조승훈 의 3000名 名君은 1592年 7月 初旬 鴨綠江 을 건너 朝鮮 의 都元帥 김명원 麾下의 3000名 軍士와 合流해 平壤 北方 순안군 에 集結하였다. 朝鮮 朝廷에서는 名君을 支援하였고 조승훈 平壤 에 到着하였다.

當時 平壤城 에는 1萬 8700名의 고니시 유키나가 와 1萬 1000名의 구로다 나가마사 가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 의 兵力은 黃海道 로 옮겨갔는데 이를 본 斥候將 巡按 郡守 荒原 이 敵의 主力 部隊가 빠져 나가는 것으로 잘못 報告하여 8月 23日 ( 陰曆 7月 17日 ) 아침 照明 聯合軍 平壤城 으로 進擊했다.

平壤城 의 門이 열려 있고 敵들이 보이지 않자 名君의 先鋒將 事由 는 功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兵力을 모두 平壤城 안으로 進擊시켰고 이것이 致命的인 敗北의 原因이 되어 길 兩便에 埋伏하고 있던 日本軍의 鳥銃 射擊으로 크게 敗해 事由 가 日本軍의 集中 射擊을 받아 戰死하고 部長 千摠 장국충 等도 戰死하였다.

結局 負傷까지 입은 조승훈 은 數十 基의 남은 兵力만 이끌고 8月 24日 ( 陰曆 7月 18日 ) 搖動 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照明 聯合軍 最初의 戰鬪이자 最初의 敗北로 끝났다. 後날 조승훈 1年 뒤에 다시 雪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