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次 王子의 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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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次 王子의 亂
날짜 1398年 8月 26日
場所
結果 李芳遠 側의 決定的 勝利
交戰國
이방석 支持派 李芳遠 支持派
指揮官
이방석
정도전
남은
심효생
이제
정안대군
閔氏 夫人
益安大君
회안대군
이화
河崙
이숙번
朴苞
조영무
潮溫
照準
兵力
不明 不明
被害 規模
不明 不明

第1次 王子의 亂 1398年 王位 繼承權을 에워싸고 일어난 王子間의 싸움으로, 太祖 李成桂 의 다섯째 아들 李芳遠 이 叛亂을 일으켜 反對 勢力을 除去하였기 때문에 방원의 난 으로도 불리며, 그밖에 戊寅靖社 (戊寅定社)라고도 불린다. 第2次 王子의 亂 이 冬服(同腹) 兄弟間의 싸움이라면, 第1次 王子의 蘭은 이福 兄弟間의 싸움이다.

原因 [ 編輯 ]

王子의 亂의 原因은 크게 世子 冊封 問題와 士兵 革罷, 요동 征伐 準備 等에서 비롯했다. 더욱이 붙여서 말하자면, 太宗 李芳遠의 觀點과 鄭道傳의 觀點이 衝突해서 생긴 問題의 一環이라 할 수 있다.

世子 冊封 問題 [ 編輯 ]

太祖 에겐 朝鮮 을 開國하기 前에 맞이한 두 名의 定處(正妻)가 있었는데, 첫番째 夫人은 그가 無名 장수 時節에 故鄕에서 맞이한 韓氏 이며 다른 한 名은 軍功으로 立身揚名한 그가 開京에서 맞이한 姜氏 이다.

하지만 韓氏는 朝鮮開國展 1391年에 이미 死亡했으므로 太祖 는 高麗朝 王妃를 輩出하는 最高 名門 家門이자 當代 第一 權門勢家의 딸이었던 姜氏 의 집안 背景 및 姜氏 의 두터운 人脈과 智謀의 도움으로 個國王(開國王)으로 登極할 수 있었다. 이에 太祖 는 王으로 登極한 直後, 姜氏를 王妃로 冊封하여 整備(正妃)로 삼았으며 [1] 그女의 所生인 어린 두 王子 中에서 王世子를 揀擇하여 막내인 방석을 王世子로 冊封했다.

韓氏가 推尊 王妃가 된 것은 그로 1年 後의 일로, 비록 韓氏가 먼저 太祖 에게 出嫁하긴 하였으나 序列上 韓氏는 車費(次妃)에 不過하였다. 더욱이 太祖 5年(1396年), 顯妣 姜氏가 病으로 逝去하자 太祖 는 姜氏를 追慕하기 위해 王后(王后)로 追封하는데, 이로 인하여 이미 死亡한 韓氏 의 序列은 名目上 後宮이 되었다.

節非 韓氏 所生으로 1男 방우, 2男 房과( 定宗 ), 3男 房의, 4男 방간, 5男 방원( 太宗 ), 6男 방연이 있었는데, 特히 5男 李芳遠은 父王(父王)의 處遇에 對한 不平이 대단하였다. 또한 開國功臣으로서 王世子 이방석의 報道(輔導)를 책임지고 있는 정도전 以下 남은 · 심효생 等 少數 在神이 國王과의 政治的 疏通을 掌握한 狀況에서 一般 臣僚들의 不滿이 있었다.

軍權 扮裝 政策과 요동 征伐 準備 [ 編輯 ]

太祖는 開國 初부터 功臣과 宗親들을 節制使로 임명하여 軍權을 分割했고, 在位 期間 동안 이를 回收하고자 하였다. [2] 뒤이어 太祖의 支援 아래 정도전 요동 征伐 을 計劃하고 士兵(私兵)을 革罷해 軍制(軍制)를 單一化하려 하자, 李芳遠은 이에 反撥하여 조영무, 潮溫 等 士兵을 가진 功臣 및 宗親들과 結託했다.

經過 [ 編輯 ]

漢陽 信徒(漢陽新都)의 共譯(工役)李 完了된 지 2年 後인 1398年 (太祖 7) 陰曆 8月 정도전 · 남은 · 심효생 等이 祕密裏에 謀議하여 太祖 의 病勢가 危篤하다는 理由로 여러 王子를 宮中으로 불러들인다. 李芳遠은 이를 정도전 等이 韓氏 所生의 王子들을 殺戮할 計劃으로 解釋하여, 未然에 防止한다는 名分을 세워 10月 5日 ( 陰曆 8月 25日 ) 異邦의 , 李芳幹 等 여러 王子들을 包攝하고 이숙번 , 민무구 , 민무질 , 照準 , 河崙 , 朴苞 , 이지란 等 麾下 部下들을 시켜 軍事를 일으켰다.

그 뒤 남恩誼 집을 襲擊해 정도전 남은 을 殺害했다. 같은 時刻에 朴葳 , 유만수 , 장지화 , 이근 , 심효생 을 殺害하였고(10월 6日, 陰曆 8月 26日) [3] 變亂의 責任을 世子와 정도전 一派에게 轉嫁했다. 또한, 世子 이방석은 肺위하여 귀양 보내는 途中 殺害하고, 이방석의 冬服 兄 이房番도 함께 죽여 버렸다. 이 變亂으로 世子 이방석이 廢位되니, 다음 世子로 李芳遠을 만들게 된 것은 情勢의 當然한 歸趨였다.

結果 [ 編輯 ]

李芳遠은 長子承繼의 法則을 따르기 위해 亂을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를 正當化하며 世子 자리를 굳이 辭讓하고 둘째 兄인 吏房과 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는 큰兄인 진안대군 이 이미 死亡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行爲에는 野心이 없고 政治的 基盤이 弱한 兄 李芳果에게 次期 帝王의 자리를 讓步함으로써 아비를 치고 아우들을 殺害한 主動者로써의 責任을 떠맡김과 同時에 後날을 期約할 自身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太祖 는 王世子 이방석과 務安郡 이방번, 그리고 사위 흥안군 이제의 죽음에 衝擊을 받고 한달 뒤인 9月에 吏房과 에게 王位를 물려주니 그가 곧 定宗 이다. 이로부터 太祖는 上王(上王)으로 稱하게 되었다. 王으로 卽位한 定宗 은 卽時 生母 節非 韓氏를 신의왕후 로 追尊하여 신덕왕후 姜氏와 同級으로 昇格하였다. 以後 第2次 王子의 亂 을 거치고 定宗 의 뒤를 이어 卽位한 太宗 신의왕후 를 守備(首妃: 元妃)로 交替하여 신덕왕후 보다 윗序列로 만들었으며, 이로도 性이 차지 않아 신의왕후 를 王后보다 上級인 왕태후로 格上하였다가, 신덕왕후 를 다시 賢妃로 調整하여 後宮으로 格을 낮추고 신덕왕후 의 所生들을 庶子로 格下시킨다. 먼 後날인 顯宗 신덕왕후 의 神主가 비로소 太廟(太廟: 宗廟)로 옮겨지고 다시 王后의 禮遇가 올려지지만, 顯宗 또한 신의왕후 의 血孫이기에 신덕왕후 신의왕후 보다 格을 낮추어 신덕왕후 姜氏가 太祖 의 妾으로 出嫁하였다가 신의왕후 의 事後에 비로소 妻로 昇格하여 王妃가 된 繼妃로 調整하였다.

定宗 2年( 1400年 )에는 第2次 王子의 亂 이 일어나게 된다.

意義 [ 編輯 ]

第1次 王子의 亂은 政治的으로 보면 朝鮮 開國功臣 이자 當代 實力者였던 정도전 의 一派를 王權 에 野心이 있던 王의 오남(五男)인 李芳遠 의 一派가 執權 勢力 內 쿠데타 를 통해 打倒하고 權力을 차지한 事件이지만, 좀 더 協議(狹義)로 볼 때에는 異腹兄弟 間의 王位 爭奪을 위한 骨肉相爭이었다.

參考 文獻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內容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各州 [ 編輯 ]

  1. 太祖實錄 1年(1392 妊娠 / 名 紅무(洪武) 25年) 8月 7日(丙辰) 1番째記事
  2.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703020_002
  3. 太祖實錄 (1413) 14卷, 太祖 7年 8月 26日 記事 1番째記事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