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정비석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本文으로 移動

정비석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정비석
作家 情報
出生 1911年 5月 21日 ( 1911-05-21 )
{日帝 强占期 朝鮮} 平安北道 義州郡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平安北道 義州郡 )
死亡 1991年 10月 19日 ( 1991-10-19 ) (80歲)
國籍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職業 作家, 言論人
장르 小說

정비석 (鄭飛石, 1911年 5月 21日 ~ 1991年 10月 19日 )은 大韓民國의 小說家이다.

主要 履歷 [ 編輯 ]

平安北道 義州郡에서 出生하였고 지난날 한때 平安北道 宣川郡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後 平安北道 龍川郡에서 成長하였다. 本貫은 河東 이며, 本名은 情緖죽 (鄭瑞竹)이다. 元來는 朝鮮日報 및 동아일보 新春文藝에 當選되며 純粹小說作家로 出發했으나 以後 大衆作家로 轉向하였다.

第1共和國 當時 小說 자유부인 이 淫亂性 是非에 휘말리면서 筆禍事件을 겪기도 했으며 여러 歷史 長篇 小說을 내기도 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日本 에 留學하여 니혼 大學 文科에서 修學했다. 中退 後 歸國하여 小說을 創作하기 始作했다. 1936年 동아일보 新春文藝에 短篇 <卒哭祭>가 入選하고, 다음해 조선일보 新春文藝에 短篇 <城隍堂>이 當選되어 登壇하였다. 日帝强占期 에는 《 每日申報 》와 《 中央新聞 》 等에서 記者로 勤務하였으나, 1950年代 以後로는 專業 作家로 小說 創作에 沒頭했다.

1936年 에 發表한 데뷔作 〈卒哭祭(卒哭祭)〉와 이듬해 發表한 短篇 〈城隍堂〉李 初期의 代表作이다. 素朴하고 親近한 人物이 登場하면서도 大衆의 눈길을 끌 수 있는 官能性이 들어 있는 이들 作品은 以後 大衆作家로 크게 成功하는 정비석의 作品 傾向을 보여준다. 1948年 年末 麗水 順天 國軍 14聯隊 事件 現場 踏査 문예단으로 全南 東部 地域을 訪問 視察하였다. 日帝 末期에 發表한 親日 作品으로 인해 2002年 公開된 親日 文學인 42人 名單 2008年 發表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中 文學 部門에 選定되었다. 親日 文人團體 朝鮮文人輔國會 幹事를 지냈고, 밝혀진 親日 作品 數는 小說 3篇을 包含하여 總 9篇이다. [1]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光復 以後 小說 創作을 本格化하여 많은 連載 作品을 發表하였고, 特히 《 자유부인 》(1954)은 韓國 戰爭 以後 一部 階層에 導入된 頹廢的 西區 風潮를 赤裸裸하게 描寫하여 1950年代를 代表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作品은 1956年 한형모 를 始作으로 강대진 , 박호태 , 朴在昊 에 依해 네 次例나 映畫化되기도 했다.

자유부인 筆禍 事件 [ 編輯 ]

그의 小說 《자유부인》李 頹廢的이고 淫亂하다는 理由로 李承晩 의 指示로 特務對 에 連行되기도 했다. 特務對의 警察 棺들은 그에게 金日成 의 指示로 大韓民國 을 淫亂, 頹廢하게 描寫해 赤化를 祈禱하지 않았느냐며 拷問을 加하기도 했다.

이는 日本 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中華人民共和國 에도 大書特筆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中華人民共和國 에서는 大韓民國 資本主義 體制의 墮落을 보여주는 事例로 弘報하며 嘲笑를 보내기도 했다. 作品 《자유부인》은 1980年代 들어서 映畫化되었고, 애마부인 , 젖소夫人 바람났네 等의 映畫 作品들의 援助, 嚆矢가 되기도 했다.

4.19 革命 以後 [ 編輯 ]

그의 作品은 1960年 4·19 革命 으로 李承晩 體制가 崩壞되면서 禁書 (禁書)에서 解除되었다. 以後 초한지 歷史 長篇小說 을 쓰기도 했는데 1959年 發表한 小說 산유화 1987年 KBS 1TV에서 드라마化됐다.

1970年代 以後로는 歷史物이나 中國 古典을 새로 고쳐쓴 作品을 主로 썼다. 《李朝女人 士禍》(1977), 《閔妃》(1980), 《초한지》(1984), 《金삿갓 風流奇行》(1985) 과 《孫子兵法》시리즈, 《三國志演義》 等이 代表的이다. 1981年부터 한국경제신문에 連載되었고 1984年 3卷의 單行本으로 出刊된 <孫子兵法>은 100萬卷 以上 팔리며 1984年과 1986年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 目錄에 올랐다. 이 가운데 《閔妃》는 명성황후 에 對한 否定的 이미지를 流布한 作品이라는 批判도 있다. [2] 例를 들어 高宗 의 長男인 완화군 을 둘러싼 흥선大院君 과 明成皇后의 葛藤 構造는 史劇 드라마 等을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日本人 機構치 겐조 ( 日本語 : 菊池謙讓 )의 明成皇后에 對한 歪曲된 描寫를 踏襲한 정비석의 創作일 뿐이라는 것이다. 《三國志演義》의 境遇 附錄으로 諸葛亮審서 를 別添했으며 거기에 直接 中國까지 찾아가서 實際 劉備 와 蜀漢 關聯人物들이 머무른 곳이나 墓所 等을 寫眞으로 撮影해서 冊의 앞페이지에 添附하는 等 當時 基準으로는 相當히 心血을 많이 기울여 執筆했다.

別世 [ 編輯 ]

1991年 10月 19日 새벽 5時 서울市 용산구 동부이촌동 漢江맨션 27棟 406號 自宅에서 宿患으로 別世했다. 享年 81歲

遺族으로는 當時 未亡人 박정순 女史(80), 長男 天壽(50, 中央日報 理事) 等 3男 4女가 있었다.

CF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 권영민 (2004年 2月 25日). 《韓國現代文學大辭典》.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848쪽쪽. ISBN   89-521-0461-7 .  

各州 [ 編輯 ]

  1. 김재용 (2002年 8月). “親日文學 作品目錄” . 《실천문학》 (67號): 123~148쪽. 2007年 9月 2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10月 2日에 確認함 .  
  2. 《聯合뉴스》 (2007.8.22) "정비석作 '小說 명성황후'는 廢棄處分해야" - 國史學者 이태진 '韓國史 市民講座'서 主張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