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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蘭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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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蘭貞 (鄭蘭貞, 1506年 ~ 1565年 11月 13日 )은 朝鮮 중기의 外戚이며 明宗 의 넷째 外三寸이자 宰相인 윤원형 의 愛妾이자 그의 둘째 夫人이다. 明宗 弔意 權力者 中 한 名으로, 윤원형 의 本部인 沿岸 金氏를 毒殺했다는 疑惑을 받았으며, 事後 士林派 는 그를 惡女의 代名詞로 일컬었다.

本貫은 哨戒 (草溪)로 아버지는 都摠府 副摠管을 지낸 정윤겸 이고, 정난정은 그와 그의 妾 사이에서 태어난 庶女였다. 漢城府 出身.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漢城府 에서 哨戒 鄭氏 五衛都摠府 副摠管 정윤겸 과 정윤겸의 집에 分配된 奴婢 茶室(次室) 南氏(南氏)사이에서 태어난 2男 3女 中 막내 딸이었는데 어릴 때 집을 나와 妓生이 되었다. 그女의 母親이 奴婢가 된 건 逆謀에 連坐되었기 때문이다. [1]

젊은 時節에는 文定王后 의 동생인 尹元衡의 눈에 들어 妾이 되었다. 後날 金安老가 文定王后를 廢位하려 한 陰謀가 發覺되자 金安老가 賜死되고 金安老의 姪女였던 尹元衡의 夫人 金氏를 尹元衡과 文定王后의 默認下에 몰아내고 實質的인 안房 主人이 되었다. 그 後 明宗8年 文定王后는 정난정을 嫡妻로 올리라는 傳敎를 내려, 정난정은 尹元衡의 情實이 되었다.

정난정은 윤원형과의 膝下에 4男 2女를 남겼는데, 鄭蘭貞이 正室夫人이 됨에 따라 그 子女들도 赤字가 되었다. 兩班家에서는 그女의 權勢에 힘입으려고 査頓이 되자 請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다. 많은 財産을 모으며 富貴를 누렸고 文定王后와 親密한 關係에 있었다.

理財에도 能했던 그는 尹元衡의 權勢를 背景으로 商權을 掌握하여 專賣, 모리 行爲로 많은 富를 蓄積하였으므로, 當時 權力을 탐했던 朝臣들은 尹元衡과 鄭蘭貞 夫婦의 子女들과 다투어 婚姻줄을 놓았다고 한다. [2]

政治 活動 [ 編輯 ]

文定王后 의 信任을 얻어 宮闕을 마음대로 出入하였으며, 1553年 (明宗 8) 職牒(職帖)을 받아 마침내 外命婦 種1品 貞敬夫人이 되었다. 또한 윤원형 이 上疏하여 嫡子와 庶子의 身分差別을 廢止하고 庶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當時로서는 身分制度의 根幹을 흔드는 劃期的인 政策이었으며 身分制度 때문에 挫折한 사람들에게 呼應을 받았다. 僧侶 普愚 文定王后 에게 소개시켜 禪宗判事(禪宗判事)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先·敎(禪敎) 量종이 復活되고 度牒制道(度牒制度)가 다시 實施되는 等 한때나마 佛敎 가 隆盛하기도 하였다.

그女는 普愚 文定王后 에게 積極 推薦하여 그를 총애받게 한다. 정난정은 奉恩寺의 僧侶 普愚 를 文定王后에게 소개시켜 兵曹判書職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一時的으로 佛敎가 隆盛하기도 했다. [3]

尹元衡이 吏曹判書에 오를 때 政府仁으로, 議政府 右議政 領議政 에 오를 때에는 貞敬夫人 으로 綽號가 올랐다. 貞敬夫人으로 오른 後 闕에 자주 들어 明宗 過度 親分이 두터웠다.

最後 [ 編輯 ]

性理學者인 士大夫들은 정난정에 對한 反感이 極甚하여 그 後援者인 文定王后 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1565年 文定王后가 죽자 僧侶 普愚 는 濟州島로 귀양을 가 死亡하고 정난정은 士林 의 彈劾을 받아 本來 身分인 賤民으로 降等되었다. 以後에도 士林의 繼續的인 彈劾으로 男便 윤원형 과 함께 黃海道 强音(江陰)으로 流配되었다.

文定王后 가 昇遐한 지 5個月 後인 1565年 9月 8日 윤원형 의 本部인 沿岸 金氏의 繼母 姜氏는 鄭蘭貞이 金氏를 毒殺했다며 義禁府 에 告發하였다. 이 事件으로 漸次 士大夫의 攻擊이 심해지자 1565年 11月 13日 毒이 든 술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 도 뒤를 이어 自決하였다. 事後 士林派 에 依해 惡女의 代名詞로 일컬어졌다. 朝鮮의 士大夫는 정난정을 朝鮮의 秩序를 어지럽힌 墮落한 女性으로 描寫하였는데, 口傳과 民譚을 통해 作品과 喜劇의 素材로 活用되었다.

京畿道 坡州郡 교하면 당하리 산 4-20番地(現 京畿道 坡州市 당하동 산4-20번지) 先山 近處에 安葬되었다. [4] 윤원형 과 本部인 沿岸 金氏가 埋葬된 墓所 뒤쪽에 埋藏되었으며 碑石은 없이 傳하다가 朝鮮 이 滅亡한 뒤에 세워졌다.

家計 [ 編輯 ]

  • 아버지: 정윤겸
  • 어머니: 南氏 (정윤겸의 첩)
    • 男便: 윤원형
      • 長男 : 尹說(尹?)
      • 次男 : 윤효원(尹孝源)
        • 孫子 : 윤혜(尹?)
      • 三南 : 윤충원(尹忠源)
        • 孫子 : 尹面(尹??)
      • 사남 : 尹淡然(尹覃淵)
      • 사위 : 이조민(李肇敏)
      • 사위 : 이귀남(李貴南)

關聯 作品 [ 編輯 ]

텔레비전 드라마 [ 編輯 ]

評價 [ 編輯 ]

그는 自身이 文定王后 의 側近인 點을 利用, 文定王后 에게 庶子 庶女度 能力이 되는 人物을 登用할 것을 建議하였다. 또한 男便 尹元衡이 上疏하여 嫡子와 庶子의 身分差別을 廢止하고 庶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2] 이는 當時로서는 身分制度의 根幹을 흔드는 劃期的인 政策이었으며 身分制度 때문에 挫折한 사람들에게 呼應을 받았다. [2]

기타 [ 編輯 ]

  • 뒤에 나타난 傳說에는 그와 鄭蘭貞이 死藥을 받고 죽었다, 鄭蘭貞이 逮捕되어 奴婢가 된 뒤에 죽었다는 傳說이 나타났다. 이는 事實은 아니나 鄭蘭貞 및 尹元衡에 對한 士林의 怨恨이 表出된 것으로 解釋된다.
  • 宣祖朝에 判中樞府事/右贊成을 지낸 정종영 은 정윤겸의 嫡長孫이자 鄭蘭貞과는 조카-鉏고某 關係였다. 原形이 上邊(上變)하여 獄事를 일으킬 적에 論議에 參與하도록 넌지시 일깨워주었으나 終映은 거짓 모르는 체하고 應하지 않았다. 난정이 僭濫하게 情實(正室)李 되어 夫人(夫人)에 봉해져서 外命婦(外命婦)의 우두머리에 있게 되자 사람들이 敢히 抗辯하지 못하였으나 終映은 오히려 얼척(孼戚)으로 待遇하였다. 이 때문에 原形이 크게 遺憾을 품어 매양 罪를 얽어 해치려 하였다. 難正義 어머니가 난정을 警戒하기를 "너는 宗孫을 해치지 말라. 내가 盟誓코 죽음으로써 當하겠다”하였으므로 禍를 면하게 되고 예전처럼 顯達(顯達)韓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 정난정의 冬服 둘째 오빠는 담(淡)이었다. 그는 언젠가는 鄭蘭貞이 반드시 禍根이 될것이라 豫想하고, 一切 그女와 往來를 하지 않았다. 甚至於 그女가 찾아올까봐 집 入口의 담을 꼬불꼬불하게 쌓아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程度의 좁은 通路를 만들었다. 정난정은 늘 가마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가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문에 정난정은 그의 집에 가볼 수가 없었고, 德分에 윤원형 과 鄭蘭貞이 沒落한 뒤에도 禍를 입지 않았다.
  • 정난정의 4寸인 정준 이 明宗7年 6月 18日 社獻奏 執義에 任命되었다. 實錄에 依하면 정준은 陰險하고 輕薄한 性品으로 尹元衡의 威嚴을 빌어 大官이 되어 마음내키는 대로 人物들을 攻擊하였고 그와 意見을 달리하는 者들은 辱을 當하지 않은 者가 없었다고 記錄되어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그러나 그女의 母親의 姓名은 傳하지 않는다.
  2. 鄭蘭貞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朝鮮王朝 實錄 (圖書出版 들녘, 1996) 207페이지
  4. 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21&newsid=20061103140413945&p=segye
  5. 該當 드라마의 主人公이다. 但, 該當 드라마에서는 정난정을 王室의 人物인 파릉君의 庶女로 나타내고 있으나 派陵軍이라는 人物은 該當 드라마만의 架空의 人物로, 實際와는 다르게 그려졌다. 그 外에도 事實과 다른 여러 가지 內容이 登場한다. 人氣 上昇 <女人天下> 어디까지 事實인가? 《東亞日報》, 2001年 5月 21日 作成, 2012年 10月 31日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