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괄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정괄 (鄭?, 1435年 ~ 1495年 )은 朝鮮 前期의 文身이다. 는 輕灰(慶會), 本貫은 東萊 이다.

生涯 [ 元本 編輯 ]

領議政 정창손 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停止(鄭持)의 딸이다. 처음에는 蔭官(蔭官)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1465年 文科에 合格하였다. 병조참의 , 兵曹參知 를 거쳐 司諫院 大司諫 , 吏曹參判 , 黃海道觀察使를 하다 成宗의 寵愛로 議政府右贊成으로 昇進, 司憲府 大司憲 을 했고, 吏曹判書를 하며 紀綱을 바로잡았다. 1485年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에 任命되었고, 慶尙道觀察使를 하고 1488年 刑曹判書가 되었다. 1492年 에는 明나라 에 가서 皇太子 冊封을 祝賀하고 以後 判義禁府事로 昇進하여, 1493年 兵曹判書가 되었다. 그 後 平安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정괄은 老衰함을 理由로 辭退하려 하였으나 當時 임금이었던 成宗 은 "特別히 卿을 보내는 것"이라 하며 辭退를 許諾하지 않았다. 以後 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死亡과 시호 [ 元本 編輯 ]

1495年 , 연산군 이 卽位하자 明나라에서 使臣을 보내 王을 冊封하였다. 이에 燕山君은 정괄을 特別히 불러 右議政 에 任命하고 곧 左議政 으로 올리며 王 冊封에 對한 謝恩使로 明나라에 派遣하였다. 그러나 정괄은 明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漆假令(七家嶺)이라는 곳에서 死亡하였다. 정괄은 죽기 前에 아들 정종보 에게 "平生에 적을 만한 功績이 없으니 碑石을 세우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事後 공숙(恭肅)이라는 諡號가 주어졌는데, 일을 함에 있어서 堅固한 것을 '공(恭)', 마음가짐에 決斷이 있는 것을 '숙(肅)'이라 이름한다고 한다.

《공숙공 정괄 墓域》은 京畿道 金浦市 대곶면 약암리에 있다. 2013年 12月 11日 김포시의 鄕土遺跡 第15號로 指定되었다.

參考 文獻 [ 元本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