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성당

全州 전동聖堂
(全州 殿洞聖堂)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種目 私的 第288號
( 1981年 9月 25日 指定)
面積 679m 2
時代 大韓帝國 時代, 日帝强占期 ( 1908年 - 1914年 )
所有 全州敎區 天主敎維持財團
位置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全北特別自治道 全州市
全北特別自治道 全州市(大韓民國)
住所 全北特別自治道 全州市 完山區 太祖로 51
座標 北緯 35° 48′ 47.901″ 東京 127° 8′ 57.304″  /  北緯 35.81330583° 東經 127.14925111°  / 35.81330583; 127.14925111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전동성당 (殿洞聖堂)은 全北特別自治道 全州市 에 位置한 로마 가톨릭교회 聖堂 이다. 1981年 9月 25日 大韓民國의 史跡 第288號로 指定되었다.

槪要 [ 編輯 ]

現在 全州市 안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聖堂이자, 湖南 全體에서 最初로 세워진 로마네스크 樣式 建物 [1] 이다. 1937年 에서 1957年 까지 天主敎 全州敎區 主敎座聖堂 이었으며, 建築物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映畫의 撮影地나 結婚式 場所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 本堂의 守護 聖人 은 性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다.

歷史 [ 編輯 ]

元來 殿洞聖堂이 位置한 자리는 豐南門 의 밖으로 1791年 辛亥迫害 때 韓國 敎會 最初의 殉敎者인 윤지충 바오로(1759-1791)을 비롯하여 [2] 그의 外從兄 權尙然 야고보(1751-1791)李, 1801年 辛酉迫害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 有關檢 (1768-1801) 兄弟가 戮屍刑을, 윤지헌 프란치스코 (1764-1801), 김유산 토마스(1760-1801), 이우집 (1761-1801)等이 絞首刑을 當한 等 湖南 地域의 많은 가톨릭 信者가 殉敎한 자리였다. 19世紀 末에 이르러 基督敎 信仰이 許容되면서 開港地가 아니었던 全州市에도 宣敎師가 들어왔으며, 1891年 에는 全州聖堂 (現在의 전동성당) 主任인 보두네 新婦가 現在의 位置에 있었던 民家를 사들여 臨時 本堂으로 삼았다. [3]

本堂이 처음 생겼을 때에 全州邑城 周邊에 信者는 거의 없었고, 主로 山골인 大勝利, 孤山 되재 , 千戶洞, 배재 等地에 信者가 密集해 있었으나, 1894年 東學 農民 運動 이 일어나는 等 여러 事件이 일어나면서 信者의 數가 急激히 增加하였다. [4] 따라서 旣存의 聖堂보다 더 큰 聖堂의 必要性이 擡頭되었고, 以後 1908年 明洞聖堂 의 內部를 建築한 프와넬 神父의 設計로 聖堂이 着工되었다. 聖堂은 1914年 에 비로소 外觀 工事가 끝났으며, 以後로도 繼續 工事가 進行되어 1931年 에 完工되었고, 그 해 6月 18日 大邱代牧區 드網즈 敎區長을 主禮로 하여 祝聖式을 가졌다. [5]

1937年 에는 大邱代牧區에서 錢主指目區 가 分離되면서 主敎座 聖堂 으로 指定되었으며, 첫 敎區長인 김양홍 神父가 着座하였다. 以後 繼續해서 主敎座 聖堂으로의 役割을 하다가 1957年 中央聖堂 으로 主敎座가 옮겨감으로써 다시 平凡한 聖堂으로 돌아왔으나, 以後로도 繼續 全州 地域의 基督敎 聖地 中 하나로써 象徵的인 役割을 하고 있다. 1981年 9月 25日 私的 第 288號로 指定되었다.

1970年代 1980年代 에는 大韓民國 의 軍事政權에 抗拒하는 示威가 聖堂에서 몇 次例 있었으며, 이 過程에서 主任 神父 및 補佐神父가 警察의 暴力에 露出되기도 하였다. [6] 1988年 에는 原因 不明의 火災가 일어나 聖堂의 一部가 全燒되는 等의 일도 겪었다.

2009 年에는 大韓民國의 一部 基督敎 敎會가 社會 奉仕보다는 外延的 成長에 置重하는 것에 憤怒한 20代 靑年 2名이 建物 正門에 反基督敎的 落書를 하였다가 붙잡혔다. [7]

建築 [ 編輯 ]

殿洞聖堂은 湖南 地域 最初의 西洋式 建物이다. 로마네스크 樣式 建物 [1] 이며, 中央의 鐘塔과 兩쪽 階段에는 비잔틴 樣式 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聖堂 內部의 石造 기둥에도 비잔틴 樣式이 녹아 있다 [5] . 韓國의 敎會 建築物 中 曲線美가 가장 아름답고 雄壯하며 華麗한 建物로 손꼽히고 있다. [8]

聖堂은 花崗巖 을 주춧돌로 하여 붉은 甓돌 로 지어졌다. 주춧돌인 花崗巖은 着工 當時인 1908年 大韓帝國 을 間接 統治하고 있던 日本 帝國 統監府 가 헐은 全州邑城의 豐南門 隣近 城壁 돌을 利用하였다. [5] 聖堂을 構成하는 甓돌의 一部도 헐린 城壁에서 나온 흙을 구워 만들었다. [5] 나머지 石材와 木材들은 各各 益山市 황등면 의 採石場과 僧巖山 의 木材를 使用하였다. 1908年에 建築을 始作하여 1931年에 最終 完工되었다.

함께 있는 전동성당 司祭館 全北特別自治道 文化財資料 第178號로 指定되어 있다. [9]

전동성당 夜景모습

現況 [ 編輯 ]

全州敎區의 3地區에 屬해있으며, 完山區 全東, 교동, 慶園洞, 豊南洞, 남노송洞, 동완산동, 서완산동, 중앙동, 다가동을 管轄하는 敎會區 의 中心 聖堂이다. 敎會具를 總 4個의 地域으로 區分하여 司牧하고 있다. 現在 敎會區 內에 總 7,521名의 信者가 있다.

聖堂에 附屬된 施設로 성심유치원이 있으며, 近處에 全州성심女子中學校 全州성심女子高等學校 가 세워져 있다.

寫眞 [ 編輯 ]

各州 [ 編輯 ]

  1. 全州市廳. “전동성당” . 2009年 4月 10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33.....신해박해로 尹持忠이 참수당할 때 피가 튀어 붙은 全州城의 돌을 주춧돌로 삼아 全州에 殿洞聖堂을 建築했다.
  3. 天主敎 全州敎區 전동성당. “沿革”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4月 10日에 確認함 .  
  4. 〈보두네〉 . 《가톨릭대事前》 . 2008年 4月 10日에 確認함 .  
  5. 평화신문 (2003年 6月 22日). “全州敎區 전동성당 〈上〉 - 殉敎 1番地에 우뚝 선 信仰의 搖籃” . 가톨릭出版社 평화신문. 2016年 6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4月 10日에 確認함 .  
  6. 天主敎 全州敎區 전동성당. “沿革”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4月 10日에 確認함 .  
  7. 聯合뉴스 (2009年 5月 13日). “全州 전동聖堂 落書犯, 잡고 보니” . 조선닷컴 . 2009年 6月 4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8. 文化財廳. “文化遺産情報” . 2009年 4月 10日에 確認함 .  
  9.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33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