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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의 總務處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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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上情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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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홍
(全奎弘,
1906年
~
2001年
5月 29日
)은 大韓民國의 公務員이다. 總務處長과 駐西獨 大使를 歷任하였다.
平壤 出身으로, 도쿄
주오大學校
法學 學事, 美國 콜로라도州 센좀 大學 法文學 碩士, 美國 시카고시 로욜라 大學 法學大學院 法學 博士 學位를 取得하였다.
美軍政廳 特別檢察廳長, 法務部 次官을 歷任하였으며, 1948年 12月 7日부터 12月 12日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第3次
國際 聯合 總會
에
大韓民國
의 유엔承認을 위한 韓國 代表團으로서
場面
(團長),
장기영
,
金活蘭
,
조병옥
,
정일형
,
김우평
, 김준구와 함께 參席하였다. 또한 1951年 第6次 國際 聯合 總會에도 韓國 代表團으로서
場面
(團長),
임병직
,
장택상
,
이묘묵
,
안捐生
과 함께 參席하였다.
[1]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에는 國會事務總長, 總務處長, 主 프랑스 公使, 東國大學校 大學院長 兼 副總長을 歷任하였다.
[2]
1954年 5月 18日 歸國하였으나, 1955年 11月이 되도록 駐프랑스 公使 解任發令이 나지 않고 있었다.
[3]
1960年 11月 17日頃,
外務部
消息通에 依하여 西獨 駐在 大使에 當時 동국대학교 副總長 전규홍 博士가 任命될 것이라는 點이 報道되었다. 全氏에 對한 아그레망이 이미 西獨政府의 承認을 얻어 大韓民國 政府에 回送되었었다.
[4]
大韓民國 政府는 1960年 11月 21日 空席 中이던 西獨의 大明全權大使로 전규홍을 任命 發令하였다.
[5]
전규홍의 就任宣誓 및 信任狀 授與式이 1960年 11月 24日 上午 9時에 景武臺에서 擧行되었다.
[6]
전규홍 博士 部處(夫妻)는 1960年 11月 24日 下午 4時, CAT便으로 赴任次 韓國을 떠났다. 全大赦는 出發에 앞서 記者들에게 "外資導入法에 立脚한 西獨의 投資를 可能케하기 위하여 于先 兩國間의 友好的 通商條約을 맺도록 努力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復興開發에 緊急히 要請되는 技術導入問題도 西獨 政府와 協議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7]
1961年 2月 初,
콘라트 아데나워
西獨 首相은 전규홍 西獨 大使와의 會見을 통하여 "西獨政府는 韓國의 經濟發展을 위해 積極的으로 도와줄 用意가 있음"을 表明하여 왔다.
[8]
전규홍은 1961年 4月,
세네갈
共和國 獨立慶祝式에 政府特使로 參席하였다. 세네갈 政府는 韓國 使節들에게 極히 友好的인 態度와 심심한 辭意를 표하였다.
[9]
大使職 離任 豫定이던 전규홍 大使는 1961年 6月 29日 콘라트 아데나워 西獨 首相을 訪問하였다.
[10]
최경록
,
강문봉
, 전규홍,
이철승
,
양일동
및 前 駐美 大使館 參事官 夫人들은 1963年 3月 21日, 美國 大統領 官邸 앞에서 "軍隊는 政治에 干涉하지 말라", "朴正熙軍事獨裁打倒", "韓國人은 軍部政治를 願치 않는다", "韓國人은 眞正한 民主主義를 支持한다" 等의 플래카드를 들고 朴正熙 將軍의 軍政延長提案에 反對하는 示威를 벌였다.
[1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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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맏딸 전영숙(全榮淑)은 1953年 南大門國民學校를 卒業, 아버지를 따라 파리를 거쳐 스위스 취리히 近處의 세인츠 갈 音樂大學에서 音樂을 專攻. 1960年 誘導2段인 오빠의 紹介로 勳거 뷰러 스위스誘導聯盟會長과 結婚했다.
[12]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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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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