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章 칼뱅의 神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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章 칼뱅 의 石版畫, 推定. 1830.
章 칼뱅 의 1559年 基督敎綱要
프랑스의 有名한 彫刻家 다니엘 레클레로(Daniel Lecleroq)가 만든 章 칼뱅 銅像, 장신대學校

章 칼뱅의 神學 (Theology of Calvin)은 宗敎改革家 章 칼뱅 의 神學思想을 통하여 體系的으로 後代에서 定立한 神學을 말한다. 學者들 觀點에 따라서 칼뱅 神學의 中心主題, 特徵과 强調點에 關한 見解가 다양하다. 後記 칼뱅주의者 들이 主張하는 內容이 國家別로 그리고 新正統主義 的인 觀點의 差異點으로 말미암아 다르게 理解하고 있다.

칼뱅 神學의 重要한 點에 關해 基督敎 百科事典(The Encyclopedia of Christianity)은 아래와 같이 說明한다.

그의 神學的 重要性이란 基督敎 敎理의 體系化를 試圖한 것이다. 豫定論에서, 基督論과 聖禮典에 根據하여 救援의 顯在的 使役과 超越的 永遠한 使役 사이에서 單純히 終末論的으로 樹立한 區別에서, 衆生에서(tertius usus legis, 小委말하는 律法의 세 番째 用法) 믿음의 順從을 일으키는 聖靈의 歷史를 强調한 點에서 그는 改革神學에 持續的 影響을 주었던 正統主義를 細密하게 만들었던 點이다. [1]

칼뱅 神學을 支配하는 原理는 人間論的이거나 救援論的이거나 또는 敎會論的인 게 아니라 神學的이다. 칼 홀(Karl holl)이 指摘한 대로, “칼뱅의 神學的 活動의 重要性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槪念을 그 中心에 놓은 데 있다. 칼뱅의 모든 個別的인 問題들은 하나님의 槪念에서 絶頂에 이른다.” 基督敎綱要와 註釋들과 說敎들과 論文들을 檢討해 보면, 어디든지 칼뱅은 하나님 中心 思想, 卽 하나님의 主權思想을 全面에 浮刻시킨다. [2] 칼뱅 神學은 그의 說敎와 論文뿐만 아니라 그의 聖經註釋에서, 또 自身의 가장 簡潔한 作品이며 大作인 基督敎 强要 에서 自身의 神學을 發展시켰다. 特別히 칼뱅은 基督敎 强要가 基督敎 神學에 關한 그의 主張을 要約한 것으로 使用되기를 意圖했으며, 主席과 함께 比較하며 읽히기를 바랬다. 1536年度 初版은 6章으로 構成되었지만 1539年 판은 필리프 멜란히톤의 《神學 通論》에 나타난 主題들 위에다가 몇 張을 더했기 때문에 3倍로 길어졌다. 1543年 판에서는 使徒信經에 關한 章에 새로운 資料를 더하고 擴張시켰다. 1559年 판은 1卷은 創造主 하나님, 2卷 拘束朱 그리스도 , 3卷에서 聖靈을 통한 그리스도의 恩惠를 받는 것, 그리고 4卷에서는 國家와 敎會를 다룬다.

出版物 [ 編輯 ]

칼뱅은 그의 說敎와 論文뿐만 아니라 聖經 主席에서 自身의 神學을 발전시켰지만, 그의 가장 明瞭한 見解는 그의 大作 基督敎 强要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볼 수 있다. [3] 그는 이 冊을 基督敎 神學에 關한 要約으로 使用하고자 했으며, 그의 主席과 함께 읽도록 主張하였다. 기독교 强要는 여러 판으로 發展하였는데, 그의 神學은 初期부터 後期에 이르기까지 크게 變하지 않았다. [4] 1536年 初版은 6章으로 構成했다. 1539年 出版한 第2版은 맬랑히톤의 神學通論(Loci Communes)에서 나타나는 主題에 關한 여러 張을 追加했기 때문에 3倍로 늘었다. 1543年 판은 그가 다시 새로운 資料를 追加하고 使徒 神經에 關한 腸을 擴張했다. 1559年 基督敎 强要의 마지막 판이 나왔다. 그때까지 이 作業은 80卷의 冊 4卷으로 構成했고, 各 冊은 信條에서 나온 陳述書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創造主 하나님에 關한 第1卷, 그리스도의 救世主에 關한 第2卷, 3卷은 聖靈을 통해 그리스도의 恩惠받음, 그리고 마지막 4卷은 그리스도의 共同體 또는 敎會에 關해서 가르친다. [5]

칼뱅 硏究의 르네상스 [ 編輯 ]

칼뱅 硏究는 19世紀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 그리고 美國의 워필드 를 始作으로 本格的인 硏究를 試圖했다. 칼뱅 神學속에 나타난 主題에 關해 歷史 神學者 하이코 오버만 (Heiko A. Obermann)은 [6] 칼뱅 神學의 重要한 思想에 關해 神政政治, 豫定論, 敎會(信仰生活)의 規則, 성경관을 꼽는다. [7] 傳統的으로 칼뱅 硏究는 豫定論이나 하나님의 主權과 같은 특정한 主題 中心으로 進行했다. 1909年 칼뱅 誕生 400周年을 맞이하여 世界 各國에서 칼뱅 硏究를 本格 始作했다. 特別히 1930年代에 칼뱅-르네상스는 世界的인 神學者 카를 바르트 (Karl Barth)와 에밀 부루너 (Emil Brunner)의 自然 神學 論爭이 發端이었다. 獨逸에서 오토 베버 (Otto Weber)와 빌헬름 니젤, 노이저와 같은 神學者들이 硏究했고, 네덜란드에서 스파이第커와 헤르만 셀더下위스 , 英國에서 T.F. 토렌스와 데이비드 라이트, 美國에서 리차드 갬블, 존 헤셀링크 , 리차드 멀러 , 존 리스 , 암스트롱과 같은 많은 學者가 專門 學術 硏究集團을 形成했다. 世界칼뱅學會, 美國칼뱅學會, 韓國칼빈學會 안에서 活潑하게 硏究를 進行하고 있다. 2009年 요한칼뱅誕生500周年 을 맞이해서 칼뱅 神學 硏究의 絶頂을 맞이하였다.

칼뱅神學의 方法과 統一性 [ 編輯 ]

칼뱅學者 존 H. 리스에 따르면 그의 神學은 일정한 方法들을 통해 統一性을 얻고 있다고 한다. [8]

  • 칼뱅의 모든 意識的 神學活動은 하나님의 啓示로서의 聖經의 權威 아래에 附屬된다.
  • 經驗이 갖는 役割과 글을 쓸 때 그가 處한 狀況의 具體性이다.
  • 칼뱅의 神學은 理論的인 學問이 아니라 實踐的인 學問이다.
  • 神學의 業績은 單純 明瞭한 表現樣式의 統一性을 가진다.

칼뱅의 神學的 觀點 [ 編輯 ]

칼뱅의 思考를 支配하는 神學的 觀點들과 基本的인 神學은 다음과 같다. [9]

  • 하나님의 超越成果 內在性의 關係시키는 方法
  • 하나님의 絶對 주권성
  • 自然과 恩惠를 綜合的으로 보는 方法論, 創造主 하나님과 拘束朱 하나님에 對한 知識을 聯關하는 方法
  • 福音과 律法을 關聯市켜고 稱義와 成火를 관련시키는 方法이다. 序論 分離시키지 않고 서로 다르고 混同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 人間共同體를 하나님의 權威 아래 둔다.

칼뱅神學의 特徵 [ 編輯 ]

그의 基督敎 强要 와 朱錫 그리고 說敎와 論文에서 그의 神學的 特徵을 찾아 볼 수 있다.

宗敎 [ 編輯 ]

章 칼뱅 敬虔 宗敎 를 낳는다고 한다, (基督敎綱要, 1:2:1) 敬虔이란 하나님에 對한 敬畏와 하나님에 對한 사랑이 結合된 것이라고 한다. 純粹하며 참된 宗敎는 하나님에 對한 嚴肅한 두려움과 結合된 信仰이라고 한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自發的인 敬畏를 內包하고 있으며, 聖經에 規定된 禮拜를 隨伴한다. (基督敎綱要, 1:2:2)

성경관 [ 編輯 ]

칼뱅 은 基督敎 强要에서 우리의 智慧는 하나님을 아는 知識과 우리 自身을 아는 知識으로 構成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을 아는 知識은 人間안에서 發見되지않고 이 世上을 觀察해서 發見되지 않는다고 한다. [10] 그 知識을 얻는 唯一한 方法은 聖經을 硏究하는 것이라고 한다. 칼뱅은 말하기를 創造主 하나님께 到達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그의 案內者요 先生으로서 聖經이 必要하다고 한다. [11] 그는 自身의 聖經 을 그의 基督敎 强要 1卷 6張-12章에서 仔細히 다루고 있다. 칼뱅 루터 의 傳統을 더욱 발전시켜 모든 사람들의 삶의 領域에서 聖經 을 實踐的으로 使用하는 일을 도왔다. 칼뱅에 따르면 聖經 하나님 의 말씀으로 神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統治 領域에서도 唯一한 原理( 라틴語 : unicum principium )라고 한다. 루터 의 思想을 따르는 칼뱅 聖經 하나님 의 말씀이라고 한다. 루터 가 體驗的인 神學 을 실존적으로 主張한 反面 칼뱅 은 自身의 神學 의 原理로서 聖經 을 唯一한 原理로 본다( 라틴語 : scriptura est unicum principium theologiae ). 그는 참된 神學 의 길은 聖經 乙 아는 것이리고 한다. 칼뱅 하나님 聖靈 으로부터 어떤 有益이나 恩惠를 받기위하여 聖經 읽기를 勸한다. 칼뱅 이 强調하는 것은 思想의 根源的인 原理 聖經 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에 對한 確實한 規則(regula)을 聖經 에서 찾는 것, 마음속의 생각과 입에서 나오는 말이 聖經 과 一致해야 하는 것을 主張한다.

聖經의 權威 [ 編輯 ]

宗敎改革者들에 있어서 權威는 敎會와 司祭 그리고 敎皇에 反對한 聖經이었다. 에벨링은 宗敎改革의 貴重한 遺産으로 sola scriptura을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聖經의 權威는 새로운 歷史를 變化시키는 貴重한 道具였다. 칼뱅은 聖經의 權威를 尊貴히 여기며 받아들이도록 우리의 마음을 準備해야 한다고 한다. 聖經은 하늘로부터 祈願했다라고 看做해야 한다고 한다. 거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名譽를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聖言이 每日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眞理를 永遠히 保存하는 것이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가서는 안되는 根本的 神學的 根據는 우리가 가진 制限된 知識뿐만 아니라 腐敗된 理性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가려는 驕慢으로 인해 참된 하나님의 敎訓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칼뱅은 우리가 말씀의 限界를 넘는 瞬間 바른 길을 벗어나 暗黑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며, 거기서 반드시 헤매며 미끄러져 넘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는 것 以外의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길 없는 荒野를 걸어가려는 것이거나(욥 12:24 參照), 또는 어두운 데서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 못지않게 어리석은 것이라고 한다.

聖經 의 열쇠로서 基督敎 强要 [ 編輯 ]

칼뱅의 名作 基督敎綱要는 三位 하나님을 아는 聖經의 열쇠였으며, 聖經을 가리켜 주는 칼뱅의 집게 손가락이었다. [12] 어찌보면 强要에서 있어서 聖經의 수많은 使用이 칼뱅을 聖經의 神學者로서 尊敬받게 하였다. 聖經은 칼뱅에게 있어서 그의 神學의 出發點이며 또한 神學이 窮極的으로 따라야 할 모델이 되기도 한다. 그는 모든 問題를 聖經에서 始作하여 聖經의 例를 찾았으며, 聖經이 要求하는 方式대로 聖經이 意圖하는 가르침을 純粹하게 探究하였고 聖經이 멈추는 곳에서 自身의 限界를 알고 謙遜하게 떨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聖經의 神學者로 부른다. 聖經은 그의 神學의 土臺에 있어서, 神學의 方法에 있어서, 基督敎의 모든 問題에 對한 窮極的 判斷에 있어서 唯一한 最高의 權威로서 받아드려 졌다. 칼뱅은 우리가 하나님에 對한 모든 것을 探究할 때에 注意 말씀만이 우리를 引導할 수 있는 唯一한 길이며, 우리가 주께 對하여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려고 할 때에 우리의 눈을 비추어 주는 唯一한 빛은 오직 主의 말씀뿐이라는 事實을 알아야 한다고 主張한다.

하나님을 아는 手段으로서 聖經 [ 編輯 ]

聖經은 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手段이며 規則이 되기 때문이다. 聖經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늘 敎訓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子女들을 가르치는 學校라고 한다. 聖經은 必要하고 有益한 知識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同時에 有益한 知識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聖靈의 學校라고 한다. 칼뱅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順從하는 聖經의 弟子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는 人間들이 하늘이나 땅에 보여진 自然 啓示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말씀을 가리켜 하나님의 子女들을 가르치는 學校로 삼으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百姓들은 聖經의 學生으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順從하며 敬畏하게 된다고 한다. 칼뱅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聖經의 弟子가 되지 아니하면 참되고 健全한 敎理를 조금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칼뱅은 聖靈은 우리의 內的 敎師라고 말한다. 우리는 聖靈을 우리의 敎師로 모시면서, 하나님의 子女의 學校인 聖經 안에서, 聖靈의 弟子가 되며 聖經의 弟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칼뱅에 依하면 聖經은 眼鏡의 役割처럼 創造主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에 對한 知識을 提供해 주며, 어리석음을 除하여 주고, 참 하나님을 보여 준다고 한다. 腐敗한 우리 人間의 마음은 그 軟弱함으로 인해서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움이 없는 限 到底히 하나님께 다가올 수가 없다고 한다.

聖經의 中心인 예수 그리스도 [ 編輯 ]

또한 聖經은 우리로 하여금 救援者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 주는 冊이다. 聖經은 그리스도를 仲保者로 삼는 信仰과 悔改의 特殊한 敎理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한다. 요한福音 5張 39節의 主席에서 칼뱅은 그리스도에 對한 知識은 聖經 以外에 알 수 없다고 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發見할 明確한 目的을 가지고 聖經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聖經과 神學探究 [ 編輯 ]

칼뱅은 神學은 探究하는 者의 義務는 귀를 즐겁게 하는 者가 아니며, 眞實하며, 確實하고 有益한 것을 가르침으로써 우리의 良心을 强化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며, 聖靈님에 依해 引導함을 받는자이다. 聖靈께서 우리에게 聖經 속에 하나님의 威嚴이라는 確實한 能力이 살아서 呼吸하고 있는 느끼게 하고, 바로 이 힘에 依해서 우리는 意識的으로 또 自發的으로 이끌리고 刺戟되어 하나님께 順從하되, 어떤 人間의 意志나 知識에 依한 것보다 더 생생하고 더 效果的으로 하나님께 順從하게 된다고 한다.


聖經과 解釋

解釋學的인 特徵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中世 4中的 解釋을 拒否함, 루터의 解釋에서도 알레고的 解釋이 誤用됨

칼빈은 聖經의 敎師로서 말씀의 解釋者로 使命

에벨링, 베스마르와 같은 神學者들은 神學은 聖經解釋의 歷史라고 한다.

* 聖經은 聖經으로 解釋(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聖經의 權威와 明瞭性에서 나왔다. 그가 使用한 聖經的 解釋原理는 簡潔性과 容易性 에서 絶頂에 이른다.

쯔빙글리와 칼빈, 불링거. 웨스트민스터 信仰 告白書 等.


*歷史的 文法的 解釋

聖經 本文에서 聖經 著者의 元來의 意圖된 意味를 發見하기 위하여 聖經本文의 記錄된 時代的 背景과, 本文의 文法的 構造를 살펴서 解釋하는 方法이다. 中世의 4中的解釋을 斷絶하고 에라무스가 最初로 本文批評을 試圖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影響을 받고 로마書, 詩篇, 히브리서의 强해를 칼빈은 더욱더 細密하게 本文의 이 方式으로 解釋하였다.


* 聖靈의 內的 照明(testimonium spirtus sancti internum)

聖靈의 歷史를 말씀함께 强調한다. 聖靈님의 活動하실수 있는 餘地 남겨야 한다. 그 렇지 않으면 文字的이고 敎理的이 될수 있다.(하워드 L. 라이스, 改革主義 靈性, 129)

말씀은 客觀的 要素를 供給하고 聖靈은 主觀的 要素를 供給한다.

解釋에 있어서 聖靈의 照明을 통한 解釋을 主張한다. 聖靈님은 우리에게 말씀의 意味와 生命力을 供給하신다.

聖經과 韓國敎會 [ 編輯 ]

한 世紀가 막 지난 韓國敎會가 이제 무너지기 始作하고 있는 이 時點에서 最近 韓國敎會가 世俗化를 벗어나 聖經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宣言하고 이런 方向으로 硏究가 進行되는 것은 하나의 所重한 希望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韓國敎會가 가는 길의 燈불이요, 聖經 말씀은 韓國 社會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새로운 地平을 열어주는 햇빛이다. 칼뱅이 우리에게 주는 敎訓은 聖經을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音聲으로 듣고, 順從하며, 칼뱅이 使用했던 聖經的 原理들에 기초하여 우리의 神學의 原理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聖經없는 칼뱅은 存在하지 않으며, 聖經에 對한 尊重을 말하지 않은 칼뱅은 存在하지 않는다.

하나님 [ 編輯 ]

칼뱅學者 신복윤 에 따르면 칼뱅은 三位一體 하나님 中心의 神學을 徹底하게 準行하였다고 한다. [13] 칼뱅은 『基督敎 强要』 1卷에서 三位一體 하나님의 創造와 攝理를 말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聖經을 떠나서 다만 宇宙와 人間 自身을 통해서도 人間이 創造主 하나님을 어느 程度 알 수 있다고 主張한다. 칼뱅은 神意識 卽 人間이 神(神)李 存在한다는 意識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自然的으로 주어져서 骨髓에까지 깊이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人間은 自然啓示에 依해서만은 救援을 얻는 新(神)知識이나 救援의 信仰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宇宙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에 새겨진 그의 形象으로 充分치 못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의 도움을 마련해 주셨다”고 한다. 칼뱅은 創造主 하나님이 創造物을 통해서 하나님의 人者, 선, 自費, 共의, 審判, 眞理가 列擧되고 있다고 하며, 特히 慈悲와 審判과 公義를 强調한다. 慈悲는 人間의 모든 救援은 하나님의 慈悲에 달려 있으며, 審判은 惡을 行하는 者들에게 날마다 施行되며, 공醫로서 信者들이 保存되며 가장 자애롭게 養育된다고 말한다. 칼뱅은 하나님에 對한 信仰, 사랑, 敬虔이 바로 참다운 神認識의 內容을 構築한다. 그는 敬畏와 사랑의 結合된 敬畏心을 ‘敬虔’이라 부르는데 “李 敬畏와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恩惠를 생각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고 말한다. 칼뱅은 三位一體에 對해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唯一하고 單一하신 本體를 理解하고, 이 本體 안에 세 位格 或은 人格이 存在한다는 것을 理解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聖父, 聖子, 聖靈을 가리키는 것이며 聖子께서 聖父와 結合된 곳에서 聖父와 聖者 사이의 關係가 이루어지므로 位格 사이를 區別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攝理는 過去뿐만 아니라 未來에도 關係한다. 萬物 안에 있는 決定的 原理가 하나님의 攝理에 依해서 움직여지지만,이 하나님의 攝理는 때로는 媒介者를 통하여 때로는 媒介者 없이(奇跡或은 移籍) 그리고 때로는 모든 媒介者에 逆行하여 일어난다. 칼뱅은 하나님의 攝理가 人類 全體 위에 나타나지만 그의 敎會를 위해서는 특별하다고 力說한다. 하나님의 全能하신 能力과 恒常 存在하는 能力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保存하신다. 마치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붙들고 계시는 것처럼 이 하나님의 손길에 依하여 나무, 풀, 飮食, 健康과 病, 富와 가난 等 모든 事件을 統治하시고, 保存하시고, 協力하시는 使役 卽 燮理하신다고 한다. [14]

칼뱅의 三位一體論 [ 編輯 ]

최윤배博士의 글을 紹介한다. 칼뱅의 '基督敎 强要' 最終판(1559)의 第1卷 '創造主에 對한 認識'에는 그의 神論이 展開된다. 基督敎 强要의 第1卷은 18章으로 構成돼 있다. 칼뱅은 第1章부터 12張까지는 神 認識論과 啓示論은, 第13章은 三位一體論을, 第14張과 15章은 創造論을, 第16章부터 18張까지는 攝理論을 取扱하고 있다. 特히 칼뱅은 第1卷 第13張의 題目을 "우리는 세 位格들을 包含하고 있는 하나님의 한 本體가 있다는 事實을 聖經 속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로 붙였다. 三位一體論을 本格的으로 論議하기 前에 칼뱅은 먼저 聖經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重要한 두 가지 本質로서 하나님의 無限性과 靈性을 特別히 强調하면서 하나님의 不可解性 및 超越成果 內在性을 言及하는 가운데, 汎神論, 摩尼敎의 二元論, 神人同形동성론을 批判하고, 聖經에 나타난 하나님의 啓示方法으로서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適應 思想을 紹介한다. 칼뱅이 三位一體論은 反三位一體論者들, 特히 세르베투스를 통해서 發展됐지만 그의 三位一體論은 根本的으로 그의 初期부터 末期까지 一貫性을 維持하고 있다. 그는 初期에는 三位一體論의 神學 用語를 中心으로 까롤리와 論爭했고, 그의 後期에는 主로 세르베투스와의 論爭을 통해서 어느 宗敎改革者들보다도 三位一體論에 더 많은 關心을 가졌다. 칼뱅은 올바른 古代敎會의 傳統과 聖經을 根據로 三位一體 하나님의 한 本質, 歲 인(위)격들을 主張한다. 칼뱅은 "내가 人(危)格(persona)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本質(essentia) 안의 實在를 意味한다. 그것은 다른 實在와 關係를 가지고 있는 同時에 傳達할 수 없는 固有性을 통해서 區別된다"고 말한다. 또한 칼뱅은 各 人(危)格, 곧 實在(subsistentia)가 갖고 있는 固有性의 內容에 對해 "그럼에도 不拘하고 聖經에 表現되어 있는 그 區別에 對해 默過하는 것은 穩當치 못하다. 聖經이 말하는 區別은 다음과 같다. 곧, 聖父는 일의 始初가 되시고 萬物의 基礎와 源泉이 되시며, 聖者는 智慧요 計劃이시며 萬物을 秩序 있게 配列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聖靈은 그와 같은 모든 行動의 能力과 效力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고 했다. 結局 칼뱅의 境遇, 聖父와 聖者, 聖靈 各各의 人(危)格은 하나님의 本質과 함께 다른 人(危)格이 갖고 있지 않고, 다른 人(危)格에게 讓渡할 수 없는 自身의 '唯一한 固有性'을 갖고 있다. 칼뱅은 三位一體의 三衛星을 無視하거나 희생시킨 社벨리우스를 中心韓 樣態論을 批判할 뿐만 아니라 三位一體의 一體性을 無視하거나 희생시킨 아리우스를 비롯한 從屬論을 批判했다. 그는 三位一體의 一體性을 確保하기 위해 하나님의 한 本質을 剛하게 主張하고, 聖父와 聖者, 聖靈 各 人(危)格에 共通的으로 神聖과 自存性을 附與하고, '本質授與者'(essentiator) 되심을 認定하고, "한 하나님과 한 信仰과 한 洗禮의 세 가지"를 信仰經驗과 敎會예전 次元에서 相互 因果的으로 關係시킴으로써 三身論이나 從屬論을 反對할 수 있었다.

同時에 칼뱅은 三位一體의 三衛星을 確保하기 위해 다른 人(危)格에도 讓渡할 수 없고, 各 人(危)格만이 갖는 固有性을 통해서 差別化되는 三衛의 區別性을 强調함으로써 樣態論을 反駁할 수 있었다.

박경수 博士(장신대)는 칼뱅의 '關係의 三位一體論'에 對해 深度 있게 論證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칼뱅은 三衛의 區別과 相互 關係에 集中하기 前에 먼저 聖者와 聖靈의 神聖을 證明하고자 한다. 칼뱅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位格과 使役을 통해 그리스도의 神聖을 論證한 뒤, 곧 이어서 聖靈의 使役과 位格을 통해 聖靈의 神聖을 證明한다.

칼뱅은 聖父와 聖者와 聖靈 사이의 關係에서는 '確實한 區別', 卽 "區別이지, 分離가 아니다"라는 事實을 분명하게 主張한다. 칼뱅은 아들이 아버지와 區別되며, 또한 아들이 聖靈과 區別됨을 聖經 句節들을 통해 論證한다.

칼뱅은 三位 사이의 區別을 所謂 三位一體의 痕跡을 통해서 證明하려는 어떤 '存在類比'의 試圖도 全的으로 拒否하면서도 聖經이 啓示하고 있는 三位 사이의 區別을 默過하는 것은 올바른 姿勢가 아니라고 말한다. 칼뱅에 依하면 本質이 아니라 秩序와 經綸의 觀點에서 三位 間의 順序의 差異에 對한 說明은 意味가 있고 必要한 것이다.

칼뱅은 "왜냐하면 各 人間의 마음은 아버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그로부터 나온 智慧를, 다음에 그 計劃의 作定을 遂行하시는 能力에 對해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理由로 아들은 오직 아버지로부터만 나오고, 영(聖靈)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同時에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칼뱅은 三位 間의 區別은 하나님의 一體性과 矛盾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一體性을 證明한다. 그는 三位成果 一體性의 密接한 關係를 더욱 强調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이 말을 直接 引用한다. 칼뱅은 "그리스도는 自身과의 關係에서 하나님으로 불리시고, 아버지와의 關係에서 아들로 불리신다. 또한 아버지는 自身과의 關係에서 하나님으로 불리시고, 아들과의 關게에서 아버지로 불리신다. 그가 아들과의 關係에서 아버지로 不利市는 限, 그는 아들이 아니시며, 그가 아버지와의 關係에서 아들로 不利市는 限, 그는 아버지가 아니시다. 그가 自身과의 關係에서 아버지로 불리시고, 그리고 그가 自身과의 關係에서 아들로 不利市는 限, 그는 同一한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한다.

칼뱅의 三位一體論, 特히 關係的 三位一體論은 21世紀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側面에서 우리에게 有益하다. 첫째, 칼뱅의 三位一體論은 聖書註釋敵으로 우리에게 有益하다. 그는 이미 基督敎 强要(1536) 初版에서 三位一體論의 根據가 聖經에 分明히 있다고 主張한다. 그는 "이스라엘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라고 말했다. 聖經이 아버지가 하나님이시고, 아들이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聖靈이 하나님이시라고 主張할 때, 同一한 聖經이 어떤 不明瞭한 主張도 하고 있지 않다"고 主張한다.

둘째, 칼뱅의 三位一體論은 敎會史的으로 그리고 敎會聯合敵으로 우리에게 有益하다. 비록 칼뱅은 古代 敎父들의 主張들과 고대 에큐메니칼 新潮들조차도 聖經註釋적 觀點에서 批評的으로 考察했지만 古代 敎父들의 主張들과 에큐메니칼 新潮들이 聖經에 一致하는 限, 古代 敎會 傳統들을 尊重하고 발전시켰으며, 特別히 西方敎會 交付의 文獻이나 東方 交付의 文獻을 偏食하지 않고, 共히 受容함으로써 에큐메니칼 精神을 發揮했다.

셋째, 칼뱅의 三位一體論은 敎會論的으로 우리에게 有益하다. 칼뱅은 三位一體 하나님과 敎會의 믿음과 敎會의 洗禮를 密接하게 결부시킨다. 칼뱅은 "우리는 오직 한 가지 證據만을 提示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千 가지와 同一하다. 바울은 하나님과 믿음과 洗禮, 이 세 가지를 密接하게 連結시킴으로써 이 하나로부터 다른 것으로 推論해 갈 수 있게 한다(엡 4張). 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事實로부터 하나님도 한 분이라는 것을 證明할 수 있고, 洗禮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 事實은 믿음이 하나인 것을 보여준다"고 强調했다. 基督敎 歷史에서 洗禮의 實踐이 中斷된 적은 없을 것이다. 洗禮는 敎會에서 聖父, 聖子, 聖靈의 이름으로 베풀어져왔고, 베풀어지고 있다.

넷째, 칼뱅의 三位一體論은 救援論的으로 우리에게 有益하다. 박경수 博士는 "칼뱅에게 있어서 三位一體 敎理는 思索을 위한 理論이 아니라 救援과 直接的으로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重要했다... 그에게 있어서 三位一體 敎理는 救援과 그리스도人의 삶과 聯關된 實踐的 敎理였다"고 主張했다.

다섯째, 칼뱅의 三位一體論은 무엇보다도 社會的, 共同體的 有益을 우리에게 준다. 最近 몰트만을 비롯해 '社會的 三位一體論'에 對한 論議는 이미 普遍化된 狀況이다. 오늘날 特別히 다양하고도 複雜한 社會的, 共同體的 關係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人間과 人間 사이 關係, 人間과 다른 被造物들 사이의 關係 속에서 葛藤과 不和와 不通과 抑壓, 從屬이 더욱 深化되고 있다. 一體性이 없는 多樣性은 相互 分裂을 招來할 수 있고, 多樣性이 없는 一體性은 劃一主義로 轉落할 수 있다.

이 두 境遇에 人格的인 關係나 交際나 疏通이 잘 이루어질 수 없다. 三位와 一切로 계시는 하나님은 三位 間에 가장 人格的인 交際와 疏通의 關係를 가지신다. 三衛의 關係 속에 계시는 하나님은 모든 被造物들과의 關係를 維持하시기를 願하신다. 關係的 三位一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人과 敎會는 하나님과 被造物의 關係, 그리고 被造物과 被造物 사이의 關係, 特別히 敎會 안에서의 聖徒의 交際를 促進시켜야 할 큰 使命에로 부름을 받고 있다. [15]

創造論과 攝理론 [ 編輯 ]

그의 基督敎 强要에 하나님의 攝理에 對한 見解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能力에 依해서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世界를 保存하시고 引導하시며, 그의 攝理에 依해서 個人的인 모든것들을 다스리신다." [16] ; [17] "人間은 왜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行動을 하시는지 完全하게 理解하지 못한다. 人間이 行動하는 線이나 惡이나 人間의 努力은 結果的으로 하나님의 意志와 判斷을 하시게 한다." [18] 박해경 博士의 글을 紹介한다. 칼뱅은 그의 神論이라 할 수 있는 基督敎綱要 1卷에서 別途의 神的作定론(Doctrine of Divine Decrees)이나 豫定論(Predestination)을 다루지 않는다. 豫定論은 오히려 救援論人 3卷에서 後半部(III. 21-24)에서 論하였고, 作定論은 獨立的인 部分으로 論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絶對的 意志와 主權을 믿는 信仰的 背景을 통해서 各 論述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른스트 트뢸취(E. Troeltsch)는 칼뱅이 하나님의 特性을 絶對的 主權的 意志로 表現하려고 努力했다고 보았고 이것은 하나님의 主權的 攝理에 對한 典型的인 하나님 中心的 解釋이다. 헌터(Hunter) 亦是 칼뱅에게 있어서는 모든 敎理가 新論 위에 建設되었으며, 칼뱅의 思想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 對한 생각으로 支配된다고 主張하였다. 하나님의 線河心과 智慧와 全能河心은 그의 神學의 先決條件이었다. 칼뱅의 中心 思想은 하나님의 主權에 對한 神學이라고 헌터는 斷定한다. 하나님의 絶對的인 意志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칼뱅이 그의 모든 神學 領域에 適用시키는 原理라는 것이다. 여기에 기초하여 헌터는 칼뱅이 豫定論과 攝理論을 처음에는 묶어서 取扱했으며(강요의 初版과 2版에서) 나중에 別途로 다루었으나 兩者가 하나님의 主權敎理에 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豫定論은 個個人 人間의 窮極的 運命에 對한 하나님과의 關聯性을 다루는 것이며, 攝理論은 只今 여기서 人間에 對한 하나님의 處分에 關하여 다루는 敎理라고 한다. 그것은 神的作定(Divine Decrees)의 經驗的 次元이다. 攝理는 하나님과 世界의 關係를 더 詳細하게 取扱하며, 豫定이 永遠한 運命에 焦點을 두나 攝理는 永遠한 作定과 最後의 審判까지의 모든 事件들의 聯關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과 그것들의 連繫性까지도 살핀다. 하나님은 일어날 모든 일을 다 아시며, 그의 目的에 符合하도록 이런 일들이 發生하도록 하시며 그의 目的대로 되도록 引導하신다. 但只 미리 보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決定하신 것이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그가 定하셨기 때문에 그는 미리 아시는 것이다. 모든 事件, 事故(생각), 感情, 感動까지도 直接的으로 하나님의 意志에 歸着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攝理는 絶對的인 하나님의 主權과 그의 作定의 敎理에서 나오는 派生的 敎理라고 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 中心的 解釋은 合當한 것이며, 大多數의 正統神學者들도 그렇게 理解하고 있다. 그런데 現代神學에 와서 하나님의 主權이나 豫定과 神的作定을 無視하고 人間의 意志와 自律性을 强調하여 正統 칼뱅주의 神學을 敬遠하면서 이로부터 떠나는 事例가 많아지고 있다. 칼뱅을 批判하는 많은 學者들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見解에 同調하여 칼뱅의 하나님은 비록 사랑과 公義에 對한 觀念을 保存하려고 하는 試圖는 하고 있으나 事實은 사랑이나 公義가 全혀 없는 暴君의 모습만이 나타나고 있다고 非難한다. 그래서 攝理論에 對해서도 하나님 中心的이 아닌 새로운 解釋들이 많이 나타났다. 니이젤은 그리스도 및 敎會 中心的으로 解釋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 自身에 依해 萬物을 統治하시고, 이 世上에서 敎會를 指導하고 維持하기 원하여서 自然과 歷史의 運行을 引導하신다는 것이다. 그에 依하면 칼뱅의 攝理論에서 敎會는 참으로 하나님의 攝理의 實際的 對象이다. 이 論題 속에서 創造와 攝理에 對한 칼뱅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啓示에 集中되어 있음이 分明히 認識된다. 敎會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니이젤은 바르트의 影響을 받아서 攝理論도 基督論敵으로 또한 啓示論的으로 理解하려고 하였다. 바빙크(Herman Bavinck)는 徹底한 칼뱅주의者이면서도 特別攝理 보다는 一般攝理를 많이 强調하였고, 챨스 파티(C. Partee)는 칼뱅의 주된 關心이 特別攝理라고 하였으며, 부스마(W. Bousma)는 칼뱅이 스콜라的 迷路와 人文主義的 深淵을 同時에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攝理를 主張했다고 한다. 한便 都尉(Dowey)는 칼뱅의 攝理論을 다루는 冊은 아니었으나 그의 新知識論에서 칼뱅이 信仰으로부터 豫定을 보고 豫定으로부터 攝理를 보았다고 主張하였다. 파커(Parker)는 칼뱅의 攝理 槪念에서 神的 原因과 地上的 結果 사이의 關係에 對한 形而上學的 問題들에 關心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最近에 슈라이너(Schreiner)는 攝理論을 보다 詳細하게 硏究하였는데, 거기서 그女는 步下텍(J. Bohatec) 以前의 學者들은 칼뱅의 攝理論을 칼뱅의 全體 體系 속에서만 다루었지 다른 敎理들과 別途로 取扱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슈라이너는 步下텍이 豫定論은 칼뱅의 中心 敎理이지만 敎理의 出發點은 아니라고 했다는 事實에 着眼한다. 步下텍에 依하면 攝理 敎理는 “뿌리와 같은 敎理”(Stammlehre)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우리가 豫定, 律法, 그리스도의 使役, 恩惠의 手段에 對한 前提들을 發見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슈라이너는 攝理論을 豫定이나 그리스도의 使役이라는 觀點이 아니라 創造의 觀點에서 볼 때 그것을 根本 敎理로서 생각할 수 있다고 主張한다. 그女의 冊에서 칼뱅의 神學을 지나치게 創造에 執着하여 論하는 傾向을 많이 볼 수 있다. 파커가 拘束者로서의 知識에 偏重하였다면 슈라이너는 創造自體의 重要性에 對한 知識에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攝理論을 칼뱅 自身이 重要하게 論한 것은 그의 敎理 敍述 方式의 하나인 敎理의 信仰的 有益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妥當한 見解가 아닌가 생각한다. 豫定論과 마찬가지로 칼뱅은 敎理가 가지고 있는 內容的인 重要性과 더불어 그 敎理가 附與하는 靈的, 信仰的 有益과 敎會의 敎化를 위한 牧會的 配慮에 더 많은 關心을 두었다고 보는 것이 以上에서 論한 여러 學者들의 主張에서 提示되지 못한 重要한 要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中心的 解釋과 그러한 신본주의 “信仰”을 일으키기 위한 敎理로서 解釋하는 攝理론이라야 칼뱅 神學에 對한 올바른 見解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創造와 攝理를 하나의 敎理로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 必要하다. 두 敎理는 區別은 되나 分離되어서는 안 된다. 칼뱅은 그의 攝理論을 展開할 때에 過去의 神學者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無에서”(ex nihilo) 創造하셨으며, 創造한 世上을 그의 能力으로 保存하시고, 個個의 被造物을 다스린다고 한다. 하나님은 瞬間的으로 創造 使役을 마쳐버리시고 쉬는 분이 아니다. 칼뱅에 依하면 하나님의 創造와 攝理는 不可分離的으로 묶여 있다. 칼뱅은 그의 攝理論을 말하기 始作하는 그 첫 페이지 題目 部分부터 創造와 攝理를 하나로 묶어서 論하고 있다. “하나님은 自身이 創造하신 世上을 그의 攝理로서 돌보시고, 保護하시며 各 部分들을 다스리신다.”(Deum sua virtute mundum a se conditum fovere ac tueri, et singulas eius partes sua providentia regere). 그리고 本文의 처음部分에서도 다시 强調한다. 萬若 하나님이 創造 使役을 單番에 完成하신 瞬間的인 創造者(mometaneum creatorem)라면 그런 생각은 차갑고 荒凉한 생각일 것이며, 우리는 特히 宇宙의 始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繼續的인 狀態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權能의 顯現이 빛나고 있음을 보고 있다는 點에서 속된 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칼뱅은 攝理論을 말하면서 理性과 信仰의 明白한 差異를 指摘한다. 理性은 기껏해야 創造 自體에서 머물고 만다는 것이다. 불경한 者들도 땅과 하늘을 바라봄으로써 그들의 마음(知性)을 創造者께로 들어 올릴 수밖에 없으나 信仰은 이보다 더 깊이 나아간다. 肉體的 感覺은 하나님의 創造에 나타난 그의 權能에 부딪히면 거기에 멈출 뿐이다. 기껏해야 創造者의 智慧와 能力과 線河心을 熟考하고 冥想할 뿐이다. 그것은 運動力의 根源이 되는 어떤 一般的인 保存과 支配의 活動力만을 생각한다. 하나님과 그의 손길이 아니라 그 에너지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信仰은 이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創造者로서 뿐만 아니라 永遠한 統治者이며, 保存者라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卽 하나님은 創造者이면서 同時에 攝理者로서 “하늘의 體系”(或은 具體, Orbis machinam, 世界의 構造=mundi machina)뿐 아니라 그것의 여러 部分들을 宇宙的인 運動에 따라서 움직이게 하시고, 그가 만드신 모든 것은 가장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保存하시고, 養育하시며, 돌보신다는 點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칼뱅은 時 33:6과 13을 連結해서 創造와 攝理의 하나되는 連結고리를 다윗의 입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眞理로 理解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萬象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監察下士 모든 人生을 보심이여.” 이 두 句節을 묶어서 생각하여 본다면 하나님이 世界의 創造者이시므로 世上 萬事를 돌보신다는 것이 可能하고, 하나님이 그의 被造物을 돌보시기 때문에 世界가 하나님에 依하여 創造되었다는 事實에 首肯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要컨대 攝理論에서 우리가 반드시 留意해서 알아두어야 할 事項은 創造에서 멈추는 者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恩寵을 알려주는 그 특별하신 돌보심을 全혀 맛보지 못한 者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理神論(理神論)은 하나님의 創造에서 멈추는 思想이기에 排斥되어야 하고, 웨슬레가 말한 바와 같이 宗敎的 狀態에 있어서 가장 나쁠 수도 있다. 우리의 信仰에 있어서 聖經的인 바른 觀點을 確立하기 위해서 創造者와 攝理者를 한 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必要하다. 創造者와 拘束者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듯 創造者와 攝理者度 한 분이시다. 그런 意味에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라고 하는 뜻이 더 確實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그의 創造使役, 攝理使役, 拘束使役, 審判使役이 모두 하나의 作定에서 나오고, 하나의 意志에서 나왔으며, 한 분 하나님의 智慧와 能力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는 “하나의 信仰”李 우리에게 要求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人間論 [ 編輯 ]

基督敎綱要 1卷 5章에서 칼뱅은 人間은 그가 가진 宗敎性으로 인해 하나님을 追求하게 되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形象 을 가졌던 人間은 完全히 墮落하였으므로 하나님을 바르게 찾아갈 수 없으며, 오히려 人間 스스로의 無知로 인해 온갖 偶像과 迷信을 考案해내고 있다. 하나님으로 인해 創造된 萬物이 하나님의 榮光을 드러냄에도 不拘하고 人間은 이를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認識할 수 있는 理性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墮落한 人間의 모습인 것이다. 칼뱅은 人間이 墮落으로 인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强調하였다. 人間 存在의 悲慘함을 깊이 認識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恩惠를 求하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19] 人間은 罪의 影響으로 自由意志 는 참된 善을 行할 수 없다고 한다. 聖靈의 歷史로 回心한 거듭난 人間은 하나님과 바른 삶을 살아가는 存在라고 한다. 칼뱅의 人間을 하나님과 關係에서 보면서 全的으로 腐敗人間 그리고 罪로 인한 舊怨에서의 自由意志의 喪失 그리고 救援은 하나님의 恩寵에 依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20]

基督論 [ 編輯 ]

그리스도의 人格과 使役에 對한 칼뱅의 槪念은 創造와 救援社에서 하나님의 自己 啓示, 예수 그리스도의 自己 暴露,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自身을 아는 知識에 依해 形成되었다. 律法과 福音 안에서 예수께서 自己 啓示를 드러낸 것은 오직 우리가 罪人이라는 것을 아는 知識과 關聯되어서 理解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三重職을 칼뱅은 强調한다. [21] 박해경 博士는 다음과 같이 說明한다. 基督論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硏究하는 敎理學의 한 分科이다. 正統 基督敎 敎理學에서는 共同新潮, 卽 사도新潮, 니케아 新潮, 아다나視우스 新潮, 칼케돈 信條 等을 爲始하여 웨스트민스터 新潮, 스코틀랜드 新潮, 벨職 新潮, 하이델베르크 要理問答 等에 告白된 基督論의 結論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近代 以後 自由主義 神學이 登場하면서부터 敎理學은 正統信仰의 內容들이 否定되고 威脅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基督論이 가장 큰 打擊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古代로부터 이미 基督論의 異端들이 많았는데, 人間의 理性을 啓示보다 優位에 두는 自由主義 神學이 得勢하던 18世紀 말과 19世紀에서는 本格的으로 그리스도의 神聖과 선재 및 成肉身 復活 昇天 再臨 等의 敎理를 否認하는 일이 흔해지게 되었다.

가장 有名한 境遇가 바로 알버트 슈바이처(A. Schweitzer)가 主張한 所謂 '徹底終末論'에서 核心으로 提示되는 바 精神錯亂에 빠진 예수 그리스도를 描寫하고 있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예수그리스도가 스스로 메시야라고 믿고, 自身이 죽어야 하나님 나라와 終末이 이루어지리라고 錯覺하여 故意的으로 祭祀場들을 衝動시켜 죽음을 自招했다는 主張을 하였다.

以外에도 쉴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나 리츨(A. Ritschl). 下르樂(A. Harnack) 等도 正統基督論을 否認하고 저들 나름대로의 새 基督論을 세웠으며, 20世紀에 이르러 바르트(K. Barth), 부르너(E. Brunner) 等도 歷史的 新潮들을 否認하는 새로운 基督論을 主張하였다. 바르트는 모든 敎理를 그리스도로 統一하였고, 그리스도를 神認識의 唯一한 手段으로 보는 啓示神學을 主張했으나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하나의 認識通路로서의 神學槪念이지 살아계신 그리스도라고 하기는 어렵다. 부르너는 더 溫乾하지만 그리스도의 成肉身을 否認함으로써 決定的인 誤謬를 드러내고 말았다. 現代神學에 와서는 이보다 더 過激한 自由主義 基督論들이 많아서 一一이 列擧할 수 없고, 이러한 잘못된 基督論은 西洋 敎會를 衰退하게 만들고, 信仰을 무너뜨리는 役割을 하였음을 分明히 指摘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正統 神學을 세우고, 敎會를 살리며, 信者들의 信仰을 强化하는데 있어서 칼뱅의 基督論을 살펴보는 일은 대단히 重要하다고 본다.

칼뱅은 歷史的 正統敎會가 告白하여 온 新潮들의 結論을 그대로 받고, 또한 어거스틴을 비롯한 敎父들의 神學을 尊重하면서 보다 더 聖經的으로 卓越한 基督論을 세웠다. 그의 主著인 '基督敎綱要'에 보면 제2권에서 基督論을 다루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위激論(12-14張), 職務론(15張), 狀態론(16-17장) 順序로 取扱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關하여 敍述하기 前에 먼저 人間의 罪問題(1-5張)를 深刻하게 敍述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新舊約의 一致點과 差異點(10-11張) 및 律法과 十誡命(7-9章)을 論하면서 墮落한 人間은 그리스도 안에서 拘束을 論해야 한다고(6장) 强調하고, 聖經의 目的은 그리스도를 믿어 永生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요한福音 20張 30節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元來 基督敎綱要 自體가 사도信條의 틀을 가지고 構成되어 있으며, 基督敎의 本質인 '예수 믿고 永生'이라는 單純明快한 眞理를 보다 더 仔細하고 힘있게 說明하여 讀者들로 하여금 聖經을 理解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目的을 가지고 있음을 칼뱅 自身이 말하고 있다('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 그러므로 칼뱅의 基督論은 基督敎 正統信仰 그 自體라고 할 수 있고, 福音의 本質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人格과 身分과 職務를 聖經에 充實하게 敍述한 敎理라고 해야 할 것이다.

칼뱅의 基督論은 크게 세 部分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위激論(Person), 職務론(Office), 그리고 身分論(狀態론, States)이다. 이것을 簡單하게 考察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위激論에 있어서 칼뱅은 그리스도의 先在하심과 하나님의 永遠한 아들로서 오신 것을 분명하게 主張한다. 이것을 神學에서는 '위로부터의 基督論'이라고 부른다. 暫時 言及했던 自由主義 神學은 所謂 '아래로부터의 基督論'을 主張한다. 그것은 人間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出發하며, 그리스도의 神聖을 前提하지 않는다. 그들은 主張하기를 '위로부터의 基督論'은 그리스도의 神聖을 前提下니 틀렸고, 人間이신 그리스도로부터 始作해야 人間의 認識原理에 맞는데 그렇지 못하니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神聖을 前提하고, 그분이 永遠하신 로고스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칼뱅은 이 點에서 明快하다. 그리스도는 元來 하나님이신데,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이 內容을 敎理的으로 描寫하면 한 人格(神格^神格, Divine Person)이신 그리스도가 두 本性(本性, Natures)을 取하신 것으로 理解한다. 다시 말해서 '한 人格(One Person)'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成肉身을 통해서 神聖과 人性을 가지시는 '두 本性(Two Natures)'의 仲保者가 되신 것을 말한다. 이것이 칼케돈 信條의 結論이고 正統解釋이다. 여기서 神聖을 否認하면 아리우스(Arius) 異端이 되고, 人性을 否認하면 靈智主義(Gnosticism)異端이 된다.

칼뱅의 職務論은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의 3重職分(Munus Triplex Christi)을 말한다. 칼뱅은 이 敎理를 最初로 體系化하였다. 先知者로서 그리스도는 敎師의 職務를 하시며, 그의 몸된 敎會까지 이 職分을 주셨다. 여기서 만인 先知者職이 나온다. 王으로서는 말씀과 聖靈으로 다스리시는 福音傳播의 職務를 말하는데, 이 職務로써 그리스도는 그의 나라를 擴大하시며, 그의 福音을 '홀'(Scepter)로 삼아 地上의 社譯者들에게 靈的인 王權을 주셨다. 祭司長으로서는 罪 謝函과 중보祈禱의 使役을 하신다. 特히 하늘에서 只今도 繼續的으로 이 三職을 하시는 것이 重要하다.

칼뱅의 身分論(狀態론)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成肉身을 聖經대로 믿고, 成肉身의 目的을 '罪 사함'에 두는 것이 分明히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의 苦難과 죽으심과 賣場當河心, 陰部에 내려가심(비하)을 모두 우리의 罪問題를 푸는 것과 聯關시켜 說明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復活과 昇天, 하나님 右便에 앉으심 等(勝귀)을 그리스도의 勝利로서 그의 敎會를 위한 眞正한 統治로서 理解한다. 特히 칼뱅은 다른 神學者들에 비하여 그리스도의 '昇天'을 크게 强調하고, 昇天하신 그리스도께서 萬王의 王으로서 그의 나라를 擴張하시며, 세워나가시는데 있어서 地上의 敎會를 使用하신다는 點을 宣敎的으로 說明하고 있다.

最近에는 宣敎學이 發達하여 敎會를 宣敎의 한 機能으로 보는데, 칼뱅은 反對로 宣敎를 그리스도의 王權統治가 이루어가는 敎會의 權勢로 본다. 그러므로 칼뱅의 宣敎論은 그의 基督論에서 出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칼뱅의 獨特하고 劃期的인 主張으로서 一般 宣敎學의 出發點과는 아주 다르다. 現代 牧會에서 牧師 中心이 아닌 平信徒 中心使役이 强調되고, 宣敎分野에서도 人本主義 傾向이 많은데, 칼뱅의 基督論은 이런 問題에 對해 明確한 解答을 준다.

칼뱅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社會事業家도 아니고, 하나의 道德敎師度 아니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죽음을 깨고, 罪와 地獄을 이기며, 魔鬼를 꺾으며, 世上을 統治하시는 萬王의 王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그리스도를 傳해야 오늘 날의 敎會와 聖徒들은 힘을 얻어 信仰이 强化되고, 宣敎도 亦是 權威있는 使役이 될 것이다. [22]

聖靈論 [ 編輯 ]

이은선 博士의 硏究를 紹介한다. 칼뱅의 聖靈論은 하나의 獨立된 主題로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基督敎 强要의 거의 모든 主題와 聯關되 어 있는 包括的인 主題이다. 그러므로 그의 聖靈論의 內容을 한마디로 表現하거나 特性化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宗敎改革 當時의 로마 카톨릭과 急進 宗敎 改革者들 사이의 中途에서 聖靈論을 定立하면서도 루터나 츠빙글리 보다는 훨씬 더 包括的으로 取扱하였다. 그래서 워필드는 칼뱅을 聖靈의 神學者라 言及하였고 大部分 學者들도 이에 同感하고 있다. 칼뱅은 聖靈이 單純한 神的 能力이 아니라 三位一體의 第3位임을 强調하고, 聖靈께서 創造와 宇宙 秩序를 維持하시며, 모든 사람에 共通的인 一般 恩寵의 根源이라고 言及하고 있으나, 그의 聖靈에 對한 言及 은 主로 敎會와 關聯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칼뱅은 聖靈의 歷史의 宇宙的 使役, 人間 社會의 一般 恩寵의 使役을 言及함에도 不拘하고 敎會와 關聯된 側面에 焦點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點에서 聖靈의 宇宙的 舊怨 使役을 主張하는 헨드리쿠스 벌코프나 몰트만의 聖靈論과는 다르다. 칼뱅의 聖靈論은 當時 새로운 敎理를 定立하면서 어디에 最高의 權威를 둘 것이냐 하는 問題와 密接하 게 連結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은 敎會가 聖經을 決定했다는 立場이었고, 再洗禮派는 聖經과 分離된 聖靈의 새로운 啓示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한 狀況에서 칼뱅은 聖靈의 靈感으로 記錄된 聖經은 客觀的 人 權威를 가지고 있으며, 客觀的으로 記錄된 聖經은 聖靈의 內的 證言으로 우리에게 主觀的으로 認識 되는데, 이 主觀的 認識의 內容은 信仰 안에서 믿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기서 로마 카톨릭의 犬 해와 再洗禮派의 見解를 克服하고 最高의 權威로서 聖靈으로 令監된 聖經의 權威를 確立하면서, 同時에 聖靈을 통한 그리스도의 救援의 確信을 定立하게 된다. 칼뱅은 聖靈을 통하여 우리 밖에 있는(extra nos)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intra nos) 그리스도가 되 며, 그 以後에 우리는 中生, 믿음, 稱의, 聖火, 映畫의 길을 가게 된다고 한다. 敎會의 聖職者들의 召命 도 聖靈에 依해 주어지고, 敎會의 說敎와 成禮도 聖靈의 歷史로 結實을 맺게 된다. 그는 은사에 對하여 方言, 治癒 같은 特別한 隱士들은 사라졌다고 보았고, 洗禮와 聖靈에 依한 衆生은 聯合되어 있다고하여 恩師論者들과는 다른 立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聖徒들에게는 恩師가 주어져 있는데, 이 恩師 들의 目的을 敎會를 세우고 서로 돕고 有益하게 하려는 것임을 提示하였다. 이러한 側面에서 그의 聖靈 論은 대단히 實踐的이고 牧會的인 觀點을 가지고 있다. [23]

칼뱅의 二重豫定論 [ 編輯 ]

칼뱅에 있어서" 豫定 "은 舊怨 과 關聯되는데, 恩惠로 어떤 사람들을 永遠한 救援으로 選擇하였고 反面에 自身들의 罪때문에 그리고   原罪 로 인해 永遠한 審判을 받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다는 것이다. 前者에 對해서는 無條件的인 選擇이라고 부르고 後者에 對해서는 有機라고 부른다. 칼빈主義 에서는 電子들은 하나님에 依해서 믿음으로 中生 하도록 有效的인 召命으로 豫定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칼뱅주의 二重豫定論 이다.

贖罪 [ 編輯 ]

켄달(R. T. Kendall)은 칼뱅의 贖罪論과 後記 칼뱅주의者들의 見解가 다르다고 主張하였다. 켄달은 칼뱅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그러나 오직 選擇된자를 위한 仲保者가 되신다고 한다. 폴 햄(Paul Helm)은 칼뱅과 淸敎徒는 그리스도는 選擇된 者를 위해 죽으시고 選擇된자를 위해 仲保者가 되신다고 主張하였다." [24]

그리스도와 聯合 [ 編輯 ]

칼뱅 은 基督敎 强要 3卷에서 그리스도와 人間의 靈的 聯合이 어떻게 成就되는지를 說明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確固하고 確實한 神 知識으로서 믿음을 定義한다. 믿음의 效力은 悔改와 罪의 除去이다. 이것이 靈的인 거듭남(중생)이며 아담의 轉嫁 前에 거룩한 狀態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完全함에 이를수 없다. 믿는 사람은 持續的인 罪와 鬪爭을 해야 한다. [25] 그는 稱義를 하나님께서 恩惠를 받게하여 우리를 의롭다 여기는 것이라고 한다. [26] 알리스 맥그라스에 따르면 마르틴 部署 는 稱의는 道德的 衆生을 일으킨다고 보는 反面에 칼뱅은 稱義와 衆生은 믿음을 통하여 믿는자가 그리스도와 聯合의 結果라고 主張한다. [27]

敎會論 [ 編輯 ]

배경식 博士는 다음과 같이 說明한다.

칼뱅은 自身의 躊躇書人『基督敎 强要』를 敍述할 때 많은 自然的인 例들을 들면서 信仰의 重要한 槪念들을 說明한다. 이는 讀者들이 이미 가톨릭 信仰에 물들여져 聖經에 無知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로 하여금 改新敎 信仰을 더 잘 理解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宗敎改革者들이 꿈꾸고 있었던 참 된 敎會의 모습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敎會란 建物이나 制度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 다시 말 해 예수 그리스도를 舊株로 믿는‘성도들의 모임’(The communion of the saints)이었다. 칼뱅의 교회론을 敎理的 側面에서만 본다면‘하나님의 말씀이 올바 로 宣布되고 聖禮典이 바로 執行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規定하면 되 지만 그의 敎會論이 辨證的人 모습을 가지려면 韓國敎會의 現在 모습 과 견주어 볼 때‘하나님의 거룩한 敎會를 만들기 爲해 勸懲이 信實하 게 施行되는 곳’이어야 한다. 칼뱅이 말하는‘개혁하는 敎會’(Ecclesia reformanda)란 1544年 2月에 열린 슈파이어(Speyer) 宗敎會議에서‘가톨릭 敎會로부터의 分派的 人 行動이 아니라 하나님의 眞理를 찾고 참된 敎會를 回復하려는 것’ 임을 보여준 辨證的人 性格을 가진다. 여기에서 그는 가톨릭 敎會가 行하는 하나님 代身 마리아나 成人들 甚至於 聖物들까지를 崇尙하는 他 落汗 禮拜를 指摘하면서 非聖經的人 人間의 功勞에 依한 救援館과 가 톨릭 敎會의 人爲的인 聖禮典 批判, 나아가서는 聖職 賣買와 잘못된 校 回程치 等 信仰의 害惡들에 對해 指摘하였다. 이에 對한 칼뱅이 提示하는 治療冊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初代敎會의 信仰的 慣習과 標準에 近 巨漢 것이었다. 칼뱅은 敎會를 信仰生活의 學校라고 前提하고 敎會의 必要性을 人 間의 無知와 怠慢과 懦弱함 때문에 外的인 補助手段으로 敎會를 세우 시고 敎會를 통해 拘束 活動을 하신다고 말한다. 無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합하도록 自身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恩惠를 보여주신 곳이 바로 信仰生活의 學校인 敎會이다. 그렇다면 信仰生活의 學校에서 行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1. 말씀 의 바른 電波와 2. 成禮의 正當한 執行 그리고 3. 勸懲의 信實한 施行이다. 칼뱅은 敎會를 聖徒들의 信仰學校 乃至는 訓鍊場이라고 言及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信仰은‘우리를 香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對한 分明 하고도 確固한 認識’이라고 定義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通 해 보여주신 十字架의 사랑과 臺속的인 죽음 그리고 復活의 영광스러 韻 永生의 確信과 所望을 아는 것이다. 敎會의 基礎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 敎會의 基礎는 사람의 判斷이나 司祭職에 있는 것이 아니라 使徒들 과 豫言者들의 敎訓에 있다. 그래서 說敎者의 位置가 重要하며 말씀이 效果를 갖기 위해서는 聖靈의 歷史가 重要하다고 말한다. 칼뱅이 말하는 聖經的인 成禮란 무엇인가? 그것은 人間의 無知와 懦弱함을 돕는 또 하나의 手段이며 그리스도의 福音 傳播를 위한 또 하나의 方便이다. 成禮는 우리 信仰의 弱함을 도와주기 위해 主께서 于 里를 向한 그의 善한 約束들을 우리 良心에 인치市는 外的 表示이며 文書에 찍힌 印章이며 하나님의 豐盛한 恩惠를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또한 成禮는 믿음의 집을 建築할 때 말씀에 基礎를 둔 기둥으로 比喩 된다. 成禮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成長하기 위해서 칼뱅은 먼 저 內的 敎師인 聖靈이 오셔야 한다고 말한다. 칼뱅이 말하는 넓은 意味에서의 成禮는 하나님이 自己의 約束을 확 症하기 위해 提示한 모든 標識들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生命나 무, 노아와 그 後孫들에게는 무지개, 아브라함과 그 後孫들에게는 割禮 等等 各 時代에 맞도록 여러 가지 方法으로 施行하셨다. 이것들이 그리 스道께서 오시기 前 유대人들의 聖禮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誤審으로 이것들이 廢止되고 洗禮와 聖晩餐이라는 두 가지 成禮가 制定되어 오 늘 그리스도의 敎會가 使用하고 있다. 칼뱅이 말하는 聖禮典을 綜合하여 보면1. 成禮의 主人은 하나님이 詩며, 2. 成禮의 本體나 實體는 그리스도이시고, 3. 成禮는 우리 信仰의 弱함을 도와주기 위한 것, 4. 聖禮典은 內的 스승인 聖靈이 같이 계실 때 비로소 그의 任務를 行한다. 5. 株를 敬拜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 지며 한 믿음을 告白하도록 奬勵하시려는 것이다. 칼뱅은 勸懲의 必要性을 論하면서 敬虔한 君主들이 權威를 가지고 國家의 强制力을 통해 敎會問題에 干涉하는 것을 敎會의 秩序를 保存 하며 確立하는 것이라면 그 介入을 許容하였다. 칼뱅이 말하는 勸懲의 目的은 무엇인가? 1. 醜惡하고 부끄러운 生活을 하는 者들에게서 그리 스道人이라는 이름을 빼앗으려는 것, 2. 선량한 사람이 惡한 사람들과 交際함으로 말미암아 타락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 3. 自身의 醜惡함 에 對한 부끄러움에 스스로 悔改하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敎會가 勸懲을 行함에 있어‘온유한 心靈’(갈 6:1)을 갖는 것이 合 當하다고 말한다. 懲戒 對象者를 溫柔하고 아버지 같은 態度로 對하며 懺悔者가 敎會가 滿足할 程度의 意識을 지키면 安受함으로써 恩惠 안으로 받아들이는 和睦을 優先으로 하였다. 그리고 칼뱅은 勸懲을 통해 서 分離를 追求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됨을 期待하는 것이었다. [28]

終末論 [ 編輯 ]

本書의 著者인 퀴스토르프는 칼뱅의「기독교 强要」와 聖書註釋과 說敎와 그 밖에 다른 著書들 속에 散在해 있는 칼뱅의 終末論的 死相을 한데 모아 體系化하였다. 所望, 靈魂 不滅, 審判과 그리스도 안에서 成就될 完成에 關한 칼뱅이 思想을 明快하게 要約하고 있다. 칼뱅의 終末論은 그의 基督論과 密接한 關係를 맺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칼뱅의 終末論的 所望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贖罪事業의 完成에 旗幟를 두고 있다. 칼뱅은 主님의 再臨의 날자를 正確히 알 수는 없으나 主님의 再臨 事件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잠들어 있거나 살아 있는 聖徒들의 終末論的 所望이 窮極的으로 成就될 것을 굳게 믿었다. 최우간 크리스찬으로서 健全한 聖書的 終末論을 갖는다는 것은 絶對的으로 重要하다. 萬一 우리들이 主님의 再臨을 통하여 우리들醫永生에 對한 所望이 成就될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地上에서 바른 信仰生活을 營爲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므로 終末論과 倫理는 密接한 關係가 있다고 報 수 있다. 바른 終末論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健全한 信仰生活을 할 수 있다.


基督敎 强要 3卷 마지막 章이 바로 칼뱅의 終末論이다. 最後의 復活 敎理를 主張함, 1-4 1. 復活의 所望 : 이 所望의 重要性과 이 所望에 對한 여러 가지 問題點 2. 하나님과의 聯合을 思慕하는 것이 復活 所望에 힘을 준다. 3. 바라는 復活은 몸의 復活이다 : 그리스도의 復活이 그 原形이다. 4. 몸의 復活의 根據는 하나님의 全能河心이다. 5. 異敎徒들의 反對論을 葬禮로 反駁함, 千年王國論者들의 誤謬 6. 肉身은 復活하고 靈魂은 不滅한다. 7. 現世에서 입고 있던 몸으로 復活함 8. 몸을 尊重하는 葬禮의 意味 9. 不信者들의 復活 10. 永遠한 福 11. 無用한 質問들을 處理함 12. 버림받은 者들의 處地 어거스틴 以後로 칼뱅만큼 歷史觀念을 하나님의 나라 事故와 관련시킨 者도 없다. 칼뱅의 歷史理解는 온통 力動的인 것이다. 칼뱅에 依하면 하나님은 永遠히 創造하고, 永遠히 活動하는 全能者로서, 이 世上 안에서, 이 世上을 통하여 自身의 나라를 세우신다. 모든 歷史事件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다스리고 있다. 歷史 속의 하나님의 뜻의 目標는 自身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世上의 모든 權勢들은 하나님의 榮光의 完全한 實現을 向해 나아간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世界史의 本質的 核心, 그 膽智者, 그 本質的 要素, 그 目標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歷史는 하나님이 永遠 前부터 自身의 이름의 榮光을 위해 일할 者들을 選擇하심으로써 始作되었다. 救贖史의 모든 要素들이 選擇思想 아래 完全히 所屬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歷史는 選擇된 者들만이 아니라 遺棄된 者들에게까지 미치므로, 하나님은 惡도 自身의 뜻 아래 두신다. 그러나 救援의 歷史는 오로지 永遠부터 選擇된 者들에게만 該當된다.

칼뱅에 依하면 世界史의 中心的 轉換點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奇跡 中의 奇跡, 歷史 中의 가장 卓越한 歷史이며 하나님의 救援決意의 原初的 象徵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世上을 創造, 統治하시고 拘束活動을 行하신다. 칼뱅은 메시야 思想이 歷史 속의 宗敎의 基礎, 基本임을 强調했다(그리스도 中心的인 拘束士官). 모든 것들은 메시야를 指示한다.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威嚴, 靈光, 權能이 反映되어 있다.(그리스도론적 特徵) 成肉身, 十字架의 苦難(루터)에 對한 强調보다는 높이 들림받은 者에 對한 强調가 前面에 나타난다(그리스도는 王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前 世上의 統治者로 삼으셨다. 루터가 永遠한 公義를 膳賜하시는 하늘의 新郞인 그리스도를 讚揚했다면, 칼뱅은 높이 들리신 王의 權能적 威嚴을 强調했다.

選擇받은 者들은 地上에서 하나님의 統治를 實現하는 참된, 보이지 않는 敎會이다. 敎會는 사탄의 權勢에 맞서서 싸우는 戰鬪 共同體이다. 萬物이 하나님의 統治 아래 服從함으로써 끝나는 完全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惡의 勢力에 맞서서 치르는 選擇받은 者들의 鬪爭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世界史 속에서 實現된다. 마지막 終末審判은 只今 이미 時間 속에서 展開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完成이다. 世界史 속으로 介入해왔고 世界史 속에서 活動하며 世界審判을 통해 歷史의 마지막에 成就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對한 信仰은 칼뱅의 하나님의 나라 思想의 가장 重要恨 本質이다. 이런 信仰은 敎會的-宗敎的-政治的-經濟的 現實 全體와 온통 關聯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地上的 現實은 하나님의 現實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世上은 하나님의 榮光의 實現手段으로서 높은 價値를 附與받는다. 칼뱅에게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榮光의 觀點 下에 있다. 徹底히 現實的인 그리스도의 統治思想, 徹底히 現實的인 칼뱅의 生活(敎師, 政治가, 議員, 組織神學者, 敎會치리子)은 地上에서 하나님의 統治 理念을 그리스도교 文化의 理念으로 變形시키려는 試圖 아래서 新訂政治理念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榮光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意識이 精巧한 君主政治的 特徵과 結合되어 나타났다. [29]

칼뱅과 基督敎 文化 [ 編輯 ]

칼뱅은 人間이 만들어내는 文化의 잘못을 指摘한다. 基督敎綱要(1:5:13)에서 祖上의 意識과 生活의 慣習, 祖上의 法規나 人間의 規則은 하나님을 禮拜하기 위한 敬虔에 不足한 點을 말한다. 따라서 基督敎 文化의 올바른 形成에는 人間에 依해서 形成된 文化는 不足한 것으로 본다.

基督敎 文化의 根源으로 宗敎와 敬虔 [ 編輯 ]

文化와 宗敎의 密接한 關係속에서 一般的으로 基督敎 神學者들은 文化는 宗敎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主張한다. 特別히 宗敎改革家 章 칼뱅은 참된 宗敎는 하나님을 眞摯하게 두려워하는 것과 連結된 믿음이라고 한다.(기독교 强要 1:2:2) 그러나 이 두려움은 스타티우스(Statius)가 말하는 것처럼 恐怖를 造成하여 神들을 만들어내는 奴隸的 感情이 아니다.(기독교 强要 1:4:4) 自發的 敬畏이며 聖經에 一致한 合法的 禮拜을 包含한다.(기독교 强要 1:2:2) 또한 참된 宗敎는 宇宙의 規則같은 神의 意志에 一致해야 하는데 여기서 神의 意志란 聖經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에 있어서 神을 敬畏하는 것은 敬虔이라는 말로 表現 할 수 있다. 그는 宗敎와 敬虔을 같은 意味로 보았다.(기독교 强要 1:2:1, religion nec pietas) 좀더 仔細하게 說明을 하는데 密接한 血緣的 比喩의 關係로 理解하였다. 宗敎가 태어나는 것이 바로 敬虔(스승)인데 바로 하나님에 對한 사랑에 敬畏心이 結合된 것이 "敬虔"이라고 본다.(기독교 强要 1:2:1)

이런 觀點에서 볼때 文化와 宗敎와 敬虔을 密接한 關係性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基督敎 文化는 基督敎의 本質로서 敬虔과 必然的으로 共有한다고 볼 수 있다. 基督敎 敬虔이 없다면 基督敎 文化가 바르게 形成될수 없다.

一般恩寵으로서 文化 [ 編輯 ]

神學者 김지훈에 따르면 敎會는 世上 文化 위에 君臨할 수 없고, 世上 文化는 敎會를 世俗化할 수 없다고 말했다. 中世 敎會는 하나님의 나라와 世上 文化를 矛盾關係로 봤다. 敎會 밖 세상은全部 惡(惡)의 世界로 認識한다. 그러나 宗敎 改革家 들인 루터 칼뱅 은 世上 文化 亦是 하나님의 膳物이라고 理解한다. 그로 인해 많은 基督敎人들이 世上 文化에 參與하게 됐고, 그 結果 文化發展이 이뤄졌다고 본다. 敎會는 聖經의 法(特別恩寵)李 있교, 世上은 良心의 法(一般恩寵)李 役事한다. 이 두 世界 모두 하나님의 統治 아래 있으므로, 世上 文化를 排擊하기 보단 그 文化 속에서 하나님의 恩寵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勿論 聖經은 敎會와 世上을 葛藤關係로 表現한다. 그러나 極端的인 二分論은 基督敎人의 文化活動을 抑制할 수 있다고 한다. 敎會는 宣敎 뿐 아니라 文化 活動에도 關心 가져야 한다. 敎會의 文化 參與는 敎會만의 敎理를 내세우지 말고, 敎會와 世俗 社會의 共通分母인 一般恩寵으로 接近해야 한다고 본다. [30] 칼빈學者 이양호 博士는 文化는 하나님을 알고 敬虔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31] 칼빈은 人間의 훌륭한 文化는 一般恩寵 의 領域에 屬한다고 한다. 世俗的 著者들 속에서 비록 그들이 歪曲된 마음 狀態에 있지만 그들에게서 빛나는 讚揚할 만한 眞理이 빛을 본다고 한다.(기독교강요 1:5:7)

칼빈의 神學的 貢獻 [ 編輯 ]

  • 神學의 原理와 삶의 規範으로서 오직 聖經을 强調하였다
  • 創造와 統治 그리고 믿는자에 對한 選擇을 强調한 하나님이 絶對主權을 强調하였다.
  • 聖靈의 神學者로서 모든 神學的 主題속에 對한 聖靈論의 發展을 주었다.
  • 聖經 解釋의 原理로서 聖經을 聖經으로 解釋하는(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方式에 貢獻을 하였다. 이원리를 가지고 簡潔하고 容易한 方法 을 통하여 讀者들이 聖經을 쉽게 理解하도록 하였다.
  • 敎育, 社會奉仕, 經濟, 醫療와 같은 社會的 活動에 큰 影響을 주었다.

칼뱅年代表 [ 編輯 ]

칼뱅의 當時 狀況의 歷史的 脈絡을 理解하기 위하여 칼뱅 年代表는 도움을 준다. [32]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韓國語 [ 編輯 ]

  1. 안명준, 《칼빈의 聖經 解析學》(基督敎文書宣敎會: 1997). ISBN   89-341-0566-6
  2. 안명준, 《칼빈解釋學과 神學의 遺産》(基督敎文書宣敎會: 2009). ISBN   9788934110361
  3. 안명준外, 《 칼빈神學 2009 》 (성광: 2009). ISBN   9788972524496
  4. 안명준外, 《칼빈神學과 韓國神學》(기쁜날: 2009). ISBN   9788991570474
  5. 안명준外, 《칼빈과 韓國敎會》 요한 칼빈 誕生 500周年 記念事業會 (SFC: 2010). ISBN   9788993325324
  6. 안명준外, 《韓國敎會를 빛낸 칼빈主義者들》, 2020, 킹덤북스.
  7. 하워드 L. 라이스, 改革主義 靈性, 황성철 驛, CLC, 2004

英語 [ 編輯 ]

各州 [ 編輯 ]

  1. Erwin Fahlbusch et al., The Encyclopedia of Christianity , vol. 1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1999), 324
  2. 칼뱅의 하나님 中心
  3. Hesselink 2004 , 74?75쪽 ; Parker 1995 , 4?9쪽
  4. Bouwsma 1988 , 9쪽 ; Helm 2004 , 6쪽 ; Hesselink 2004 , 75?77쪽
  5. Parker 1995 , 4?10쪽 ; De Greef 2004 , 42?44쪽 ; McGrath 1990 , 136?144, 151?174쪽 ; Cottret 2000 , 110?114, 309?325쪽 ; Parker 2006 , 53?62, 97?99, 132?134, 161?164쪽
  6. Heiko A. Obermann, Zwei Reformationen. Luther und Calvin: Alte und Neue Welt Siedler (Siedler Verlag: Berlin, 2003), 171
  7. 李恩宰, 칼뱅을 통해 만나는 韓國敎會의 未來
  8. 존 H. 리스, 삶의 神學, 23-26
  9. 존 H. 리스, 삶의 神學, 26-28
  10. Niesel 1980 , 23?24쪽 ; Hesselink 2004 , 77?78쪽 ; Parker 1995 , 13?14쪽
  11. Parker 1995 , 21쪽
  12. “안명준, '"거룩한 말씀의 도움 없인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칼뱅의 성경관, 韓國基督公報, 2009. 07. 08” . 2018年 2月 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8年 2月 3日에 確認함 .  
  13. 신복윤, <칼뱅의 하나님 中心의 神學>
  14. [1]
  15. [theos & logos 최윤배, 칼뱅의 三位一體論]
  16. Hesselink, 2004, p, 85
  17. Parker, 1995, p. 43
  18. Niesel 1980 , 70?79쪽 ; Parker 1995 , 47쪽
  19. [2]
  20. 윤석주, 칼뱅의 人間論
  21. Randall Zachman, "The Christology of John Calvin," The Oxford Handbook of Christology
  22. [ http://m.pckworld.com/article.php?aid=4504172587 박해경, 칼뱅의 基督論, 韓國基督公報
  23. 이은선, 칼뱅의 聖靈論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4. Paul Helm, Calvin and the Calvinists, 1982, Banner of Truth Trust, p. 81
  25. Niesel 1980, pp. 126?130; Parker 1995, pp. 78?86
  26. Parker 1995, pp. 97?98
  27. Alister E. McGrath,  Reformation Thought: An Introduction  (3rd ed; Oxford: Blackwell, 1999): 125.
  28. 배경식, 칼뱅의 敎會論이 韓國敎會에 주는 意味, 韓國組織神學論叢 第 26輯
  29. 參考資料, 신원균, 칼빈의 終末論 [3] Archived 2020年 6月 3日 - 웨이백 머신
  30. [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Print.html?idxno=32415 김지훈, 第2次 宗敎改革을 準備하라, 未來韓國 2016年 10月 18日
  31. 이양호, 淸敎徒의 靈性과 共和主義, <神學과 敎會>, 第 15號 (2021) : 115-158.]
  32. 칼뱅 年代表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