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朝鮮 孝宗의 國舅
신풍부원군
新豊府院君
|
身上情報
|
出生日
|
1587年 12月 25日
(
1587-12-25
)
|
死亡日
|
1638年 3月 17日
(
1638-03-17
)
(50歲)
|
家門
|
덕수 張氏
|
父親
|
장운익
|
母親
|
密陽 朴氏
|
配偶者
|
靈駕夫婦인 金氏
|
子女
|
1男 2女
장선징
·
인선왕후
|
長幼
(張維,
1588年
1月 22日
(陰曆
1587年
12月 25日
[1]
) ∼
1638年
4月 30日
(
陰曆 3月 17日
[2]
))는
朝鮮
의 文身이다. 本貫은
덕수
(德水). 字는 支局(持國). 號는 溪谷(谿谷)·묵소(默所)이다. 孝宗妃
인선왕후
의 아버지이다.
[3]
官職은
右議政
에 이르렀고, 事後
領議政
에 追贈되고 신풍부원군에 追封되었다. 諡號는 문충(文忠)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板書 장운익(張雲翼)과 어머니 密陽 朴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3歲에 아버지를 잃고 不遇한 少年期를 보냈다.
김장생
의 門下에서 受學하였고, 어려서부터
崔明吉
,
趙翼
,
이시백
과 切親하여 사우정(四友情)으로 불렸다.
[4]
右議政
김상용
의 사위가 되었다.
官僚 生活
[
編輯
]
1605年
(宣祖 38) 鄕試에 壯元을 했고, 1609年(光海君 1) 文科에 及第를 했다. 以後 藝文館·承文院 等에서 官職生活을 始作했다.
[3]
官職生活을 하던 中에
김직재
의 玉이 일어나면서 妹弟 皇上이 김직재 獄事에 連累되어 逆賊으로 逮捕되면서 그는 姻戚이라는 理由로 罷職을 當하기도 했다. 以後 12年 동안 張維는 故鄕인
安山
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隱居하며 讀書와 著述에 專念했다. 이 무렵에 大家의 文章을 거의 다 接했으며, 著書 《묵소高》를 엮기도 했다.
[3]
1623年
仁祖反正
에 加擔하여
定社功臣
(靖社功臣)으로 新風群(新豊君)에 封해졌고, 吏曹佐郞과 暗行御史 等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모시던 國王을 쫓아낸 일을 부끄러워 하였다고 한다.
[3]
그는 功臣이면서도 功臣의 專橫을 批判하고 所長 官人들을 保護하다 左遷을 當하기도 했다.
[3]
以後 大司諫, 大司憲, 大提學, 吏曹判書, 兵曹判書, 工曹判書 等을 지냈다. 仁祖 14年
丙子胡亂
이 勃發하자 崔鳴吉과 함께 强化를 主張하였다. 丙子胡亂 後 외아들 장선징의 處仁 며느리 韓氏가
淸나라
에 끌려갔다가 俗寰되어 돌아오자 仁祖에게 上疏를 올려 아들과 韓氏를 離婚하게 해 달라고 請했으나 仁祖가 이를 許諾하지 않았다.
[5]
生涯 後半
[
編輯
]
1637年
議政府
右議政
에 除授되었다. 그러나 母親喪을 理由로 18次例의 上疏 끝에 물러났다. 事後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封해지고 議政府
領議政
에 追贈되었다.
[3]
그의 많은 著述은 大部分
丁卯胡亂
때 紛失되었고 《谿谷集》(谿谷集), 《谿谷漫筆》(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主解) 等이 남아 있다.
評價
[
編輯
]
그는 朝鮮時代의 思想이 偏僻함을 指摘하여 “中國에는 學術에 갈래가 많아 정학자(正學者)도 있고 單學者(丹學者)도 있고 井州(程朱)를 배우는 者도 있고 陸氏(陸氏)를 배우는 者도 있어 聞慶(門經)李 佛日(不一)한데 우리나라는 侑食無識(有識無識)할 것 없이, 冊끼고 글 읽는 사람은 다 井州(程朱)를 송(誦)하여 다른 學(學)이 있음을 듣지 못하나 우리 士習(士習)이 果然 中國보다 훌륭하고 그런 것인가?”라고 反問하였다. 그러나 尤庵
송시열
은 張維에 對해 "그는 文章이 뛰어나고 義理가 精子와 走者를 主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比較할만한 이가 없다"고 評價하였다.
[4]
그는 陽明學을 先學이라고 비의(非議)함을 辯駁하였으며, 天文·地理·醫術·兵書·그림·글씨에 能通했고, 特히 文章에 뛰어나
申欽
ㆍ
이정구
,
移植
과 더불어 朝鮮 中期 4代 文章家인 月相계택(月象谿澤) 4代價로 꼽혔다.
家計
[
編輯
]
- 할아버지 : 長日(張逸)
- 아버지 : 장운익(張雲翼)
- 어머니 :
密陽 朴氏
- 否認 : 靈駕夫婦인 金氏(永嘉府夫人 金氏, ? ~ 1654) -
김상용
(金尙容)의 딸
- 동생 :
長身
(張紳)
關聯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 ↑
송시열, 『宋子大全』 卷156, 溪谷(谿谷) 張公(張公) 信徒悲鳴
- ↑
『仁祖實錄』, 仁祖 16年(1638) 3月 17日 1番째 記事
- ↑
가
나
다
라
마
바
87. 溪谷 張維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경기일보 2008-12-2
- ↑
가
나
윤홍식·오병문, 2006, 朝鮮선비들에게 배우는 마음 챙김의 智慧, 鳳凰東萊.
- ↑
《朝鮮王朝實錄》 人組 36卷, 16年(1638 無人 / 名 숭정(崇禎) 11年) 3月 11日(甲戌) 2番째記事
- ↑
《朝鮮王朝實錄》顯宗 22卷, 15年(1674 甲寅 / 靑 康熙(康熙) 13年) 6月 4日(精油) 1番째記事 - 人選 王后 指紋 中 "王后에게 언니가 있었는데 얼굴에 腫氣가 나 苦生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