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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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우
張延祐
高麗 의 戶部尙書
在任 1015年
國王 高麗 顯宗
身上情報
出生日 954年
出生地 未詳
死亡日 1015年
死亡地 未詳
國籍 高麗
性別 男性
家門 興德 張氏
父親 長幼(張儒)
徐薰 尙書右僕射 追贈

장연우 (張延祐, 954年 ~ 1015年 )는 高麗 의 文身이다. 本館 興德 (興德)이다.

家計 [ 編輯 ]

아버지 長幼(張儒)는 後百濟 榮州(瀛州; 現在의 全羅北道 高敞郡 ) 上質縣(尙質縣; 現在의 흥덕면 ) 出身으로 後三國 時代 亂을 避해 五月(吳越)로 避難갔다가 高麗 太祖가 三國을 統一한 뒤에 換局하여 光宗 때 禮賓省(禮賓省)에서 中國 使臣을 接待하는 일을 專擔하였다.

生涯 [ 編輯 ]

954年 張維의 아들로 태어났다.

1011年(玄宗 2) 거란 이 侵略하여 太廟(太廟)와 宮闕을 불태우자 顯宗 羅州 로 避難하였다. 이 때 여러 臣下들이 河拱辰 (河拱辰)李 붙잡혔다는 風聞을 듣고 모두 달아났으나 채충순 (蔡忠順)· 躊躇 (周佇)· 류종 (柳宗)· 김응인 (金應仁) 等과 더불어 扈從한 功으로 中樞使 (中樞使)를 거친 뒤 判御史臺事 (判御史臺事)가 되었다.

1014年 日直(日直) 황보유의 와 더불어 거란 侵入 以後 軍額 (軍額)의 增加로 百官의 祿俸이 不足해지므로 京軍 (京軍)의 永業田 (永業田)을 빼앗아 祿俸에 充當할 것을 建議하였다. 이에 上將軍 衰絰 (崔質)과 金薰 (金訓) 等이 主動이 되어 亂을 일으키자 私的 (仕籍)에서 除名되었다.

1015年 金薰 衰絰 等이 處刑된 後에 다시 復職하여 戶部 相서 (戶部尙書)가 되었으나 그 해 死亡하였다. 尙書右僕射 (尙書右僕射)로 追贈되었다. [1]

장연우가 登場한 作品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