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호균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임호균
Im Ho-Kyun
基本 情報
國籍 大韓民國
生年月日 1956年 3月 26日 ( 1956-03-26 ) (68歲)
出身地 大韓民國 仁川廣域市
신장 178cm
選手 情報
投球·打席 우투右打
守備 位置 投手
프로 入團 鳶島 1983年 1次 3順位( 삼미 슈퍼스타즈 )
獲得 타이틀
  • 大韓民國 體育 勳章 (白馬章)
  • 1982年 野球 월드컵 防禦率王
經歷

選手 經歷

코치 經歷

放送 經歷

  • MBC 解說委員 (1991年)
  • SBS 解說委員 (1992年 ~ 1993年)
大韓民國 國家代表팀
월드컵 1982年 서울
大陸間컵 1977 니카라과

임호균 (任昊均, 1956年 3月 26日 ~ )은 前 KBO 리그 太平洋 돌핀스 의 選手이다.

出身學校 [ 編輯 ]

高等學校·大學校 時節 [ 編輯 ]

仁川廣域市 出身으로 仁川창영初等學校 인천남중학교 를 거쳐 인천고등학교 에 入學한다. 인천고등학교 卒業 後(75年) 實業野球 鐵道廳에서 뛰다가 東亞大學校 에 入學했으며 1980年 韓國電力 팀에 入團하여 實業野球 舞臺에 再入城했다. 1977年 니카라과 에서 열린 大陸間컵 野球 大會 優勝에 寄與하여, 1978年 朴正熙 大統領으로부터 體育勳章 第 98號인 白馬章을 받았다.

學窓 時節부터 面刀날 같은 制球力을 보여준 選手로서 그에 關한 많은 逸話 中에 홈 플레이트 위의 담배들의 불씨를 마운드에서 던진 공으로 끈 逸話는 가장 有名하고 第一 獨步的이다. 그만큼 임호균의 制球力은 아마추어 그리고 그의 프로野球 選手 生活까지 그 有名稅와 實力이 이어졌다. 第一 뒷받침 될만한 記錄으로서는 그 當時 最高의 打線을 자랑하던 해태 타이거즈 를 相對로 73具 완봉승 그리고 KBO 리그 歷史上 最短 時間 競技였던 롯데(임호균) - 청보展( 장명부 )이 있다.

프로 野球 選手 時節 [ 編輯 ]

1982年 野球 월드컵 이 끝나고 1983年 1次 3順位 指名을 받아 緣故 팀 삼미 슈퍼스타즈 에 入團했다. 그 해 平均自責 3.03, 12勝(11先發) 15敗 2세이브를 記錄하여, 在日僑胞 出身 投手 장명부 選手와 함께 前期 리그 2位, 後期 리그 2位의 成跡을 올리는 데 寄與하였다. [1] 그 해 시즌 後 11月 권두조 等을 相對로 한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 자이언츠 로 移籍하였으며, 1984年 시즌 平均自責 2.95, 10勝(8先發) 9敗의 成績으로 롯데 자이언츠 의 첫 韓國시리즈 優勝에 寄與한다. 롯데 자이언츠 로 移籍한 트레이드는 4 對 1로서 歷代 가장 큰 트레이드 中 하나로 손꼽힌다. [2]

1984年 부터 1986年 까지 롯데 자이언츠 , 1987年 부터 1990年 까지는 청보 핀토스 , 太平洋 돌핀스 에서 活躍하고 隱退했으며 肝炎 等 여러 가지 理由 탓인지 1988年 부터 下落勢를 탔는데 球團이 本人(임호균)에게 隱退를 慫慂했고 이 過程에서 김성근 當時 太平洋 監督과 球團 사이의 '5勝 覺書 波動'이 벌어졌는데 1990年 7競技에서 勝敗없이 平均自責點 4.60을 記錄하여 시즌 後 隱退했으며 [3] 김성근 監督도 契約期間 1年을 남겨둔 채 監督 자리에서 물러났다.

通算 154競技 44勝(40先發) 56敗 3세이브 平均自責點 3.23을 記錄했다.

選手 隱退 後 [ 編輯 ]

1991年 에는 MBC 에서, 1992年 부터 1993年 까지 SBS 에서 野球 解說家로 活動했다. 1991年 에는, KBO 리그 出身 選手 中 最初로 리틀 리그에 屬하는 "임호균 野球敎室"을 열어 목동야구장 에서 많은 어린이들에게 꿈을 실어 주었다. 大韓民國 最初의 女子 野球 選手인 안향미 前 女子 野球팀 監督도 "임호균 野球敎室"을 거쳤다.

1994年 LG 트윈스 投手 코치로 迎入되어 1994年 韓國시리즈 優勝에 寄與했다. 1996年 부터 1998年 까지 三星 라이온즈 投手 코치로 在職했다. 그 때의 마지막 弟子가 정현욱 이다. [4]

以後 掉尾하여 美國 플로리다州 에 있는 세인트 토마스 大學校 大學院에서 스포츠 마케팅과 매니지먼트를 工夫했고, 2010年 5月에 碩士 學位를 받았다.

卒業 後 歸國한 그는 임호균 베이스볼 아카데미 硏究所를 통하여 2013年 한화 이글스 1次 指名者인 投手 황영국 [5] , 그리고 시카고 컵스 傘下 마이너 리그 投手 이대은 [6] 等을 相對로 特殊訓鍊 및 再活 等을 시켰고 그 渦中에 다른 몇몇 實力있는 꿈나무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2015年 8月 15日 에는 최계훈 코치가 外國人 選手를 알아보기 위해서 스카우트 팀과 美國으로 떠나는 동안 高陽 다이노스 의 投手 인스트럭터 로 迎入됐다. 契約期間은 두달이다. [7]

通算 記錄 [ 編輯 ]





































4














W
H
I
P
1983 삼미 28 12 15 .444 3.03 35 29 15 1 2 0 234.2 231 16 52 1 86 6 1 1 94 79 954 1.21
1984 롯데 29 10 9 .526 2.95 27 24 9 0 0 0 161.2 151 9 80 2 44 3 0 2 64 53 692 1.43
1985 30 10 10 .500 3.23 27 25 3 1 0 0 145.0 136 8 77 0 43 0 0 3 63 52 617 1.47
1986 31 3 8 .273 3.32 19 16 2 0 0 0 89.1 95 4 46 1 27 4 0 4 40 33 395 1.58
1987 청보 32 9 10 .474 3.78 27 21 11 1 0 0 173.2 185 8 80 9 38 6 0 8 80 73 748 1.53
1988 太平洋 33 0 3 .000 7.07 5 4 0 0 0 0 14.0 23 1 10 0 4 0 0 1 13 11 68 2.36
1989 34 0 1 .000 2.40 7 1 0 0 1 0 15.0 13 0 6 1 6 2 0 0 7 4 64 1.27
1990 35 0 0 ---- 4.60 7 0 0 0 0 0 15.2 14 0 6 0 4 1 0 1 9 8 67 1.28
KBO 通算 : 8年 44 56 .440 3.32 154 120 40 3 3 0 849.0 848 46 357 14 252 22 1 20 370 313 3605 1.42
  • 시즌 記錄 中 굵은 글씨 는 該當 시즌 리그 最高 記錄

主要 記錄 [ 編輯 ]

  • 1987年 해태戰에서 73具 완봉승 (청보)
  • 1985年 靑保全에서 1時間 33分(99分)으로 완봉승 - 最短時間 競技(롯데)

受賞經歷 [ 編輯 ]

參照 [ 編輯 ]

  1. 삼미 投手 임호균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스포츠春秋》, 2009年 4月 13日 박동희 記者 作成
  2. "草創期 歷代 最高의 트레이드" -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3. 김원익 (2012年 9月 20日). “[傳說을 찾아] 임호균, “김성근 監督 5勝 覺書 願하지 않았다” 下” . MK스포츠 . 2020年 4月 14日에 確認함 .  
  4. 임호균 “잘 자란 弟子 현욱 뿌듯” - 동아일보
  5. "'한화의 選擇’ 황영국, `8個月 前만 해도…`" - MK 스포츠
  6. 임호균 "너의 폼으로 돌아오는 區나" - MK 스포츠
  7. `이대은 스승` 임호균, NC 인스트럭터 赴任 - MK 스포츠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