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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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 이요
麟坪大君 李?
朝鮮 仁祖의 王子
이름
이요(李?)
시호 充警(忠敬)
身上情報
出生日 1622年 12月 10日 ( 1622-12-10 ) (陰曆)
死亡日 1658年 5月 13日 ( 1658-05-13 ) (35歲) (陰曆)
父親 人組
母親 인열왕후 韓氏
配偶者 복天夫婦인 冬服 吳氏
子女 4男 2女 (6男 4女)
福녕軍 · 복창군 · 복평군 · 복선군
이금온 · 정중만의 妻 李氏

인평대군 이요 (麟坪大君 李?, 1623年 1月 10日 ( 1622年 陰曆 12月 10日 ) ~ 1658年 6月 13日 ( 陰曆 5月 13日 ) )는 朝鮮 의 王子이다. 人組 의 셋째 아들이자, 소현세자 孝宗 의 동생이다.

姓은 (李), 本名은 (?), 本貫은 全州 (全州), 용함 (用涵), 雅號 松契 (松溪), 시호 充警 (忠敬)이다.

아버지 人組 에 依해 아들 없이 죽은 三寸인 능창대군 의 死後養子로 入養되었다. 따라서 남연군 의 戶籍과 日帝强占期 當時 興親王 , 이준용 戶籍 에는 능창대군의 後孫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槪要 [ 編輯 ]

人組 인열왕후 의 셋째 아들로, 丙子胡亂 以後 淸나라 에서 人質 生活을 하였고, 以後 謝恩使로 數次例 淸나라를 訪問하였다. 孝宗 과는 어려서부터 매우 두텁게 지냈으며 仁平大君의 子女들 또한 孝宗과 顯宗 寵愛 를 받았다. 庚申換局 當時 아들 복창군 복선군 三福의 玉 에 連累되어 死刑되었다. 仁平大君의 後孫들은 王室 의 傍系에 不過하였으나 長男 福녕軍 의 7代孫 翼城軍 翼宗 의 養子로 入籍되어 高宗 으로 卽位하였다.

生涯 [ 編輯 ]

出生 [ 編輯 ]

1622年(光海君 14年), 宣祖 의 孫子인 능양군( 人組 )과 淸聲賢夫人( 인열왕후 ) 韓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듬해 아버지 능양군이 仁祖反正 으로 卽位하면서 入宮하였다.

王子 時節 [ 編輯 ]

1629年 (仁祖 7年) 12月, 인평대군(麟坪大君)에 冊封 되었다. [1] 1634年 (仁祖 12年) 11月 27日, 五段 의 딸, 冬服夫婦인 吳氏와 婚姻하였다. 仁平大君과 吳氏는 6男 4女를 낳았으나 4男 2女만이 成長하였다.

丙子胡亂 後, 두 兄 소현세자 , 봉림大君 (後날의 孝宗)과 함께 淸나라 에 人質로 끌려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 1650年 부터 네 次例에 걸쳐 謝恩使로 淸나라를 訪問했다. [2]

仁平大君은 孝宗 卽位 後까지 살아남은 孝宗의 唯一한 冬服 아우였기에 孝宗은 仁平大君과 友愛가 좋았으며 그 아들들 또한 寵愛했다. [3] 인평대군이 庶人들로부터 몇 次例 謀陷을 받았을 때도 孝宗의 寵愛로 危機를 謀免하기도 했다. [4] 인평대군이 宮闕을 出入할 때에는 집안 사람처럼 후히 待接하였고 稀貴한 物件을 두고 勝負를 벌이기도 하였다. [5] 孝宗의 아들 顯宗 또한 四寸인 仁平大君의 아들들과 親兄弟처럼 가까이 지내며 朝廷 일에 참여시켰고,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宗親이 없었던 肅宗 또한 五寸 堂叔인 三伏 兄弟들을 待接하였다. [3] [4]

肅宗 의 外戚인 김우명 김석주 는 三伏 兄弟의 外叔父들이 男인 政權의 實勢인 오정위 , 오정일 等임을 警戒하였고, [6] 어리고 後嗣도 두지 못한 肅宗에게 變故가 생기면 王位가 仁平大君의 아들들에게로 갈지도 모른다는 危險性 때문에 이들 兄弟를 除去하려 하였다. [3] 이로 인해 일찍 죽은 福녕軍을 除外한 나머지 복창군 , 복선군 , 복평군 은 後날 三福의 玉 에 連累되었다. [7]

死亡 [ 編輯 ]

1658年 仁平大君의 病勢가 危篤하자 孝宗 이 直接 집을 찾아갔으나 臨終을 보기 前에 죽었다. [8] 墓는 京畿道 抱川市 에 있다.

 

戊戌年(1658) 1月에 공이 感氣에 걸려서 질질 끌어 여름이 되도록 낫지 않으니,
上( 孝宗 )이 공의 집에 親臨下였다.
그러자 公이 병든 몸을 이끌고 억지로 일어나서 옷을 바르게 여미고 뜰 아래로 내려왔다.
상이 손을 잡고서 올라가서는 共의 얼굴빛이 憔悴한 것을 보고 自身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世子( 顯宗 )와 여러 公主들도 모두 와서 서로 慰勞하였는데,
마치 한집안 사람을 對하는 듯한 例로 對하여 해가 저문 뒤에야 돌아갔다.
5月 13日에 病이 갑자기 危篤해지자, 床이 몹시 놀라 肩輿(肩輿)를 타고 곧장 달려오고,
屍身(侍臣)들은 모두 걸어서 따라왔다.
上( 孝宗 )이 공의 집 門 앞에 이르러서는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 두세 次例 길게 功을 불렀으나,
공은 이미 應答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像이 屍身을 부여잡고 痛哭을 하였고, 몸소 殮襲을 하였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粥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世子( 顯宗 ) 亦是 공의 여러 子息들을 부여잡고 痛哭을 하니,
左右에 있던 사람들이 비통하여 쳐다보지 못하였다.
3日째 되던 날에는 賞( 孝宗 )이 또 비를 무릅쓰고 親臨하였으며,
葬事를 치르는 데 必要한 여러 가지 道具와 祭典(祭奠)을 올리는 物品을
모두 大闕 안에서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葬禮를 主管하는 中觀에게 이르기를,
 “大軍이 平素에 每番 費用을 줄여서 弊端을 없애라고 말하였다.
 그러니 모든 일을 되도록 簡略하게 하여 그의 마음에 副應하라.” 하였다.
葬事를 치르는 날짜가 定해지자, 上( 孝宗 )이 親臨하여 祭祀를 지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침 玉候가 靡寧하였던 탓에 中士를 派遣해서 親히 祭文을 지어 祭祀지냈다.
그 祭文에 어려서부터 함께 놀았던 즐거움과 中年에 헤어지고 만난 情을 모두 敍述하였는데,
말의 뜻이 懇切하여 듣는 사람들이 모두 感激의 눈물을 흘렸다.
? 《인평대군 墓誌銘(麟坪大君墓誌銘)》

丁卯胡亂 때의 功勞로 1628年 原從功臣 1等에 올랐으며 1646年(仁祖 24)에 寧國功臣 1等에 冊封되었다. 否認 복天府夫人은 監査 增 領議政 오단의 딸이다. 오단의 後孫들은 後日 남인 에 加擔하게 된다.

人物 [ 編輯 ]

仁平大君은 諸子百家에 精通하였고 詩書畫에 能해 世宗 의 아들 안평대군 에 比喩되기도 했다. 昭顯世子와 함께 朝鮮을 찾은 淸의 畫家 맹영광 과 交流하기도 했다. [2] 〈告白도〉,〈노승하관도〉,〈산수도〉와 같은 作品을 비롯해 〈송계집〉,〈燕行錄〉,〈山行錄〉같은 著書를 남겼다.

咀嚼 [ 編輯 ]

著書 [ 編輯 ]

  • 《燕行錄 (燕行錄)》
  • 《송계집》
  • 《山行錄 (山行錄)》

作品 [ 編輯 ]

  • 《山水圖》
  • 《노승하官道 (老僧遐觀圖)》
  • 《告白도 (古栢圖)》

家族 關係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仁祖實錄 》 21卷, 仁祖 7年(1629年 名 숭정(崇禎) 2年) 12月 26日 (病者)
    床이 셋째 아들 李요를 인평대군으로 삼을 것을 下敎하다
  2. 朴榮圭, 《한卷으로 읽는 朝鮮王朝實錄》 웅진닷컴, 2004, p.339, ISBN   8901047543
  3. 이덕일, 《尹鑴와 沈默의 帝國》 茶山草堂, 2011, p.170~p.171, ISBN   9788963705712
  4. 이한우, 《왜 朝鮮은 鄭道傳을 버렸는가》 21世紀 북스, 2009, p.177, ISBN   9788950918941
  5. 《孝宗實錄》 18卷, 8年(1657年) 2月 14日 1番째 記事
  6. 이상각, 《火鏡 숙빈 崔氏》 케이엔제이, 2010, p.88, ISBN   9788994080048
  7. 後에 長男 福녕軍의 5代孫 남연군 은신군 의 養子로 入籍하였으며, 그 孫子 再黃은 大韓帝國의 皇帝 高宗 으로 卽位했다.
  8. 《孝宗實錄》20卷, 9年(1658年) 5月 13日 1番째 記事
  9. 栯은 山앵두 욱, 나무이름 類의 두 가지 音으로 읽을 수 있다.